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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목적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책이 내 앞에 들이닥친 현실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의지가 발가락 하나라도 꼼지락거리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뿐이다. 소박한 범인의 세속적인 일상생활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굳이 책을 들추지 않아도 그 정답을 자신은 알고 있다. 의지와 행동이 결여되어 있을 뿐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구구절절 옳은 소리로 젠체하는 자기 계발과 교훈과 훈계의 허명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평생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거룩한 대의나 사명을 위해서라면 약빠른 처세술이나 눈 가리고 자랑 식의 성공담 따위가 아니라 나에게 턱없이 부족한 인문학적 공부가 요구될 것이다.
사실 책과 위안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의구심을 품었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슬픔과 절망과 좌절은 어떤 책을 읽어야 위로받고 지독하게 휩싸여버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자신을 한없이 주저앉히는 감정을 극복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교과서 같은 해답을 이미 머릿속에 이성적으로 떠올려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것을 책으로 또다시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책에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책은 내가 처한 현실과 잠시 유리될 수 있도록 즐거운 도피처이기만 하면 되었다.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를 때 첫 기준은, 내 책은 가능한 한 내 현실과 동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책이 피난처만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를 위무해 주기도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위안을 받고자 그 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책을 읽는 동안, 또한 예기치 못하게 스산해진 마음이 책 속의 단어와 문장과 행간에 조응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서 주문처럼 ‘그래 봤자 불필요한 감정 낭비일 뿐이야’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속절없이 거친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책은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원인을 조목조목 따져들어 명쾌하게 갈무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차갑고 딱딱한 내 마음에 온기가 돌아 부드러워졌다.
책을 읽는 동안은 즐거워도 책 밖으로 돌아갈 시간을 언제나 예비하고 있어 책을 덮기만 하면 책을 펼치기 직전의 현실이 고스란히, 때로는 비루함이 더해진 채 내 앞에 다시 뚝 떨어졌다. 참으로 기묘한 경험 이후에도 책이 대신 내 현실을 해결해 주는 일은 없지만, 그 현실에 다시 맞서는 나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읽는 책마다 전부 그토록 고마운 경험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위로가 궁해져 일부러 위안이 되어줄 만한 책을 읽어도 좀처럼 찾아들지 않던, 그 조응의 마법은 독서에 아무런 사심이 없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선물처럼 일어났다. 책의 내용이 내 현실과 딱 들어맞지 않아도 문득 어떤 장면 하나, 풍경 하나, 문장 하나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이 있다. 우연히 찾아드는 그 순간, 책은 고단한 일상에 치인 영혼들을 안쓰러워하며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닐까.
니나 상코비치는 하루에 한 권, 365일이면 365권을 읽는 독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 일 년 동안 다른 무엇보다 책을 우선하여 몰두했다. 그것은 언니를 죽음으로 잃은 상실감과 언니보다 오래 산다는 죄책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삶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상실감을 메우고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을 골라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서 날마다 자신이 순수하게 읽고 싶은 책을 읽었을 뿐이다. 언니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그림자 한 자락 드리우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모든 책의 모든 문장마다 언니를 되살리고, 언니를 데려간 죽음과도 자신을 남겨놓은 삶과도 화해한다. 그리고 언니가 죽는 순간에 언니의 몫까지 살아내느라 멈춰버린 그녀 생의 시간이 다시 똑딱똑딱 시곗바늘을 돌리기 시작한다.
‘책에 관한 책’, 혹은 ‘독서 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고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기 시작했는데, 죽음의 저편으로 언니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이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짙게 배어 있어 당황했다. 그 통렬한 감정이 너무나 익숙해서 도리어 아팠기 때문이다. 10여 년, 내가 사는 동안 점 셋은 죽었다. 점을 하나씩 포기할 때마다 상실감에 한없이 비어가고 죄책감에 끝없이 꺼져들어도 시간이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나는 다시 살아가고 있었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방편으로는 습관적으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책을 펼치면서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만 한 게 없다. ‘즐거움’ 혹은 ‘도피’ 같은 독서의 혜택은 떠올릴 겨를도 없이 평소처럼 책을 펼치고 그저 글자만 기계적으로 읽었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해체된 글자들이 모여서 유의미한 단어로 조합되고 문장을 이루고 이야기를 만들어 고통, 상실감, 죄책감을 덜지 않고도 내 생의 시간은 흘러간다고 속삭였나 보다. 그렇게 ‘로애(怒哀)’뿐만 아니라 ‘희락(喜樂)’까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들에 골고루 휩싸여 염치없이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고 말이다. 나는 시간뿐만 아니라 책에도 빚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