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아내
테이아 오브레트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 일기』를 읽고 있다. 2002년 8월에 그는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의 『킴』을 읽었는데 반가운 이름인 마이클 온다치가, 내가 사랑하는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쓰려고 키플링의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자신에게 물은 적이 있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테이아 오브레트의 『호랑이의 아내』를 읽는 내내 키플링의 『정글북』이 반복되길래 문득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알마시가 키플링의 책을 읽어주는 해나에게 “키플링의 책은 천천히 읽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마이클 온다치가 알베르토 망구엘에게 묻고 해나가 알마시에게 읽어주던 그 책이 키플링의 『정글북』이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호랑이의 아내』를 읽은 감상을 끄적일 때 다른 무엇보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두 책을 뒤적이다가 키플링은 맞지만 『정글북』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착각이었다. 그 책은 키플링의 『킴』이었다. 알마시는 해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키플링은 천천히 읽어야 해요. 쉼표가 찍힌 곳을 유심히 살펴야 자연스럽게 숨을 돌리며 끊어 읽는 곳을 찾을 수 있어요. 그는 펜과 잉크를 사용했던 작가이거든요. 한 페이지를 쓰다가도 여러 번 고개를 들어야 했죠. 창밖을 내다보면서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거예요. 혼자 있을 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어떤 작가들은 새들의 이름을 모르지만 키플링은 알고 있었어요. 키플링이 펜을 놀렸던 속도를 생각해요.”  
   

알마시의 ‘키플링을 읽는 법’이 늑대 소년 모글리의 모험담 『정글북』에도 어울릴까? 그러나 키플링은 『정글북』을 쓸 때도 종이에서 수없이 고개를 들어가면서 펜과 잉크를 사용했다. 『호랑이의 아내』에는 삽화가 곁들어진 작은 판본의 『정글북』을 평생 호주머니에 넣어 다닌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의 손을 꼭 잡고 동물원에 호랑이를 보러 가서, 수없이 어루만지고 펼쳐 본 탓에 다 낡고 해진 그 책을 읽고 또 읽어주었다.

『호랑이의 아내』는 다 자란 손녀 나탈리아 스테파노비치가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가족을 두고서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낯선 산간벽지에서 홀로 죽어간 할아버지의 의문스러운 궤적을 더듬으며 그의 신비로운 일생을 추억한다. 전설로 가득한 할아버지의 생애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 열쇠는 『정글북』과 호랑이와 ‘호랑이의 아내’로 불린 소녀와 죽지 않는 남자이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나탈리아와만 공유한 “너와 나, 오직 우리 둘만의 것”으로 ‘마음속에 간직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전쟁.

먼저 전쟁부터 이야기해야겠다. 작가 테이아 오브레트는 유고슬라비아계 미국인이다.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찾아보면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옛 나라’라는 정보만 얻을 수 있다. 1991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갈가리 찢겨 현재 일곱 나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 인종, 민족, 종교는 달라도 좋은 이웃으로 더불어 하나였던 나라가 난무하는 국경선들로 금이 간 것이다. 무시로 지나다니던 도로가 하루아침에 총을 든 군인에게 막혀 있고, 갑작스레 지어진 국경선 저편에 고향이 있다는 이유로 간첩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잠깐 떠나왔지만 영영 다른 나라가 되어 이제 돌아가지 못하는 집은 암묵적으로 약탈이 허용된다. 그러니까 다른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팔도가 내전에 휩싸여 여덟 개의 국경선과 나라로 반목하는 셈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역사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의, 자신들이 현재 처한 상황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아 참담하기 그지없었을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호랑이의 아내』에는 유고슬라비아나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가리키는 어떤 시간도 공간도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는 ‘도시’이고 시골은 ‘시골’일 뿐 지명이 쓰였다면 그것은 허구의 이름을 가진 미지의 장소이다. 다만 작가의 출생 내력과 함께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배어 있는 정서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테이아 오브레트는 전쟁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서 자기 소설이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고 정치적인 시선에 함몰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이쯤에서 호랑이를 이야기해야겠다. 호랑이는 할아버지가 평생 사로잡혀 있던 대상이다. 어린 시절에 글자를 배우며 읽었던 『정글북』의 시어 칸에게 매료되고 우연찮게 산간벽촌 갈리나로 찾아든 호랑이에게 압도된 이후로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정글북』의 시어 칸과 호랑이 이야기를 무수히 들려주고, 손녀를 데리고 동물원으로 호랑이를 보러 가고, 손녀가 자라서 더 이상 동물원에 관심이 없어진 후에도,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도 일종의 의식처럼 혼자 호랑이를 보러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 중에서 손녀 나탈리아의 기억에 유독 각인된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전설처럼 들었던 호랑이와 ‘호랑이의 아내’라 불린 소녀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인간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야성을 잃고 도시의 동물원 우리를 ‘구속’이 아닌 ‘안락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자 인간은 나 몰라라 동물들을 우리에 가둬둔 채 동물원을 미련 없이 버렸다. 호랑이는 굶어 죽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하여 본능의 나침반에 따라 울창한 숲으로 향하면서 야성을 되찾아간다. 갈리나에서 멈춘 호랑이는 그곳에서 귀머거리인 벙어리 소녀와 깊은 교감을 나눈다.

귀 먹고 입 닫은 그 소녀는 영리하고 성숙하고 매혹적이고 자유분방한 언니 대신 형부가 될 뻔했던 갈리나 남자 루카에게 거의 팔리는 셈이나 다를 바 없이 시집을 온다. 사로보르의 부유한 터키 상인인 아버지는 처치 곤란한 짐짝을 떠맡겨 홀가분하다는 심정으로 속임수를 써서 루카에게 소녀를 버리고, 루카는 그 언니에게는 구슬라를 연주하며 연가(戀歌)를 바치는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일지라도 소녀에게는 난폭하고 무자비한 폭군으로 돌변한다. 소녀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아마나 에펜디’라는 분명한 이름을 가진 언니와 달리 소녀의 이름도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소녀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일조차 귀찮아 생략해 버렸으니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

똑같이 인간에게 버림받고 상처 입은 호랑이와 소녀는 어쩌면 서로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둘 다 갈리나에서는 이방인이다. 호랑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호랑이’인 줄 모르고 ‘악마’라고 두려움에 떨었던 갈리나 사람들은 호랑이는 물론 자신들과 다른 종교를 가진 터키 소녀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루카가 사라진 집에서 배가 불러오는 소녀에게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호랑이의 아내’라는 전설 속에 소녀를 가두고 금기한다. 나중에 소녀가 생애 처음으로 만들어낸 소리가 호랑이 소리(“윗입술이 들리고 이가 번쩍거리더니 코에 주름을 잡고는 씩씩거리는 소리를 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는 『정글 북』의 모글리가 선연하게 겹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죽지 않는 남자와는 어떤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까? 죽지 않는 남자 가브란 가일레이(가보)도 호랑이나 소녀처럼 모든 인간들에게 반갑지 않은 이방인이다. 가보는 『호랑이의 아내』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는 특별한 커피 잔으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내다본다. 며칠, 혹은 몇 시간 후에 죽을 운명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생과 이별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선의를 베풀지만, 그것이 과연 필사의 숙명을 지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알지 못해 두려워하는 보통의 인간에게도 선의로 받아들여질까? 이 소설에도 가보에게 죽음의 커피 잔을 건네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 가보를 죽임으로써 그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가보는 죽지 않는 남자이다. 그를 살해하면서까지 발버둥 쳐도 죽을 운명이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보는 무수히 죽임을 당했다가도 되살아나서 사람들에게 커피 잔을 건넨다. 딱 한 번, 한 여인의 죽음을 보았지만 그 여인을 한눈에 사랑하게 되어 그녀에게 건넨 커피 잔을 깨뜨려버렸다. 그녀가 바로 루카와 결혼을 앞둔 아마나 에펜디였다.

그러니까 『호랑이의 아내』에서 지명 하나, 사건 하나, 인연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인생이다. 갈리나의 유일한 정체불명 약제사가 선물한 『정글북』을 읽고 호랑이를 한눈에 알아본 아홉 살 소년은 푸주한 집안에 아무것도 모른 채 팔려 온 열여섯 소녀와 호랑이 사이에 따뜻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그리고 소년도 그 깊은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길 갈망한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소녀를 위해 난롯가 재 위에 서투른 그림을 그려가면서 『정글 북』을 들려주지만, “인간의 아이가 호랑이의 생명을 어떻게 끝장내는지”는 차마 들려주지 못한다. 소녀를 위한 소년의 이야기에서 호랑이는 언제나 살아남는다.

왜 호랑이여야 했을까? 테이아 오브레트가 『정글북』의 시어 칸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고슬라비아에서 호랑이가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인간과의 어떤 교감도 불허하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상징적인 동물로 호랑이를 선택했기 때문인지, 그저 우연찮게 호랑이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소녀에게 선물받은 강렬한 주황빛 호랑이 털 한 줌을 평생 간직했다가 『정글북』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에 싸서 손녀 나탈리아에게 남겨준다. 시어 칸이 형형하게 그려진 페이지를. 그 페이지가 찢겨 나간 『정글북』은 아마도 죽지 않는 남자와 내기한 대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가보의 커피를 마시면서 그에게 건넸을 것이다.

『호랑이의 아내』에는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손녀가 자라는 내내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반목과 분쟁과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음을 암시한다. 그런데도 참담한 현실을 뒤로한 채 환상적이고 처연하고 아름다운 전설 속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데, 그것은 날것 그대로인 역사의 비극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날카롭게 베인 상처를 위무해 주고 싶었던 작가의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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