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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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책은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사게 된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남아 있는데 지금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를 뒤적이니 도무지 어느 책장 사이에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또 내 편집된 기억의 착각일까. 아무튼 이 책을 찬찬히 다시 읽어가며 그 구절을 기필코 찾아내리라는 결심을 해두고, 최성일의 『한 권의 책』을 읽은 감상을 남기는 일로 돌아온다. 그러나 최성일이라면 이런 나의 무책임한 태도를 마뜩지 않아 했을 것이다. 그는 사소한 인용 하나도 허투루 간과하지 않고 그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는 일에 철저했다. 그러니 자신이 평하는 책의 부정확한 출처에도 눈감을 수 없었으리라. 그는 잘못된 출처를 정확하게 바로잡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이 읽은 책에도 엄격하고 성실한 전문 서평가였다.

『한 권의 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앤 패디먼(?)이나 “책을 다룬 책을 워낙 좋아한” 최성일처럼 책에 관한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마추어 독자의 욕심 덕분이다. 세상의 무수한 책들 중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진흙 속 진주’ 같은 책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다른 사람은 무슨 책을 읽는지, 혹은 같은 책을 읽고서 어떤 느낌을 받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보고 싶은 호기심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국 공통의 뻔한 이유일 뿐이다. ‘최성일’이라는 이름이 『한 권의 책』을 펼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전에 그의 책 하나 변변히 읽지 못한 채 이름자 정도만 귓결에 얻어듣고서 이제야 남편을 대신한 아내의 감동적인 머리말에 이끌린 나의 얄팍한 동기(아내는 『한 권의 책』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문장부호 하나하나에서 남편의 소중한 숨결을 찾았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는 그 하나하나를 얼마나 무수히 어루만졌을까)가 고인에게 부디 누가 되지 않길 바란다.

『한 권의 책』은 최성일이 생전에 여러 매체에 기고했으나 미처 책의 형태로 묶여 나오지 못한 ‘서평’들을 이 한 권의 책에 담은 모음집이다. 그는 두 쪽 남짓의 짧은 분량으로 어떤 책이든 그 책의 알맹이를 개관하고 자신의 분명한 호오(惡好)와 시비(是非)로 장점은 칭찬하고 단점은 지적하여 바로잡으면서 자기 견해까지 명확하게 드러낸다. 감정의 낭비도, 쓸데없는 사족도 끼어들 여지없이 그 책을 매개로 다른 책과 작가뿐만 아니라 출판 뒷이야기도 두루 언급하면서 이해와 판단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전문가의 ‘서평’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전문 서평가가 아니지만, 나도 책을 읽고 나면 개인적인 기록을 남긴다. 그저 책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책을 읽은 그때 불현듯 떠오른 나의 느낌과 생각을 좀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지극히 사적인 되새김질이다. 1999년 겨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난쟁이가 하는 말』부터였다. 다섯 줄 남짓으로 책에 대한 인상만 간략하게 남기던 버릇은 십여 년이 흐른 후 나 홀로 과잉된 감정과 나에게만 애틋한 추억과 무심결에 곁가지로 흐르는 사념으로 쓸데없이 말만 길어졌다. 어차피 공식적이 아니라 자족적인 기록에 불과하므로 전문가의 책임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은 너무 엄격하다고, 내 취향에 기반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내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왔다. 어차피 호오를 드러내고 시비를 ‘판단’하는 일에 ‘100퍼센트 객관성’을 담보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걷어내긴 하지만, 인터넷의 개인 공간에 그 기록을 흩뿌리기 시작한 후 단 한 명이라도 그것을 읽을 가능성이 있다면 책임의 정도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전문 서평가의 잣대를 아마추어 독자에게 똑같이 들이대는 것은 글의 목적에 따른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최성일의 서평을 읽다 보면 자기 판단을 뒷받침하는 폭넓은 근거들이 욕심나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자신감과 책임 의식이 부러워진다. 정혜윤의 책 이야기는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잡혀 있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마음을 울리지만 때론 그녀의 모호한 감정선을 따라잡기 힘들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에 비해 최성일의 책 이야기는 자기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채 책을 소개하는 데 가장 적절하고 명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쉬운 문장을 구사하며 어떤 판단을 내린다면 그의 박식한 지식과 식견이 엿보이는 근거를 제시하여 훨씬 설득력 있다. 책임을 전제한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힘인가. 지금까지도 구구절하긴 했지만, 이것은 최성일의 성실한 서평을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끝없이 이어질 사념은 그만 늘어놓고,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흥미롭게(?) 다가왔던 사실들만 몇 가지 더 기록하겠다.


『몬테크리스토 백작』(민음사) 완역본은 무려 다섯 권에 이르는데 알렉상드르 뒤마가 “그의 문하생들에게 작품의 일부를 나눠 쓰게 했다”(136쪽)고 한다. 『지적 생활의 발견』(위즈덤하우스, 『지적 생활의 방법』(세경멀티뱅크)의 개정판)은 ‘나만의 도서관’을 이야기해서 읽고 싶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와타나베 쇼이치가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인사”(240쪽)라는 것을 알고서 그럴 마음이 싹 달아났다. 코난 도일은 “강직한 식민주의자”였다(241쪽). 마리아 몬테소리는 교육학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롬브로소의 선천적 범죄이론을 지지했다”(325쪽). 그가 소개한 책들 중에서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책광석 번역, 페이퍼로드)은 몹시 읽고 싶어졌다. 그가 다른 책을 소개하면서 언뜻 이야기한 ‘웬델 베리’가 떠올라 지금 그의 『온 삶을 먹다』를 읽고 있다. 법에 대한 그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법질서나 법과 원칙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 닿는 자들이 제멋대로 살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짙다. 나는 실정법의 구체적 내용에도 관심 없으며, 내 억울함을 법에 호소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법에 당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172쪽).” 요사이 국회의 어이없는 날치기 통과를 생각하면 그의 생각은 결코 과하지 않다. 이런 일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 닿는 자’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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