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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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제'라는 이름을 기억해 둔 것은 어디선가(아마도 출판 잡지 『기획회의』였을 것이다) 읽었던 그의 또 다른 책 『그림 정독』에 대한 출판 뒷이야기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가 얼마나 세밀하게, 섬세하게, 꼼꼼하게 그림을 읽어내는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가가 화폭에 담은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디테일일지라도 무심히 간과하지 않고 그것이 그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되찾아준다고 말이다. ‘정독’이라는 제목이 결코 부끄럽지 않다는 편집자의 진심 어린 자부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림 정독』이 도대체 어떤 책인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여섯 점의 명화를 이야기하는 데 무려 496쪽에 이르는 분량을 할애했다. 명화들에 대한 감각적인 감성 에세이나, 시대와 사조별로 되도록 많은 명화들을 보여주기 위해 얕게 훑어보는 예술서들이 흔했던 만큼 『그림 정독』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염두에만 두었을 뿐 아직 그 책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오후 네 시의 루브르』에서 ‘박제’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반갑고 기뻤다. 그의 진가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리라. 먼저 그의 이력부터 살펴봤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독자의 기부터 꺾지 않는, 달랑 세 줄에 불과한 그의 소박한 이력이 마음에 든다. 프랑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파리에 살면서 딸아이를 데리고, “오후 네 시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길을 산책한 칸트”처럼 루브르 박물관에 들른다는 사실을 서문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부당한 경로로 예술품을 입수한 과거의 오점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모두 44만여 점에 이르는 예술품을 소장하고 지금도 새로운 컬렉션을 수집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발굴․보수․복원에 힘쓰고 있으니 루브르 박물관은 가히 세계 최고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짧은 일정의 프랑스 여행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의 먼지조차 다 돌아볼 수 없다고 했던가. 박제는 분명 루브르 박물관을 무수히 들락거렸을 테지만 루브르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방대한 그림들을 욕심껏 일별하고 말기보다, 이 책에는 그의 영혼을 울리고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감동의 눈물을 쏟게 한 명화들을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누드화를 포함하여 에로티시즘이 강렬하게 배어 있는 그림, 성화(聖畵)로 분류하여 소개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 생경한 화가의 낯선 그림까지 44만여 점 가운데 그가 직접 보고 읽고 느낀 그림들 중에서도 단지 67점만을 고르고 또 골랐으니 『오후 네 시의 루브르』를 펼치는 일은 큐레이터 박제가 친절하고 성실하게 작품을 설명해 주는 작은 루브르에 들르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박제의 꼼꼼한 성실성은 과히 놀랍다. 그는 역시 이 책에서도 그림에 그려져 있다면 여린 풀포기 하나, 작은 돌멩이 하나, 모자를 장식하는 깃털, 그리고 그것들의 색채와 그림자, 붓질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설명해 주는데, 실망스럽게도 조악한 품질로 인쇄된 이 책으로는 그의 디테일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모두 원화로 직접 마주했으리라는 것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박제 특유의 성실한 정독과 사유와 통찰로 가슴 벅차게 느꼈을 감동을 온전히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면서 심히 절망스러워진다. 심지어 극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허나 내가 루브르 박물관 바로 앞에 산다 한들 그림을 정독하는 그의 섬세한 눈과 깊이 사유하는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그를 만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이제 『그림 정독』을 당장 만날 때이다. 그에게 그림 읽는 법을, 그리하여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보련다. 그것이 어설픈 흉내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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