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TV에서나 주위에서 우리에게 이런 말을 종종 하시곤 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이 몇 권은 나올 거야.” 이 말은 당신들의 삶이 굴곡도 많고 순탄치 않았음을 탄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삶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자신의 삶 역시도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의미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아니 에르노는 그런 작가이다. 온몸으로 픽션을 거부하며 자신의 삶 자체를 이야기하는 작가. 지극히 자전적이며 내면적인 소재에 몰두하여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픽션(허구)이다. 하지만 그것이 픽션이라고 해도 거짓으로 채워진 것만은 아니다. 어떤 픽션이건 작가 자신의 삶이나 사상은 그의 글에 투영되기 마련이며 이것과 허구의 절묘한 결합이 바로 소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는 허구를 최대한으로 줄여 자신의 이야기를 극대화한 자전적인 글쓰기를 한다. 특히 『남자의 자리』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삶을 담담한 투로 너무나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픽션스러운 것들을 선호한다.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 스타일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국내 작가들(특히 여성 작가들)의 자전적인 독백 형태의 글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라고 할까. 이런 의심은 책의 뒤에 실린 배수아의 “어쩌면 작가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영감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기원에 관해 ‘진짜 일인칭’의 글을 감히 쓰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라는 글을 읽고 더욱 확실해졌다. 나는 진지하기만한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어쨌거나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아버지를 기록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름답게 미화되거나 상처로 깊어진 기억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분처럼 아버지를 기록하기, 『남자의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의 최대한 감정이 배제된 기록일지라도 책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며, 우리들 삶의 아버지 역시 이야기 속의 아버지와 닮은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남자의 자리가 아닌 가족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리이다.


나이를 먹고 자신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시기가 되면 이 책은 더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자리가 아니라 나의 자리, 남편의 자리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테두리 속의 일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안의 내 삶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곧 나 자신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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