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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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에 대한 믿음을 아직도 고수하기에는, 그동안 사랑이 돌변하는 순간들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너무나 많이 목격했고, 또한 사랑의 자명한 변질을 별다른 이견이나 반발 없이 수긍해 왔다. 그러나 단 하나, 여전히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반칙이다. 나는 사랑의 온갖 형태 중에서 에로스만큼은 단둘의 독점적인 감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남녀의 관계가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로 구속되어 있든 아니든 일단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했으면 서로에 대한, 그리고 그 감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 사랑이 변했다면 그 사랑의 대상과 먼저 이별한 후 다른 사랑으로 옮겨 가야 한다. ‘양다리’나 ‘불륜’에 호의적일 수 없는 것은 사랑을 두고 반칙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었던 사람도 사랑인, 혹은 사랑일 사람도 동시에 농락하는 일이다. 어떤 사연이든 과거형 사랑과 현재형 사랑을 이기적으로 저울질하는 욕심일 뿐이다. 내 감정이 정리됐다면 상대의 감정도 정리돼야 그 사랑은 마침내 끝나 추억으로 영면한다.

그런데 에릭 오르세나가 『오래오래』에서 불륜 남녀를 내세웠다.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가 아무리 자신들의 감정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승격시키고 싶어도 불륜이라는 사실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지난 사랑을 정리하지 않는 한 말이다. 엘리자베트는 지금 가브리엘을 사랑하지만, 이젠 에로스의 감정으로 자신을 조금도 동요시키지 못하는 남편과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함께하는 결혼 생활도 포기하기 싫어한다. 가브리엘과, 사랑 앞에 숙맥인 그를 위해 사랑의 코치를 자처하는 두 노부인에 따르면 엘리자베트는 가슴속에 ‘법도’를 품고 사는 ‘여왕’ 유형의 여자이다. 그 법도라는 것이 굉장히 모순적이고 편의적이라 엘리자베트는 입말로는 자기 가정을 떠날 생각이 없음을 단언하면서도 속말로는 가브리엘이 사랑의 납치를 감행해 주길 열망한다. 비록 사랑이 끝났을지라도 결혼의 서약은 먼저 깨지 않겠다는 의지는, 엘리자베트에게는 남편에 대한 의리이자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이지만, 다른 남자와 바람나서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불륜녀로 비난받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의 발로로 비쳐진다. 즉 엘리자베트의 법도는 자의로는 결코 깨뜨리지 않겠지만 타의로는 기꺼이 깨뜨려진다.

가브리엘은 그런 엘리자베트의 이중적인 법도에 진저리 낼 법하건만 오히려 이해하고 존중한다. 사실 가브리엘 자신이 양다리든 불륜이든 가림 없이 요란하고 파란만장한 사랑으로 몸살을 앓아온 집안의 강력한 유전적인 내력에 굴하지 않고서 평범하고 소박하게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노심초사해 온 사람이다. 차가운 겨울날, 파리 식물원에서 새빨간 후드 코트를 입고서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 엘리자베트에게서 숙명적인 사랑을 감지하기 전까지는.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지만 자기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 이제야 찾아왔음을 첫눈에 알아본 가브리엘은 그동안 성실하게 지켜온 가정과 법도를 미련 없이 버리고 엘리자베트에게 전념한다. 가브리엘이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는 방식도 현실이라면 그리 이해받을 만하지 않지만, 그는 적어도 과거의 사랑과 미래의 사랑을 동시에 기만하지는 않는다. 가브리엘은 지난 사랑과 작별하고 새로운 사랑과 인사한다.


가브리엘도, 남편 B도 그럼에도(가브리엘은 그녀가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남편 B는 그녀가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 자리도 새로운 로맨스도 전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리하여 그녀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좀체 내려놓지 못하고서 나 아닌 다른 남자와 그녀를 공유해야 하는데도) 사랑할 만큼 매혹적이라고 그려지지만 ‘나쁜 여자’ 엘리자베트 때문에 그들의 사랑을 응원할 마음이 도무지 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전설’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어 실소를 머금게 한다. 그것은 그들도 자신들의 사랑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는 반증이다. 흔해빠진 불륜 커플의 행렬에 끼이지 않으려면 그들의 사랑을 특별하게 가꾸어 전설화해야 한다. ‘불륜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의 첫 단계는 아이를 만드는 일이다. 그 아이는 그들의 관계를 오늘 하룻밤이 아니라 영원하고도 공고하게 이어가도록 해주는 동시에 훗날 문학적인 사랑으로 기록해 줄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잉태하는 밀회의 장소로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세계 최초의 소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설” 『돈키호테』를 완성한 도시 스페인의 세비야를 선택했다. 어디 그뿐일까, 그렇게 “금기의 사랑을 용서하고 정당화하고 찬양할”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아기에게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을 붙여준다.


“미겔, 로렌스, 앙리, 오노레, 귀스타브, 찰스, 마르셀, 루이페르디낭, 버지니아, 어니스트, 블라디미르, 가브리엘, 알바로, 조르주”


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정체가 짐작되는가. 부모의 불륜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형상화해 줄 아기의 수호성인으로 엘리자베트와 가브리엘이 “세계적인 이야기의 달인”들을 엄선해 준 것이다. 아기의 범상치 않은 이름은 그들에게서 하나씩 따왔다. 이를테면.


“미겔 데 세르반테스, 로렌스 스턴, 스탕달(본명 마리앙리 베일), 오노레 드 발자크, 귀스타브 플로베르, 찰스 디킨스, 마르셀 프루스트, 루이페르디낭 셀린, 버지니아 울프, 어니스트 헤밍웨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알바로 무티스, 조르주 심농”


소설을 좋아한다면 언제 어디에서건 곧잘 마주치게 되는 이 대단한 면면들은 에릭 오르세나가 흠모하는 작가들일까? 알바로 무티스는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이 번역된 덕분에 최근에 그 이름이나마 알게 된 작가이고,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은 제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쯤 되면 그 노력이 가상하여 엘리자베트는 얄미워도 가브리엘을 떠올려 그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 뭐, 소설이잖아’로 타협하면서.


『오래오래』는 ‘불륜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의 첫 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꼼꼼하게 기록한다. 처음부터 소설 속 주인공이자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가브리엘이 의도한 대로 혼외정사의 반칙과 치욕은 “140번의 이별”에도 불구하고 “141번의 재회”로 오랜 세월 이어진 숙명적인 사랑의 영원한 전설로 씻겼다. 뒤늦게 서로에 대한 정념으로 불붙은 유부남 가브리엘과 유부녀 엘리자베트를 그렇고 그런 불륜의 행렬에서 끌어내어 아름다운 환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는 그 사랑의 배경인 ‘정원’만큼 주효한 장치가 없다. 파리 식물원의 고산식물 정원부터 베르사유 정원과 그곳 왕의 채원,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의 정원,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 일본식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 벨기에의 여러 정원들, 베이징의 원명원까지 그들의 불륜이 시작되고 사랑으로 완성되기까지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세계 곳곳의 환상적인 정원들이 에로스의 기운을 진하게 뿜어낸다. 다채로운 이력들 중에서 국립고등조경학교 학장을 지낸 작가답게 정원에 대한 묘사는 매혹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그것만 내세워도 이 소설의 매력으로는 손색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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