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읽는다는 행위를 개인적인 차원 너머로 확장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개인적인 읽기일지라도, 비록 그 읽기의 주체가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그것은 막연한 희망 같은 것도 감히 품게 한다. 물론 ‘A는 B이고 B는 C이고 C는 D이므로 A는 D이다’로 이르는 귀결이 드러내기 마련인 오류, 아니 전적으로 수긍하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낯선 논리의 생경함이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다섯 밤 동안 사사키 아타루가 열렬하게, 읽기가 어떻게 혁명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논증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간은 행복하고 급기야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문학의 힘을 아직도 믿고자 하는 젊은 철학자의 순수한 열정에 중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문학’은 소설과 시 같은, 우리가 보통 문학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이라면 그 대상인 텍스트부터 기법까지 모두 ‘문학’으로 아우른다(이 책의 마지막에 이르면 문학의 범주는 더욱 확장되어 예술 전반을 아우른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소설가든 철학자든 과학자든 성직자든 누구든 읽거나 쓴다면 전부 ‘문학가’인 셈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이슬람교 선지자 마호메트도, 중세 교회의 수도사들도 모두 문학가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그들 문학가에 대해, 그들이 문학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혁명했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일인가?’라고 먼저 자문한다. 그리고 그 자답으로 ‘읽으면 미친다’라는 자기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읽기’와 ‘광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책 전체에 걸쳐 줄곧 이야기한다. 우리가 읽었음에도 미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읽기 전에 받아들인 ‘정보’ 때문이다. 텍스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보다 그 정보에 의거하여 지레 판단하고 차단한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순수하고 완전한 읽기’라는 행위를 훼방하는 정보의 부작용을 이야기하기 위해 비평가와 전문가를 예로 든다. 그 구분이 꽤 설득력 있고 재미있다. 그가 말하길, 비평가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인 반면 전문가는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그 둘은 수평과 수직처럼 분명하게 다른 사람이지만 똑같이 ‘모든 것’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그 환상이 우습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는다.


사실 인문학적, 혹은 사회과학적으로(적절한 표현인지 잘 모르겠다!) 어렵게 접근하지 않아도, 이런 환상은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눈에 띈다. 가령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모든 화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척 끼지 않으면 혼자 바보처럼 외로워진다. 정치, 연예, 드라마, 영화, 아이돌, 스마트폰, 야구, 올림픽, 기타 등등. 관심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주 미묘한 취향과 기호에 따라 한정되기 마련이고 어떤 사람은 더더욱 그렇지만, 소위 원만한 사회생활에 동조하려면 내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야 한다. 심지어 연예인 X파일이나 다른 동료의 뒷담화까지도.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는 정보의 경계를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미리 판단하고 경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사전 지식을 의미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도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으면 색안경을 통해 마음대로 재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인 ‘검열’ 없이 책과 ‘접속’하려면 완전한 “무지와 어리석음”의 상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미쳐버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접신(接神)과 마찬가지랄까. 검열은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와 같아서, 다른 사람의 무의식이 투영된 생각을 완전하게 읽는다면 내가 온전히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므로, 그렇게 한순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난다면 도저히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읽을 수 없는 책을 끊임없이 읽고 있는 셈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학가’들은 모두 읽을 수 없는 책을 읽고서 다시 써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읽어‘버렸으니’ 목숨 걸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의 씨앗은 그렇게 싹튼다. 그들은 목숨이 붙어 있다면 읽고, 쓰고, 다시 읽고, 고쳐 쓰고……를 언제까지든 되풀이할 것이다. ‘문학을 읽는 것은 혁명이다’라는 행복하고 황홀한 등식은 이렇게 세워진다(이 등식을 세우기까지 사사키 아타루의 사유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재주는 없으므로, 사실 완전하게 읽어내지도 못했으므로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길. 아, 그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읽을 수 없겠지만. 만약 읽는다면 미치겠지만).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보통의 독자’ 수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그저 흔해빠진 독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이 특히 고마웠던 것은, 그동안 무용지물의 향락과 허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던 나의 책 읽기도 380만 년이라는 영원과 같은 시간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기 때문이다. 혁명처럼 거창한 말은 아스라하게 느껴지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그 희망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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