[꿈꾸는 책들의 도시].
 
- * - * - * - * - * - * - * - * - * - * - * - *
 
"처음에 아주 비약적으로 한 장면을 쓰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다가 언젠가 네가 피곤해져서 뒤를 돌아보면
아직 겨우 절반밖에는 쓰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앞을 바라보면 아직도 절반이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그때 만약 용기를 잃으면 너는 실패하고 만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일을 끝내기는 어렵다."
 
said by 호문콜로스.
[꿈꾸는 책들의 도시 2권, 366페이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6-01-2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재밌죠?

하늘바람 2006-01-25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오랫만이에요

bonnie11 2006-01-2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지금 읽고 있는뎅...ㅋㅋ

stella.K 2006-01-2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나요? 겉표지가 좀 조잡해서 별로 안 땡기던데...

하늘바람 2006-01-2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아직 못읽고 찜만 해두었어요. ㅠㅠ
 

문턱은 낮게, 서비스는 높게 그런 도서관 [06/01/20]
[마음을 잇는 책읽기] 문턱은 낮게, 서비스는 높게 그런 도서관

이런 도서관을 원합니다.

걸어서 또는 대중 교통을 갈아타지 않고 10분에서 20분 안에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찾기 쉬운 평지에 지어 몸이 불편한 사람, 어르신,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도 가기 쉽게 해 주십시오. 골목 안에 있는 도서관은 표지판이라도 눈에 띄게 설치하시고요. 그런 곳은 땅값이 비싸 부지 확보가 어렵다고요? 시청이나 경찰서와 같은 공공 건물의 입지 조건을 보면 도서관은 왜 그런 자리에 들어서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친절한 사서와 책이 눈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공공 도서관은 천정은 높고 채광은 부적절하여 어둑하고 휑뎅그렁한 로비나 커다란 기둥, 계단, 그리고 복도와 각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주눅들 것 같은 경비원이나 공익 근무 요원이 맞아주지요. 그리하여 낯선 도서관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 누구도 먼저 다가와 안내해 주지 않고 저 역시 선뜻 물어보기 어렵습니다.

이용자 등록을 좀 자유롭게 할 수는 없는지요? 어른이나 취학 전 유아에게는 어린이책을 대출하지 않는 도서관도 많습니다. 그림책을 좋아하거나 아동 도서를 공부하는 어른들은 어디서 책을 빌려서 봐야 합니까? 아울러 독서 능력이 초등학생 수준을 넘어선 아이들에게는 종합 열람실 이용도 허용하는 유연한 운영이 아쉽습니다.

공공 도서관은 1인당 두세 권을 일주일 또는 열흘간 빌려 주는데 어른들은 독서 시간을 많이 낼 수도 없고 또 책이 두꺼우니 아쉬운 대로 참을 만합니다만 어린이 책은 더 많이 대출해주십시오. 또 도서관 업무 시간에 가지 못하는 이용자를 위하여 방문 대출을 실시하는 것은 어떨까요? 대출한 책을 늦게 반납하면 연체한 일수만큼 대출 정지를 합니다. 하지만 벌금을 내고 그 자리에서 책을 다시 빌리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이 없을 때 가장 허탈합니다. 베스트 셀러는 항상 대출중이고 신간은 아직 입수되지 않은 때가 허다하니까요. 물론 예약도 하고 도서 신청도 합니다.

하지만 원하는 책을 손에 넣는데 몇 번 실패하고 나면 도서관까지 가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안 가게 됩니다. 그리고 도서관의 목적은 이용에도 있지만 지적 유산을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오래된 자료라 하여 무조건 폐기하지 말고 지역별로 적어도 한 도서관은 보존해 주십시오.

찾는 책이 제 자리에 없을 때, 컴퓨터 목록 사용법을 모를 때, 자료 찾는 방법을 모를 때,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등 의문이 생길 때마다 물어볼 수 있도록 항상 이용자와 눈을 맞출 수 있는 사서가 확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어린이 열람실에서는 아이들을 관찰하여 먼저 도움을 주는 사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항상 일을 하느라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으면 다가가기가 힘들답니다.

누구나 쉽게 가고 편리하게 이용하는 도서관을 위하여, 도서관 정책 담당자와 현장 사서들께 부탁드립니다.


(한국일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06-01-2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글이예요. ^^

하늘바람 2006-01-2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바람돌이님

세실 2006-01-21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에고 찔려라...
진짜 일 하느라 컴퓨터 하는지, 알라딘 하느라 컴퓨터 하는지 잘 지켜보세요~~~

모1 2006-01-21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일단 주위에 도서관이 아주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것은 둘째쳐도요.
 

2005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예심평

감동을 주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

1.

아마 요즘 아이들은 동화보다 컴퓨터 게임이나 텔레비전의 개그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볼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동화는 무엇인가?’,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와 같은 생각은 아동문학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봤을 문제이다.

요즘 아이들을 사로잡기 위한 동화라면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재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재미로만 따지자면 컴퓨터 게임과 경쟁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컴퓨터 게임에는 없는 감동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재미는 있으나 감동이 없는 작품은 있어도, 감동이 있는데 재미가 없는 작품은 드물다. 그렇다면 재미란 감동의 한 부분이거나 감동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리라.

아이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아이들의 감수성도, 관심사도 그렇다. 작품 역시 그러해야 한다. 어린이 문학의 ‘어린이’에만 지나치게 얽매인다면 ‘덜 자란’, ‘어린’, ‘아직은 미성숙한’ 같은 말이 작가의 의식을 옭아매어 동화를 계몽의 구실로 삼거나, 가정 · 학교 · 학원 · 동네와 가족 · 친구 · 이웃과의 관계를 그리는 수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예심을 보면서 ‘감동을 주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염두에 두었다. 물론 이런 작품을 쓴다는 것이 말이 쉽지 작가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심사를 하는 사람이나 응모한 작가들이 평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더불어 몇 가지 함께 생각할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수상자든 탈락자든 자신의 문학적 미래를 위해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먼저,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어린이가 독자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쓰지 않으면 ‘어린이 문학’으로 완성하기 어렵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어린이 문학에 걸맞은 구성과 문체를 사용하고 있는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 의인화를 시킨다고 해서 다 어린이 문학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현실적인 시공간과 인물이 등장한다고 좋은 공상동화나 판타지가 되지는 않는다. 내적 질서가 없는 비현실적 시공간은 문학적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물의 성격과 행동, 사건은 타당성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바탕에 철저한 인과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학은 예술적 의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관된 질서나 인과관계가 부족한 글은 이야기 속에 빠져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계속 작품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또한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의 전환이나 연결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품 속 인물이나 스토리에 진실이 담겨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 현상 밑에 숨어 있는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를 보지 못하면 자아와 그를 둘러싼 세계가 충돌하는 모양새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당연히 감동을 주기도 힘들다.

2.

응모한 작품들은 크게 아이들이 일상에서 흔히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이나 가족들과의 관계를 그린 작품, 사회 문제나 역사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 이야기, 다양한 소재의 판타지 등으로 나뉜다.

아이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은 아무리 잘 그렸다고 해도 평범하여 문학상에 걸맞은 참신함이 부족할 우려가 있으며, 사회나 역사 속 아이들은 사회나 역사가 주인공이 되고 아이들이 배경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판타지 류는 자칫 황당함으로 빠지거나 판타지 세계를 설명하는 데 힘을 쏟다가 막연한 신비감만 남길 위험이 있다. 본심에 오르지 못한 작품들은 대개 이런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올해는 특히 눈에 띄는 장편 판타지가 여럿 있었으며, 편수에 못지않게 작품의 수준도 높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어린이 문학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예심자들의 마음이 흐뭇했다.

『푸른빛으로 사라진 아이』는 낙태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린 영혼을 다룬 판타지 동화로, 쉽사리 다루기 힘든 소재를 차분하게 그렸다. 독자를 빨아들이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솜씨가 무척 인상 깊었다.

「두움이의 스물다섯 개의 외국인 친구」와 그 밖의 작품들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일상을 다루면서도 무척 새롭다는 미덕이 돋보인다. 등장인물과 소재 모두 참신하고 상상력이 발랄하다. 하지만 문장이 거칠고 불안정하다는 점, 주로 설명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을 퇴색시켰다.

『할머니는 이 동아가 키울 거야』는 개를 소재로 다룬 연작이다. 흔한 소재이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입담이 작품을 살린 경우였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재미를 넘어서는 의미도 담고 있다. 앞으로 기존 동화와 구분되는 자신만의 서사를 구성해 낸다면 좋은 작가가 될 것이다.

「참나무 숲의 아이들」은 간간히 보이는 논평적 서술과 사건을 해결하는 통속적인 방식이 아쉬웠다.

「네 곁에 있을게」는 작은 섬마을에 사는 진희네 식구의 일상과 인물들의 성격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대화와 서술 모두에서 사실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서사의 밋밋함과 주인공의 성장이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조왕이네 게스트 하우스」는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이 강약 없이 병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피소드도 무게를 실을 것과 간단하게 넘겨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에피소드를 같은 비중으로 다루거나 지나치게 자세히 서술한다면 독자는 이야기를 읽을 때 초점을 찾지 못해 지루해할 것이다. 좀더 버리는 미덕을 발휘하길 바란다.

『소년왕』은 아주 꼼꼼하게 잘 쓰인 흥미로운 장편 판타지이다. 형상화된 인물 캐릭터가 아주 매력적이며 이야기 퍼즐이 복합적으로 잘 짜여 있다. 현실 문제인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태도도 아주 담백하고 어린이 문학의 흔한 도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 특히 환상계와 현실계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점이 돋보였다.

『샤르샤르의 쌍둥이』 역시 정성들여 쓴 장편 판타지이다. 동북아 신화 모티프를 우리 판타지에 적극 활용하려는 점이 눈에 띄었으며 나름대로 환상계의 논리를 구성하려 한 점이 돋보였다. 하지만 현실계와 환상계를 잇는 유기적 연관성의 부족, 즉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 부족한 점이 한계로 보였다.

예심 심사위원

이중현, 임정자, 유영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6-01-0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심사위원 중에 님의 성함이 들어가 있는거죠?

하늘바람 2006-01-09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프락사스님 전혀 아니에요 전 그럴 만한 사람이 못된답니다. 그냥 제가 심사평을 보려고 가져왔을 뿐이에요ㅠㅠ
 

<우리 동화 깊이 들여다보기>
이 세상은 판타지 세계로 통하는 훌륭한 통로 이재복
박기범 선생께

그래요. 보내 준 편지하고 책 잘 받았습니다. 그냥 둘이 할 얘기는 편지로 따로 부치고, 부탁한 대로 『부심이의 엄마 생각』 이야기는 같이 나누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이 책은 시중 서점에서도 구해 보기 힘드니, 이 책을 어떻게든 알려 달란 부탁을 하였지요. 그래서 우선 여기 ‘바끼통’ 카페에라도 써 봅니다. 마침 이번에 『열린어린이』에서, 세 달에 한 번씩 우리 어린이 문학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는 얘기를 써 달라 그래서요. 그 글을 쓸 일도 있었는데, 무얼 쓸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일단 여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되는 대로 써 보다가, 정리가 잘 되면 『열린어린이』에도 여기서 하는 이야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부심이의 엄마 생각』 표지
막상 책 이야기를 하려니까 생각이 딱 막히네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부심이의 엄마 생각』을 읽으면서는 참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고 그러네요. 가슴으로 그냥 이야기하는, 그런 작품을 읽고 나면 사실 할 말이 거의 없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으면 가슴이 딱 막히잖아요. 그냥 말할 수 없는, 말의 그물에 가두기 힘든 그 무엇이 있잖아요. 그걸 억지로 말의 그물에 가두어 두려 하다 보니까, 그게 비평이니 연구니 하는 글들이 참 오히려 작품의 맛을 떨어뜨리고 감상을 방해하고 하는 점도 있지요. 그래서 요즘은 책을 읽고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도 참 조심스럽기만 하군요. 그래요, 뭔가 하고 싶은 가슴 속 이야기는 있는데, 그 놈이 말이 되어서 나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겠어요. 좀 쉬었다 해야지요. 그냥 가벼운 이야기나 하면서.

마침 이번에 낸 책 『어린이와 평화』도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재미있게 한 번 살아 보자고 하는 거니, 역시 우선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이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남 위해 봉사활동 한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미안하고 쑥스러운 점이 있으니까요. 이건 내가 하도 몸의 변화가 심한 사람이라서, 그런 경험에서 하는 말입니다. 예, 정말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죽변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요즘 날씨도 추운데 뭐 먹고 삽니까. 이런 이야기나 합시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따뜻한 국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 동화 공부하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국 끓이는 걸 배웠어요. 오늘 양지 고기를 사다가 한 덩이 일단 물에 넣고 끓였습니다. 그랬더니 기름이 배어 나와서, 이 놈을 일단 쏟아 버리구요. 그리고 나서 다시 물을 붓고 끓였더니 기름기는 싹 가시고 구수하고 담백한 국물만 배어 나왔습니다. 거기에다 무를 넣어서 푹 끓였더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요. 아, 이게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그 국맛이구나. 그래서 그 놈하고 오늘 저녁을 잘 먹었습니다. 며칠 이 국만 있으면 반찬 걱정은 없겠습니다. 겨울에는 그저 뜨뜻한 국을 한 솥 끓여 놓으면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밥을 먹는다는 것처럼 절절한 일도 없는 것 같아요. 밥을 먹으려고 상에 앉으면 저절로 기도가 돼요.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생각이 내면으로 열려요. 먹는다는 것, 그것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도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자연의 목숨을 먹고 사는 거지요. 먹는다는 건, 자연의 목숨이 우리 몸 안에 들어와 산다는 거지요. 그 목숨들은 몸 안에서 소화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 목숨이 담고 있던 영혼은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사는 거지요. 나란 사람은 내가 날마다 먹는 목숨의 영혼들과 형제가 되어 그들과 이야기 나누며 사는 거지요. 그래서 동학에서도 “하날님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아는 데 있다”고 했나 봐요.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안다는 것, 이건 곧 세상을 안다는 것이지요.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왔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요. 『어린이와 평화』 읽은 이야기도 좀 하고, 『부심이의 엄마 생각』이니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을 읽다가 든 생각 이야기도 하면 좋겠는데요. 일단 이 이야기들은 가슴에서만 맴돌고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으니 어떡하겠어요. 이런 이야기라도 그냥 해야지.

지난번 편지에서도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 이야기를 다시 좀 더 하지요. 오랜만에 이현주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반갑던지요. 선생님이 이번에 일 년 동안 회갑을 맞아서 묵언수행을 하셨는데, 말을 안 하니까 날마다 꿈이 꾸어지고, 또 그 꿈이 생각이 나서 이거 참 이상타 하고, 그 꿈이 계속 이어져서 적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꾼 꿈 이야기를 간추려서 낸 책이 바로 『이현주 목사의 꿈 일기』였습니다. 법륜 스님도 마침 『붓다, 나를 흔들다』란 책을 내서, 두 분이 한 서점에서 독자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가서 이현주 목사님도, 법륜 스님도 뵈었습니다. 두 분 다 어찌나 명쾌하게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지요.

내 기억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말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사회자가 이현주 목사님하고 법륜 스님께 서로 대비가 되는 재미있는 질문을 하더군요. 먼저 이현주 목사님께는, 요즘 목사님은 너무 내면의 마음 공부 쪽으로만 달려가는 것이 아니냐, 세상 밖으로 좀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 뭐, 대충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현주 목사님은 이렇게 답을 하시더군요. 나 혼자 살면 그게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을 나누는 게 그게 관념이지, 그게 어떻게 나누어지느냐. 한 사람이 우뚝 서면 그게 소셜 액션 아니냐.

예,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렇지요. 한 사람이 홀로 서서 풍요로운 내면을 유지하면서 자연의 목숨들과 영혼의 형제로 살아간다면, 정말 그건 대단한 정신의 힘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거지요. 그 고립된 삶 자체가요.

그 담에 또 사회자가 이번에는 법륜 스님한테요, 이렇게 묻더군요. 스님은 너무 사회적인 문제에만 몰두하다 보니까 내면으로의 공부는 조금 소홀히 하는 게 아니냐. 이러니까 법륜 스님은 또 아주 재치 있는 답을 하시더군요. 이래요. 예전에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난민 구제 운동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밖에는 총알이 난무하니까 군인들도 막사 안에만 있지 밖으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잘 돌아다니니까 군인들이 당신은 무섭지도 않느냐, 어떻게 이런 데서 그리 잘 돌아다니냐. 그러길래 내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야 사람을 죽이러 온 사람이니까 무섭겠지만, 나야 사람을 살리러 온 사람인데 뭐 무서울 게 있느냐. 그래서 나는 그 때 즐겁게 그 일을 하였다.

예, 이 말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요. 어떤 봉사활동이든지, 당위성 때문에 한다기보다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즐거워서 한다면 그게 최고일 것 같습니다. 즐거워서 하는 사람한테는 당해 낼 재주가 없지요. 즐거워서 하는 사람은 일을 하면 할수록 지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가 샘처럼 솟아나니까요. 즐겁지 않은 일을 억지로 당위성 때문에 명예 때문에 하다 보면 결국은 몸이 버티지를 못하고 병이 나고 말지요. 이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그 때 두 분이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내면과 외면이 어디 따로 있으며, 개인과 집단이 어디 구분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이현주 선생님의 책 서문에 인용되어 있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정말이지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이 어떻게 다른지를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상상한 대로의 세상을 살고 있지 않는가?”

예, 그래요. 이 말이 참 가슴을 탁 치는 그 무언가가 있어요. 그렇지요. 홀로 우뚝 서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그저 즐거워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깨어 있는 상태와 꿈이 어떻게 다르겠어요. 늘 꿈이면서 생시요, 생시면서 꿈이겠지요.

『어린이와 평화』 표지
이번에 낸 『어린이와 평화』란 책도 앞에서부터 쭉 읽어 봤는데, 거기에 이런 얘기가 있더군요. 이라크에서 반전평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잖아요. 캐이시 켈리라는 사람은 얼굴에 주름이 많은 50대 여성인데, 말로만 듣던 IPT를 떠올리면 그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라구요. 또 인도가 고향이라는 수녀님 이야기도 그랬어요. 수녀님은 전쟁이 무섭지 않다구요. 모든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죽거나 살거나 하늘의 뜻에 맡긴다구요. 예, 그래도 죽음이란 참 무지 무지 무서운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죽음을 넘어서 이렇게 평온하게 사는 분들을 보면, 그 삶 자체가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어린이와 평화』를 읽으면서, 거기에 나오는 평화 운동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분들의 사는 이야기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는 것 같아요. 홀로 서는 힘을 주고, 즐겁게 이 삶에 직면하는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동화의 힘이라 할까요. 동화의 본질도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삶에 직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들려지면 좋겠는데요.

이번에 낸 「앗살라 알라이쿰」이란 노래 씨디 있지요. 그 씨디도 보내 주어서 요즘 참 잘 듣고 있습니다. 밥을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이 노래를 틀어 놓고 듣다 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나는 이 노래를 부른 별음자리표인가요. 목소리가 구수하고 힘 있고, 진지하고 뭔가 울림을 주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그 뒤에서 같이 노래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좋던지요.

아이들이 총을 내리라고 외치고, 또 게임처럼 폭탄이 떨어지는 전장의 모습을 노래하는 장면에서는요, 그냥 가슴이 찡하고 눈물도 나고 그래요. 아, 저 아이들이 외치는 저 노래 소리가 바로 ‘분노 없는 분노’의 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전에 무위당 선생님하고 이현주 선생님이 ‘노자’ 대담을 하시는데, 그 때 노자의 어느 구절인가를 말씀하시며, ‘분노 없는 분노’란 표현을 하시더라구요. 나는 그 때 그 말이 참 가슴에 와 닿긴 하는데, 실제 삶에서 그런 분노 없는 분노의 목소리를 들어 보기가 힘들었어요. 그런 목소리를 참 만나기가 힘들었어요. 아, 머리로는 그 말이 이해가 되긴 하는데, 도대체 그 분노 없는 분노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 「앗살라 알라이쿰」에서 아이들이 합창하는 노래 소리를 듣고 알겠더군요. 아, 저게 바로 분노 없는 분노의 소리구나 하구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뭔가 남을 향하는 그런 화살 같은 날카로움이 안 느껴지는데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전쟁을 말리는 호소력은 참 뭐라 얘기해야 할까요. 하여튼 말의 그물에 가두어 두기 힘든 그런 울림이 있더군요. 하여튼 그랬습니다.

예, 아이들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기서 또 동화의 본질 같은 것 한 가지를 느끼게 되더군요. 아이들에게 동화를 쓰는 사람들은 이 분노 없는 분노의 목소리로 험한 세상을 뒤집어 엎는, 전복의 캐릭터를 좀 만들어 보여 줄 수는 없는지요. 저도 물론 그렇지만요, 요즘 동화를 쓰는 사람들이 공부를 참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나오는 동화들이 재미있는 작품도 많은데요, 한 가지 뭔가 요즘 현실을 뒤엎는 그런 전복의 캐릭터를 만나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 캐릭터를 좀 창조해 내면, 창조한다기보다는 우리 삶에서 발견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나오겠지요. 요즘 어린이 문학 판도 만만치 않게 발전해 가고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 바끼통에서 회원들에게 보내 준 편지를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는 거지요. 내년에 다시 재파병을 하는데, 지금 사회적으로 어떤 논쟁도 없이 그냥 슬그머니 통과시키려 한다구요.

바끼통에서 보낸 편지에서 “재파병이 결정되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재파병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조차도 그저 무감각, 혹은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며 그 슬픔조차 잃어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였는데요. 예, 정말 그렇습니다. 슬픔을 느끼는 힘이 우리에게는 언제부턴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심이의 엄마 생각』은 백기완 선생이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구수한 우리 말의 맛을 살려, 풍부한 이야기성의 맛을 살려 때론 낮은 목소리로, 때론 우렁찬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데요. 이 이야기에는 뭔가 가슴으로 읽게 만드는 하나의 큰 길이 나 있어요. 그게 뭔가 봤더니, 이 작품에는 슬픔을 느끼는 힘을 가진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요. 부심이와 엄마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만 해도 그렇지요.

올해에 나온 동화 작품 가운데서 사람들이 『받은 편지함』과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 같은 작품을 즐겨 읽는다고 하더라구요. 나도 이 작품을 읽어 보았는데, 그래요, 이 작품 안에는 슬픔을 느끼는 힘을 가진 캐릭터들이 살아 있어요. 동화의 본질, 어찌 동화만일까요. 사람은 다 관계의 그물망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요. 그러니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밥풀과 같은 힘은 역시 동정의 상상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동정의 상상력이 바로 슬픔을 느끼는 힘이겠지요.

바끼통에서 또 전국을 다니면서 평화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요, 예, 그런 게 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동정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현대판 굿이다 생각하면, 참 신명나고 즐거울 것 같아요. 그러니 그런 일도 다 즐거움으로, 신명나게 하면 그래도 좀 덜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표지
왜 앞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이야기를 했잖아요. 어떨 땐 정말 우리가 사는 이 하루 하루의 삶은 꿈인지 생시인지 참 구별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이란 책도 읽다 보니까 요즘 현대인의 불행은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삶의 전부가 되어 버린 데 있다는 거지요. 사람은 자연과 영혼의 형제로 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동을 하는 건데, 어떻게 된 게 주객이 전도되어서 노동이 목적이 되어 버린 거지요. 노동이 내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야 하는데, 그만 생산성에 가로막혀 점점 삶의 즐거움을 빼앗는 구실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노동을 위해 사는 기계 같은 인간이 되고 말았어요. 노동이 삶의 즐거움이 아니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병을 일으키는 짐이 된 것이지요.

이래서 지금 우리에게는 판타지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판타지는 인간의 내면 현실(마음 속)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지요. 소년소설과 판타지는 똑같은 리얼리즘 문학인데, 소년소설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제도에 대한 탐구라면, 판타지는 밖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인간의 무의식이 작동하는 내면 현실(마음 속)에 대한 탐구라 해야겠지요.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은 제도에 영향을 받는 것이고, 제도는 또 인간의 마음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니, 어찌 다르겠어요. 결국에는 소년소설이나 판타지는 같은 현실 문제를 탐구하는 장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부심이의 엄마 생각』을 읽으면서는 나는 이게 소년소설도 되면서 판타지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몽실언니』를 읽을 때도 그랬어요. 『부심이의 엄마 생각』에서 한 구절 옮겨 볼까요.

“부심아, 저 바깥을 한 술(한 번) 내다봐 봐. 눈이 한없이 내리고 있지? 바람은 쌩쌩 불고, 온 들과 언덕이 몽땅 하얗게 덮여 있지? 그 때문에 나는 새도 없고, 짐승이란 짐승들도 모두 움츠리고, 마실 가는 사람들도 하나 없이 꽁꽁 얼어붙고 있잖아. 그런데 저 눈보라와 저 달달 떨리는 추위를 갈라 치러 가는 애가 하나 있어. 그런 애가 입는 옷이 바로 부심이야.

그 옷은 어떻게 된 것인 줄 알아? 하얀 옷? 아니야. 그러면 까아만 옷? 아니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었느냐. 파아란 풀빛 바지에 빠알간 대님, 그리고 빠알간 저고리에 풀빛 고름을 질끈 맨 옷이야. 그것을 입고 저 눈보라 속을 가노라면 어떻게 되겠어? 죽었던 뜰이 새파아랗게 살아 빠알갛게 피어오르는 것 같질 않겠어? 그러니 어떻게 되겠느냐 이 말이야.”

예, 정말 그렇지요. 파아란 풀빛 바지에 빠알간 대님, 빠알간 저고리에 풀빛 고름을 질끔 맨 아이가 걸어가는데, 그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죽었던 뜰이 새파아랗게 살아 빠알갛게 피어오르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이거야말로 현실 세계이면서 또 판타지 세계(간절한 바람의 세계)인 것이지요. 현실과 간절한 바람의 세계가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되는 거지요.

생산성을 앞세우면서 사람은 노동의 노예가 되고, 점점 자신의 내면으로부터도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신화를 좋아하고, 판타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판타지의 세계, 신화의 세계에는 인간이 자연과 영혼의 형제로 살아가려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어요.

우리 어린이 문학 작품에서 몽실이와 같은 캐릭터, 강아지똥과 같은 캐릭터, 위 『부심이의 엄마 생각』에서 부심이나 엄마와 같은 캐릭터, 『어린이와 평화』에 등장하는 평화운동을 하는 그 온화하고 평화로운 얼굴을 가진 사람들, 또 「앗살라 알라이쿰」에서 분노 없는 분노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이들은 다 자연과 영혼의 형제로 살아가려는 간절한 바람을 가진 캐릭터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가 상상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이겠지요.

그러니 이들에게 꿈이 어디 따로 있고, 생시가 어디 따로 있겠어요. 외부 현실이 어디 따로 있고, 내면 현실(마음 속)이 어디 따로 있겠어요. 소년소설이 어디 따로 있고, 판타지가 어디 따로 있겠어요.

새해에는 우리 어린이 문학 동네에도 이렇게 자기가 상상한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감동을 주는 캐릭터들이, 많이 창조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삶에 기꺼이 즐겁게 직면하여 고백하는 언어를 쓸 때 그 삶 속에서 발견될 수 있겠지요. 그래요. 정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판타지 세계로 통하는 아주 훌륭한 통로란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군요. 그래서 또 이 세상은 한번 즐겁게 살아 볼 만한 세상이란 생각도 들구요.

지금 쓴 이 편지는 그냥 『열린어린이』에도 보내야겠습니다. 『열린어린이』로부터 어린이 문학 작품을 깊이 읽는 이야기를 쓰면 좋겠단 말씀을 들었는데요. 새해도 되고, 이야기의 첫 시작이니 또 몇 달 뒤에 내 차례가 돌아오면 그 때는 요즘 나오는 어린이 문학 작품을 놓고 깊이 있게 읽은 이야기도 좀 해 보도록 하지요.

예. 그럼 다들 새해에도 건강하시구요.
글쓴이
이재복 / 1957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나 서울교육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어린이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한국 어린이 문학사 정리와 판타지 동화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10년 남짓 어린이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발행하던 월간 『어린이 문학』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달마다 「이야기 밥」이라는 소식지를 내고 있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북한동화선집』 『뚱보 방정환 선생님 이야기』 『우리 동화 바로 읽기』 『우리 동화 이야기』 『우리 동요 동시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
어린이와 평화 / 박기범 지음 / 창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신춘문예가 늙어 간다?!

새해 벽두에 일제히 발표된 올해 신춘문예 결과에서는 한 가지 특이 징후가 만져진다. 당선자들의 연령이 높아진 것이다. 20대 당선자가 없진 않지만 30, 4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40대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신춘문예를 시행하고 있는 서울의 종합일간지 7곳의 시·소설 당선자 14명 가운데 무려 6명이 40대였다. 한 신문의 소설 부문 당선자는 심지어 회갑의 ‘할머니’이다!

이들이 젊고 힘 있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일약 당선의 영예를 안은 사실 자체는 경하할 만하다. 육체적으로 취약하고 정신적으로도 피로하며, 아마도 밥벌이와 일상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운데 이뤄냈을 성취이기에 기쁨과 보람도 한층 클 것이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지형도 속에서, 거리를 두고 사태를 관찰하자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연령이 높아지는 현상이 곧 한국 문학 자체의 노쇠화를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추정일 수도 있지만, 40대 당선자들이 거둔 쾌거는 젊은 유망주들의 ‘공백’을 틈탄 결과일지도 모른다. 명민하고 발랄한 젊은이들이 문학을 멀리하고 영상과 오락 쪽으로 내달려 간 빈 자리를 40대 이상의 ‘중늙은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과 문학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사뭇 우울한 가정이겠으나 동시에 아예 터무니없는 상상만도 아닐 것이다.

문학을 새로 시작하기에 마흔이란 나이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박완서씨가 장편소설 <나목>으로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당선했을 때 그 이의 나이가 마흔이었다. 복거일씨가 문제적 장편 <비명을 찾아서>를 단행본으로 출간하며 곧바로 등단했을 때는 마흔둘, 김훈씨가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문학동네> 창간호에 연재하며 작가로 새출발한 것은 마흔일곱이 되어서였다. 이들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섰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테다.

그렇지만 박완서씨나 복거일·김훈씨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라 해야 옳을 게다. 어쩌다 한번씩 그런 늙다리 신인들이 등장할 수는 있겠지만, 올해 신춘문예는 그와는 경우가 다르다. ‘늙은 신인’들의 지배화라는 현상의 배면에는 분명 문학 안팎에 걸친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문학에 대해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 또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춘문예의 본디 취지가 문단의 ‘새 피’ 수혈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학 역시 일종의 생명체와도 같아서 적어도 그 세포 차원에서는 신생과 성장과 노화와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문학이 건강을 유지하며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의 수혈, 새로운 세포의 생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신춘문예는 바로 그런 기능을 위해 마련된 제도라 할 수 있다.

늙다리 신인들 역시 새 피요 새로운 세포임은 물론이다. 생물학적인 나이에 상관 없이 젊고 발랄한 상상력과 문제의식, 문체로 무장한 신인들은 역시 문단의 새 피라 할 법하다. 그러나 작가 또한 피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인지라 생물학적 늙음과 체력의 약화가 어떤 식으로든 작용을 미치게 마련이다. 늦은 나이에 등장한 신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육체적·정신적 긴장을 유지하며 제 몫을 해 낼지 두고 볼 일이다. 더구나 모르긴 몰라도 이들은 대부분 문학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기 십상이다(전업주부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반드시 ‘전업’이 문학적 최선이라 하기는 어려울 게다. 그러나 문학을 필생의 업이 아닌, 일종의 여기 내지는 부업으로 삼는 신인들이란 문학 쪽에서 보자면 그닥 반가운 존재는 아닐지도 모른다. 신춘문예라는 사회적 축제에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지 못하고, 우울하고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야 하는 현실이 얄궂다.


(한겨레신문)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늘바람 2006-01-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참 20대 생각지도 않던 신춘문에를 지금서야 떠올리는 나도 참^^

2006-01-0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6-01-0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 주신 님 감사해요. 열심히 써야죠 늘 열심히 안하면서 그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