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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홀로 달리는 ‘개인의 달리기’가 아니라 함께 달리는 ‘우리의 달리기’로 심장을 뜨겁게 두드리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읽고서 단박에 미우라 시온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녀의 책들 중 내 흥미를 돋우는 『로맨스 소설의 7일』과 『월어』를 급히 사들였고, 이제 『고구레빌라 연애소동』과 인연이 닿아 무서운(?) 속도로 책장을 넘겼다. 이전에 읽은 책이 1부를 제외하고 대체로 재미있었지만 제법 두껍거니와 그 내용도 만만하지는 않았던 터라, ‘역시 이런 300쪽 내외의 일본 소설은 끝내주게 잘 읽힌다니까!’ 하고 가벼운 호흡으로 머릿속을 비워내자는 심산이었다.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은 70대 주인 할아버지 고구레 씨의 낡은 목조 빌라를 중심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연애와 섹스를 담백하게 유머와 위트로 버무린다. 원제는 ‘고구레 빌라 이야기(物語, ものがたり)’로 소박하지만 번역본의 제목은 ‘연애 소동’으로 경쾌하고 ‘섹스’로 도발적인 유혹까지 한다. 사실 독자의 은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과장만은 아니다. 일곱 편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주제어이기 때문이다.
‘고구레 빌라 이야기’에 주연 혹은 조연으로 출연하여 긴장시키기도 하고 이완시키기도 하면서 각각의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신상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고구레 빌라에 사는 101호 고구레 할아버지, 102호 여대생 미쓰코, 201호 외식업계 남성 직장인 간자키, 203호 꽃집 아가씨 마유, 그리고 한동네에 살면서 고구레 빌라의 지저분한 개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애견 미용사 미네, 마유가 일하는 꽃집 겸 카페의 주인 부부, 마유의 전 애인인 사진작가 니미키와 수수께끼 같은 여인 니지코(음식 맛으로 거짓말과 불륜을 알아내는 이 여인을 평범의 범주에 넣기는 약간 무리가 따르지만)로 이보다 더 평범할 수 없다. 이토록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과 연애와 섹스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울까 싶지만, ‘알고 보면 다른 사람’의 속성을 떠올려야 한다.
고구레 할아버지는, 죽음과 인사하면서도 “우리 마누라가 나하고 섹스하기 싫대.”라고 투덜거리는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온 후 어떡하면 “이름만 들어보고 먹어보지 못한 요리” 같은 ‘섹스’를 할 수 있을까에 골몰한다(※「심신」). 마유는 삼 년 동안 바람결에도 소식 한 자락 전하지 않은 채 증발했다가 갑자기 돌아온 과거의 남자 니미키와 현재의 남자 아키오를 양옆에 끼고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Simply Heaven」). 회사에 있을 때는 멀쩡한 직장인인 간자키는 고구레 빌라로 돌아오기만 하면 102호 여대생의 복잡한 섹스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다(※「구멍」). 사춘기에 불임 판정을 받은 이후 밥 먹듯이 섹스를 해온 미쓰코는 오히려 간자키의 관음증을 반긴다(※「Piece」).
죄의식으로 이어지는 첫 섹스의 트라우마에 갇힌 미네는 출퇴근길 전철역의 나무 기둥에서 남근 모양으로 자라나는 정체불명의 하늘색 돌기에 집착한다(※「기둥에 난 돌기」). 아내는 흙탕물 맛으로 변한 남편의 커피를 의심하고 남편은 밤마다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려 외출한다(※「검은 음료수」). 니지코는 단지 정기적으로 장미꽃을 사러 들르는 꽃집 점원 마유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여전히 마유 주위를 서성이는 니미키를 자기 집으로 들이고, 니미키는 방세마저 거절하는 니지코가 방세 대신 섹스를 원하는 게 아닐까 고민한다(※「거짓말의 맛」).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지루하고 식상한 나날의 연속일 것 같지만 웬걸, 한 꺼풀 벗겨보니 괴상하기 짝이 없다. 그런 그들의 행동이 속속들이 소문나면 분명 동네 사람들의 언짢은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하다. 그러나 미우라 시온은 이쯤에서 또다시, 색안경을 끼고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도 과하다 탓할 수만은 없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속사정을 풀어놓는다. 드디어 평범한 신상과 괴상한 탐닉 아래 감춰져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부모도, 아내도, 남편도, 연인도 이해하려들지조차 않은 그들의 투명한 속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미우라 시온이 이끄는 대로 그들이 그럴 만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그들의 외로운 사정이 ‘섹스’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담백하게 진행되는 것은 다소 헛헛하게 느껴진다. 그 덕분에 불편한 마음 없이 재미있게, 유쾌하게, 산뜻하게 책장을 넘기긴 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섹스가 이처럼 가벼운 중량으로 이야기돼도 좋은지 찜찜했다. 미우라 시온의 표현대로 섹스는 ‘점막과 점막의 접촉’으로 서로의 체액을 나누는 일이다. 침이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은 사랑하는 연인과 키스를 할 때가 유일하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붙이와도 공유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나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입 밖으로 나온 침도, 내 몸 밖으로 나온 분비물도 불결하기 짝이 없는데 ‘사랑’이 빠지면 상대의 점막도, 체액도 불쾌하기 그지없는 것은 자명하다. 내 입 밖으로 나온 침을, 내 몸 밖으로 나온 분비물을 더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유일하다. 그래서 섹스는 사랑의 행위이고, 그 행위의 무게와 책임은 끝없이 무거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