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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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기억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자기를 보호하고 자신에게 좀더 유리하도록 기억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욕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간의 축적에 따라 진행되는 망각도 기억이 불완전해지는 데 일정 역할을 담당한다. 설사 망각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지녔을지라도 기억은 필연코 ‘입장(立場)’이라는 개인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편집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손실 없이 재구성하여 완벽한 진실에 도달하기란 아무래도 어렵다. 그 일이 일어난 순간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놓는다고 해도 그 일에 이르기까지 전후 사정을 알 도리 없이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일에 여러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기억의 완벽한 재구성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끝없이 확장된다. 거창하게는 역사가의 기록일지라도 역시 역사관이라는 주관을 배제하기 힘들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 아니라면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억의 불완전성은 차라리 축복일지 모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살아온 무결점 인생이라면야 ‘신의 기억’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 기억의 한계가 억울하겠지만, 삶과 세상과 욕심이 어디 그처럼 살도록 우리를 호락호락하게 내버려두던가. 무뎌진 기억으로 더듬더듬 떠올려도 여전히 민망하기 짝이 없는 과거사들을 그때의 그 강도만큼 평생 생생하게 간직해야 한다면 그보다 더 곤혹스러운 일이 있을까? 잊고 싶은 일을 잊지 못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 웹스터는 기억의 불완전성에 기대어 예순 무렵까지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온 남자이다. 전 애인의 어머니가 남긴 얼마간의 돈과 자살한 친구의 일기장은 이제 그가 자기 기억의 오류에 대해, 자기 기억의 구멍에 대해 자각하도록 요구한다. 그 난데없는 유품은 망각의 어렴풋한 장막 너머에 밀쳐둔 자신과 전 애인 베로니카와 친구 에이드리언의 삼각관계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표면적인 사실만 건조하게 나열하면 이렇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사귀었다. 토니가 친구들(에이드리언 포함)에게 자기 애인이라고 베로니카를 소개했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헤어졌다.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사귀었다.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 이 네 문장이면 충분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문장과 문장, 심지어 단어와 단어 사이에도 토니와 베로니카가 사귄 일이 어떻게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기억들이, 혹은 토니가 되살리고 바로잡아야 할 기억들이 무수히 빠져 있다.

그 일련의 일들이 이후 토니의 삶에는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지만 베로니카의 삶에는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토니는 잊을 수 있었지만 베로니카는 잊을 수 없었다. 베로니카에게는, 그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존재와, 그 인과관계를 끊임없이 반추하게 하는 기록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기억의 구멍 속에는 토니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편지 한 통이 있다. 처음에는 제대로 기억해 내지도 못한. 별안간 날아든 에이드리언의 편지를 통해 친구인 그와 베로니카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된 토니가 답장을 보낸 것이다.

이 답장의 내용은 나중에 토니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난폭한 저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런데 자신과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전 애인과 친구가 사귄다는 것을 당사자들에게서 듣게 된, 게다가 두 사람의 야릇한 감정이 자신과의 연애 기간 중에 싹트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게(혹은 오해하게) 된 남자가 질투심과 배신감과 치기에 사로잡혀 홧김에 편지로 저주의 폭언을 퍼부은 것은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받을 만한 일이다. 천인공노의 죄로 일변하는 것은 이 편지가 토니는 까맣게 몰랐지만 이후에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일어난 일들의 모든 시작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전히 토니의 잘못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베로니카를 믿지 않은 에이드리언의 마음과, 이성을 잃은 친구의 폭주에 따라 행동한 그의 판단도 미심쩍다. 그런 편지를 받고서 마음 한 켠이 못내 찜찜하긴 했을 테지만. 에이드리언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말을 불러온 그 일에 대한 책임에서는 누구 한 사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다만 당사자인 에이드리언은 죽었고, 베로니카는 그 죽음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지옥 속에 살고 있으며, 이제 남은 사람은 토니뿐이다. 토니는 그 일에 대한 기억의 불완전성과 그 일 이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덕분에 그 일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도 이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성근 기억의 오류는 바로잡히고 구멍은 메워졌으며, 별일 없이 살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이 소설에 ‘신의 기억’은 없다. 이 소설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든, 그것이 먼 과거이든, 가까운 과거이든 서술자인 토니가 ‘선택, 편집, 조작, 왜곡, 망각’이 필연적인 ‘기억의 한계’를 지닌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이 맺은 관계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자명한 진실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완전무결한 진실의 정체는 한순간에 모호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을 읽은 기억을 토대로 남기는 내 감상문까지. 우리에게 최대한 허용될 수 있는 것은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불과’라는 말은 잘못됐다. 그것에 도달하는 것조차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걸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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