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제주 애월에서 김석희가 전하는 고향살이의 매력
김석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귀향은 언제나 나를 끌어당기는 소재이지만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는 순전히 ‘김석희’라는 작가의 이름 석 자에 기대어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 이름을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의 번역자로 자주 마주치곤 했다. 이후에는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늘렸다.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김석희 번역가의 고향이 제주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가 제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그리고 그렇게 놀라는 나 자신이 또 놀라웠다. 책의 판권에는 간단한 학력과 번역서 중심의 짧은 소개글뿐이니 고향이든 무엇이든 그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쉽게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읽으면서 그를 꽤 친밀하게 생각했나 보다.

김석희는 40년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제주로 돌아가는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물가에 어린 달’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바닷가 마을 애월에 집터를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그는 그 과정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아무것도 없는 너른 터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집이 근사하게 올라간다. 사진만 봐도 부러움의 탄성이 절로 새어 나오는데 그는 얼마나 설레고 흐뭇했을지.

사실 40년 가까운 세월은 겨우 20년 남짓 살았던 고향보다 타향에 더 익숙해지게 하는 시간이다. ‘타향’이라 하기는 해도 그곳을 굳이 ‘고향’과 분리하는 것이 무색할 만큼 긴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도 고향을 떠올리면 그리움과 설렘으로 심장 언저리가 뜨거워지는 것은, 생애 최초로 자신이 존재했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을 공간으로 치면, 고향은 첫사랑인 셈이다. 무엇이든 첫 경험은 쌩하니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섬을 벗어나고 싶어 열병을 앓았던 제주 소년이라도.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는 그렇게 첫사랑에게로 돌아가 이제 소년이 아니라 어른으로 성장기의 추억을 되새기고 익숙한 듯 낯선 친밀감을 새롭게 다져 나가는 고향살이가 담겨 있다. 육지 지인에게 조근조근 써 보낸 편지들(애월 통신)을 묶어 만든 책이라 김석희의 말투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듯하다. 작가가 건네는 육성이 살갑게 다가와서 책장을 넘기는 손이 편안해진다.


지금부터는 여담이다. 지인은 아니지만 독자로 ‘애월 통신’을 읽는 내내 부러움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던 이유는 ‘귀향’ 자체도 내가 바라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도시에서 밀쳐나서 귀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은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이 도시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길지만, 이 시간들은 곧 반전될 것이다. 그럴수록 어른으로 도시에서 내 삶을 책임지며 살아낸다는 것이 계획보다 녹록지 않은 일임을 절감하게 된다. 일찌감치 예순 무렵의 귀향을 꿈꿨던 김석희처럼 나도 언젠가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품고 있지만, 그것이 내 의지로 이루어지지 못할까 봐 두려워진다.


김석희의 귀향이 순조로울 수 있었던 것은 도시와 고향을 가리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번역’이라는 일도 한몫했을 것이다(물론 모든 번역가가 ‘번역’만으로 삶의 경제적 기반을 넉넉하게 꾸려가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런데 나에게 더욱 강하게 남겨진 것은 ‘번역’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그는 제주외고 학생들에게 번역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외국어를 잘한다고 번역을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책 읽는 게 좋고 글을 쓰고 싶거든 그때 번역을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책 읽는 것은 물론 좋고 내가 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을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으면 번역이라는 길도 있다’는 말로 나에게 속살거린다. 어떤 여자는 ‘돈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내 나이에도 ‘아카데믹한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코웃음 치지만, 사실 나는 내년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즐기기 위해 그 ‘아카데믹한 공부’를 계획하고 있다. 어쩌면 그 공부가 또 다른 글쓰기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괜히 새로운 희망으로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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