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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 - 보통의 독자 버지니아 울프의 또 다른 이야기 ㅣ 보통의 독자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인용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7월
평점 :
버지니아 울프는 「책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충고는 “자신의 본능을 따를 것,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것, 자신의 결론에 이를 것”뿐이라고 말한다. 독서에 대해 이토록 간명하면서도 모든 핵심을 꿰뚫는 정의라니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세 가지뿐인 것이 얼마나 이상적인 독서를 의미하는지도 잘 안다.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보통 이상의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일단 ‘본능을 따를 것’. 이것은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책을 읽으려 하는지, 책에 대한 자기 취향이 어떤지 아직 모르는 사람이나 남의 추천이 아니라면 무수한 책들 중에 어떤 책도 선뜻 고르기가 두려운 사람처럼 아직 책의 문을 열지 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첫 단계이다. 경제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내 마음이 이끌리는 취향대로 한껏 사들여 빼곡히 채워놓은 책장에서 그때그때의 기분과 변덕에 따라 책을 펼치는 일은 얼마나 황홀한가. 물론 책의 문 안에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여기저기에서 얻어듣게 되는 작가의 권위나 작품의 평가 같은 외부적인 영향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순전히 나의 내재적인 본능에만 따른 선택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책을 선택하면 ‘이성을 사용할 것’. 여기서부터 나는 난관에 부딪힌다. 처음 책장을 펼칠 때부터 내 선택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고무되어 있으니 콩깍지가 씐 시선에 이성이라는 잣대가 끼어들 여지는 좀처럼 없다. 다만 서슬 퍼런 이성을 마구잡이로 들이댈 때가 있으니 그 같은 호의를 끝내 지속시키지 못하고 냉담하게 팔짱을 끼게 될 경우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민망해지는데, 이때부터는 급격하게 실망감에 휩싸여 눈에 불을 켜고 트집거리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버지니아 울프는 또다시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결론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결론이다. 누구나 책을 읽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결론인지 나의 결론인지 모호할 때가 많고,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읽어낸 만큼의 결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결론에도 독자의 수준에 따라 ‘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상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보통의 독자, 또 다른 이야기』는 그녀가 충고한 독서의 세 단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다는 것은 절반쯤 겨우 읽어 나간 『세월』의 책장에 책갈피를 끼워둔 채 덮어놓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다시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이상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을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펼쳐 든 것은 나의 서가 분류법에 따르면 ‘책에 관한 책’으로 분류되고, 그런 책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독서에 대한 나의 지독한 관음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제대로 읽어내지는 못했어도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별처럼 반짝이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삼사백 년 전의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고 이 책을 시작한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그녀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주로 그들의 산문에 집중했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산문에는 아름다움과 불완전함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아직까지 산문이 사람들의 일상을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령 글 속에서는 하녀도 귀부인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문 부고조차 “죽음에 대한 명상과 영혼의 불멸성”을 숙고했던 그 시대의 문학 가운데 최대한 화려한 격식과 점잖은 체면을 거두고 진솔한 마음으로 남긴 내밀한 산문들을 찾아내어 행간에 숨어 있는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의 속마음과 일상과 응접실과 사랑과 교육과 음식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엘리자베스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한 그 시대가 배경인 글을 읽어도 그 시대의 시선을 가질 수는 없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단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살아보지 못한 특정 시대를 상상하는 일은 달콤한 기쁨인 것이다.
물론 그나마 이름 정도는 익힌 존 던이나 대니얼 디포, 로렌스 스턴, 토머스 하디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낯선 작가인 데다가 버지니아 울프가 언급하는 작품들도 읽어보지 않아 그녀의 문장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섬세한 시선으로 써내려간 지적인 문장들이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한 것만은 아니라 친절하고 흥미로운 부분들도 가득하다. 도중에 맥락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완독한다면 보람까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다른 작품을 펼칠 용기를 얻는다. 무엇보다 그녀처럼 읽고 싶다는 강렬한 부러움에 휩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