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일기 - 아프리카의 북서쪽 끝, 카나리아에서 펼쳐지는 달콤한 신혼 생활
싼마오 지음, 이지영 옮김 / 좋은생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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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거침없는 영혼은 딱 둘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중국인 싼마오. 자유에 관한 한 조르바는 감히 범인이 넘볼 수 없는 초인이므로 그를 존경, 혹은 경이의 시선으로 우러를 수는 있을지언정 속세의 룰을 완전히 벗어던진 그에게 개인적인 친밀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는 자유를 상징하는 신성불가침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싼마오를 ‘거룩한 영혼으로 절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초인’과 나란히 언급한다는 것이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조르바처럼 살고 싶지는 않고 싼마오처럼 살고 싶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니어링 부부를 존경하고 그들의 실천적인 삶이 위대하다는 데 일말의 의심조차 두지 않아도 내가 타샤 튜더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유를 꿈꾸지만 범인들에게 방종한 기인으로 여겨지기는 싫고, 자연을 꿈꾸지만 물질의 혜택도 완전히 포기하기는 싫다. 싼마오와 타샤 튜더는 나와 조르바, 나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 나와 니어링 부부 사이에서 내가 안전하게 정착하고 싶은 기착지다. 범속한 인간의 한계도 연민 어린 시선으로 공감해 줄 것 같은.

싼마오라는 중국, 정확히는 타이완 여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칠팔 년 전에 지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그 낯선 이름을 첫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책 이야기에 관해서라면 내 귀는 지나치게 팔랑거리는지라 한번 읽어보고 싶었지만, 그때만 해도 썩 괜찮은 번역서가 없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당신은 나 없이 살 수 있나요』라는 낯간지러운 제목을 달고 나온 1994년도 번역서를 발견하긴 했지만 여전히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 지인이 싼마오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사하라 이야기』와 『흐느끼는 낙타』를 정성스레 번역해서 출판했다. 『허수아비 일기』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다.

싼마오는 사하라 사막에서 호세 쿠에로와 알콩달콩 좌충우돌 신혼 생활을 거침없이 시작한다. 타이완 여자가 스페인 남자와 결혼하여 뜬금없이 사하라 사막으로 날아간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국경을 넘나드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가장 매혹적인 것은 싼마오라는 여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녀는 내일 먹고살 걱정을 하기보다 오늘 제대로 먹고사는 데 열중한다. 가령 당장 내일 돈이 똑 떨어진다고 해도 그녀는 오늘의 식탁만큼은 풍성하게 차려내어 자기 집에 찾아든 손님들을 배불리 먹인다. 오늘을 즐겨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부분은 내일을 걱정하느라, 혹은 어제에 사로잡혀 오늘까지 망쳐버린다. 내일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을 저당 잡혀도 내일 행복해지기는 쉽지 않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오지랖 넓은 싼마오는 사하라 사람들의 만물상 노릇을 하다가 사하라 사막이 전란에 휩싸이자 카나리아 제도로 옮겨 간다. 유럽 각국의 노인들이 주로 살아가는 바닷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그녀는 딱 한 가지만 결심한다. “이번에는 사하라 사막에서처럼 내 개인의 안녕을 해치면서까지 이웃들과 과도하게 가까이 지내지 않겠다고.” (그런데 싼마오가 사하라 사람들을 가리켜 ‘얄미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던가? 그 표현에 동조하면서 한참 웃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책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사하라 이야기』와 『흐느끼는 낙타』를 읽는 내내 사하라 사람들이 너무 얄밉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듯이 싼마오에게 구하면서도 싼마오가 필요한 것은 하나도 내주지 않으려는 태도가 뻔뻔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글로벌 오지랖의 대명사 싼마오는 “쓸모없는 노인네” 이웃들과 왕래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만 땅땅 쳤지, 결국 그들에게 매혹당하고 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과 꽃잎을 주우면서 하루 종일 거리를 쓸고 닦는 노인과, 그런 노인을 두고 볼 수 없어 온 마을의 나무를 흔들어대는 싼마오가 있는 풍경은 정겹고 아름답다. 한밤에 악기를 들고 한둘 모여들어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노인들과, 그들과 어우러져 왈츠를 추는 싼마오가 있는 풍경은 더없이 감동적이다. 싼마오는 그제야 “인생의 끝자락에도 봄이 올 수 있고 희망을 품을 수 있고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싼마오는 그런 노인들을 이웃하여 살아가는 이곳이 좋아서 호세의 친구 미카까지 불러들인다. 그를 10년 넘게 기다린 베티와 결혼시키는데, 베티는 싼마오와 정반대인 여자다. 싼마오는 오늘을 살지만, 베티는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다. 사하라 사막의 분쟁이 극심해지자 싼마오는 호세부터 회사를 그만두게 하지만, 베티는 회사가 해산하지 않는 한 미카가 돈을 벌어 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남편을 사지로 내몰면서까지 돈을 악착같이 모으려는 것은 내일의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오늘 행복하지 않은데 내일 행복할 리는 없다. 인간의 내일은 언제나 불안한 법이다. 오늘이라도 행복해야 한다.

자유분방하게 거침없이 살아가는 싼마오에게도 재갈을 물리는 것은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시(媤)’ 자가 붙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풍경은 다를 게 없나 보다. 자기 가족들 사이에만 있으면 호세는 돌변하여 싼마오에게 가부장적인 위세를 떨치는데, 밉고 어처구니없다가도 철부지 꼬마처럼 귀엽달까? 역시 자기 가족들이 불현듯 보고 싶어진 싼마오가 냉큼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타이완으로 날아가자 호세는 싼마오를 돌아오게 하려고 애정과 유머와 그리움이 가득 담긴 편지 공세를 펼친다. 그런 남편을 어찌 미워만 할 수 있을까.

싼마오와 호세가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은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지상에서 해피엔딩을 맞지는 못했다. 몇 년 후 호세는 잠수 사고로 사망하고, 싼마오는 마흔여덟 살에 자살한다. 그토록 삶을 사랑한 싼마오는 왜 수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한 다음 날 새벽에 자살을 선택했을까? 쟈핑와에게 죽음의 징후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편지를 보내고서……(쟈핑와 『친구』). 싼마오와 호세는 어쩌면 싼마오가 꿈꾸던 천상의 파라과이 농장을 일구며 지상에서 못다 누린 생을 함께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싼마오가 내일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한 일은 일 년 동안 동전을 모으는 일뿐이었다. 호세에게 “크림 케이크도 안 사주고” 모은 동전으로 복권을 사서 파라과이에 드넓은 농장을 세울 꿈을 앓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병을 앓듯이 내일의 꿈을 앓고 나서는 다시 오늘을 용감하게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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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NFF (New Face of Fiction)
찰스 유 지음, 조호근 옮김 / 시공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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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세계―소설이나 만화나 영화 등―소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면서도 써먹기 어려운 소재가 바로 타임머신이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과거의 변화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할어버지 패러독스―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일 경우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로 잘 알려진 타임머신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SF에서는 여러 세계관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소극적으로는 타임 폴리스―과거를 변경하는 시간 여행자들을 감시하는 경찰―를 등장시키는 방법도 있고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우주 자체를 나누는 것이다. 패러럴 월드라 불리는 평행우주가 그것인데 물리학이 아닌 SF의 세계관에서 표현되는 평행우주는 선택―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주사위를 던질 경우 우주는 1에서 6까지 나오는 우주로 나누어진다. 그렉 이건의 『쿼런틴』에서 주사위를 던져서 어떤 숫자가 나올 것이지 알아맞히는 훈련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나오는 우주를 선택하는 것이다―이 그 조건이 된다. 어쨌거나 타임머신의 이야기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찰스 유의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에서는 그 진부한 소재인 시간 여행의 여러 요소에 철학적 관점을 더해 꽤나 독특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타임머신 수리공으로 일하는 찰스 유는 생활의 대부분을 타임머신 속에서 홀로 보낸다. 주위에는 우주 활극물에서 구출해 낸 로봇 개 에드와, 소심하고 우울한 여성형 유저 컴퓨터 인터페이스인 태미, 자신이 사람이라고 믿는 관리직 프로그램인 필뿐이다. 그의 어머니는 1시간짜리 홀로그램 타임루프 속에서 가상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으며 아버지는 타임머신의 개발 도중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타임머신 수리를 위해 고향인 루프 시티에 도착하게 된 찰스 유는 다음 날 찾아간 정비센터에서 미래의 ‘나’가 똑같은 타임머신으로 내리는 모습을 보고 원칙을 무시한 채 미래의 ‘나’를 총으로 쏴버린다. 미래의 ‘나’가 타고 온 타임머신을 타고 급하게 출발하지만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쏘아버리게 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빠지게 된다. 타임머신 안에서 미래의 ‘나’가 쓴 책인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고 미래의 ‘나’가 쓸 책을 현재의 내가 써 가면서 타임루프를 탈출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작가 지망생이었으나 현재는 법조인 생활을 하고 있는 찰스 유의 이 이야기는 기발하다 못해 넘치는 상상력으로 가득 차 넘칠 정도다. 작가 자신도 굉장한 SF 팬임에 틀림없는 것이 타임머신에 관련해 이야기되었던 모든 것들―알 수 없는 이론들, 패러독스, 평행우주, 타임루프에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까지―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우겨 넣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욕심 때문인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싶을 때도 있다. 결국 이것은 시간의 이야기인 동시에 개인의 이야기다. 다만 스페이스 오페라식의 역경을 이겨내고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고 개인적인 성장기다. 타임머신으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미래에서 보게 될 과거의 삶일 것이다. 찰스 유는 현재를 사는 것이 과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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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조너선 프랜즌 지음, 홍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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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FREEDOM)이라는 단어처럼 어떤 시대에서나 어떤 곳에서나 사람들에게 되뇌어지는 단어가 있다면 사랑(LOVE)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단어라면 자유는 특히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자유가 사회적인 부분에 관한 것이며 투쟁을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자유는 좀 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부분으로 변화―여전히 과거의 의미로 남아 있는 곳도 많지만―한 것 같다. 학생은 학교나 집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하고 나이를 먹으면 사회라는 더 큰 감옥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 어쩌면 사람들은 항상 자유롭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너선 프랜즌의 『자유』은 이처럼 개인의 삶과 관계에서 보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패티와 월터는 미네소타 주의 세인트폴에 살고 있는 아이 둘을 가진 중산층 부부다. 평화롭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따뜻한 이웃처럼 보인다. 패티는 여성편력이 심한 록커인 리처드를 좋아했지만 그의 친구인 월터의 헌신적인 구애 덕분에 그와 결혼하게 된다. 아들 조이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고 대립한다. 아들 조이의 가출과 다시 나타난 리처드는 그녀의 곁에서 머물게 되며 가정적이었던 월터는 바람을 피게 되고 이들 가족은 산산조각이 난다.

뉴욕 타임스와 아마존닷컴 베스트 1위에 올랐고 타임지의 표지 장식, 그리고 작가는 꽤나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선정 도서라는 쟁쟁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 책은 전형적인 미국의 이야기다. 미국의 사회와 가정에 속한 개인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의 욕심 때문인지 책 속에는 가족 내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장 큰 화두가 되는 911테러 이후의 사회, 이라크 침략으로 인한 보수와 진보의 갈등, 신세대와 구세대의 문제, 경제적인 분배에 관한 것 등―까지 언급하고 있는 의외로 이런 이야기들이 개인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다. 나라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현재까지도 자유라는 기치가 미국의 모든 것―비록 그것이 옳지 못하거나 다른 나라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도―을 좌우한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가족과 개인들에게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조너선 프랜즌은 당연하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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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교 - 고양이에게 배우는 마음공부
잇사이 쵸잔시 지음, 김현용 옮김, 이부현 감수 / 안티쿠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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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고양이 그림에 ‘고양이 대학교’라는 책의 제목. 이렇게만 놓고 본다면 어떤 이야기일까 싶다. ‘고양이에게 배우는 마음 공부’라는 걸 보면 예전 고양이 이야기를 모아놓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책 첫머리에 있는 추천의 글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검도에 관한 무도서이기 때문이다. 다만 검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쓴 우화이긴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노장 사상을 비롯한 동양 철학과 중세 일본에 널리 퍼진 선불교 사상이 어우러져 심오한 철학의 세계까지 제시하고 있다. 『고양이 대학교』는 도가 사상의 계몽서로 에도 시대 사무라이이며 계몽사상가인 잇사이 쵸잔시가 검술의 정도를 가르치고자 쓴 『이나카소우시』 전 10권 중 1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에는 비전서로 취급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쇼켄이라는 검술가의 집에 나타난 큰 쥐를 잡기 위해 주위의 평판이 좋은 고양이를 데려왔으나 쥐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쥐에게 당할 뿐이었다. 결국 근처의 마을에 뛰어난 고양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데려온 것은 똘똘해 보이지도 않는 늙은 고양이였다. 그런데 큰 쥐가 고양이를 보자마자 위축되어 움직이지도 못해 늙은 고양이가 손쉽게 쥐를 물어 왔다. 이에 젊은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수련 과정을 이야기하며 늙은 고양이에게 그 비결을 묻자 정도(正道)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양이 대학교』에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최고가 되려는 젊은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기술을 수련하는 검은 고양이에서 기세를 단련하는 호랑이 무늬 고양이, 그리고 경험이 쌓여 마음을 다스리는 회색털 고양이다. 사실 이 고양이들은 검도는 물론 무술의 수련 단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처음에 기본적인 기술을 배우고 기세를 단련해 경험을 쌓으면 마음을 다스리려 한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자연과 융화되어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무술 뿐 아니라 사람의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살아오면서 마음을 다스린 후에야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 대학교』의 모티브가 되는 이야기인 장자의 달생편 싸움닭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싸움닭을 만들기로 유명한 기성자가 말하길 좋은 싸움닭은 나무로 만든 닭처럼 주위의 어떤 것에서 반응하지 않는 무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 했다.

『고양이 대학교』는 얇은 책이다. 시대 상황이나 소개 등의 내용을 제외하고 책의 실제 내용만이라면 몇 장 정도면 끝이다. 이 얇고 쉬운 우화로 된 책에 담긴 내용은 쉽지 않다. 모든 것을 초월해 무가 된다는 것, 깨달음이란 자신 속에 있는 것을 제대로 찾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 경지는 검도와 같은 무술 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가장 찾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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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한빛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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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진작 읽었는데도 지금껏 단 한 글자도 끼적거리지 못한 것은 이젠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좀더 죽음과 멀었던 시절에는 시간도 그만큼 더디게 흘렀고 청춘의 무게가 죽음을 압도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아!’ 하고 죽음을 얕본 것은 그만큼 죽음을 온몸으로 실감하지 못한 치기였을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이 어깨를 겯고 있으니 자칫 죽음이라는 구멍에 빠져도 운명, 순리, 섭리 따위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교만했다.

언제부터 되도록 늦게 죽고 싶어졌을까? 언제부터 좀더 오래 살고 싶어졌을까? 자꾸 살다 보니 이것저것 욕심이 생겼는데, 그제야 그 욕심들을 모두 채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령 책에 욕심을 부려 수천 권을 집에 쟁여두었는데, 어느 날 문득 이런 공포가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에 관해서는 당장 내일도 장담할 수 없는데, 내가 내일 죽으면 이 책들은 다 어떡하나? 이 책들을 다 읽기 전에는 죽기 싫어. 억울하단 말이야.’ 또 가령, 우리의 아기. 사랑해서 결혼했으니 우리를 닮은 아기를 보고 싶다는 가장 간절한 욕심이 생기자, 적지 않은 나이라 하루하루가 아쉽기 그지없다. ‘내 아기를 품어 한번 배불러보지도, 낳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지!’ 하는 오기가 생겼다. 나의 시간은 점점 가속도를 더해가는데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의 춤』은 20세기 프랑스 실존주의 지성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한 에세이다. 욕실에서 엉겁결에 넘어지는 바람에 대퇴골 골절로 입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암 진단을 받고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죽기까지 6주 동안, 그녀는 엄마 곁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엄마와 함께했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투병의 나날을 이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죽음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삶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문득 수전 손택의 마지막 나날들이 겹쳐졌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생에 대한 지독한 열망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 수전 손택을 회상한다. 그녀는 죽음과 화해하는 대신 죽음과 맞서는 길을 선택했다.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고상하게 준비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을 뿌리치고 삶을 부여잡은 그녀의 마지막 사투를 감히 누가 추하다고 비하할 수 있을까.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자연사란 없다.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 사건이다. 죽음은, 그가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무엇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라고 말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는 사실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전 손택은 “생전 처음으로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초월하지 않는 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죽음은 ‘나’라는 실존을 세상에서 제거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 그리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세상, 결국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떨궈놓는다. 그 잔인한 진실 앞에서 누군들 신의 섭리, 자연의 순리, 인간의 운명으로 죽음을 담담하게 영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생(生)과 사(死)는 묘하게 닮아 있다. 생과 사는 모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에게 불시에 닥치는 가장 치명적인 돌발 사건이다. 생과 사는 똑같이 ‘삶’을 가운데 두고 양극단에 생명줄을 부여잡은 채 생은 우리를 삶으로 떠나보내고 사는 우리를 삶으로부터 끌어당긴다. 생이 시작되면 사로 끝나야 한다. 그래서일까, 서로를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글자가 이질감 없이 어울려 ‘생사’라는 단어를 만드는 것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엄마처럼, 수전 손택처럼 죽음이라는 인간의 자명한 종결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해 삶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는 것은 그동안 한세상 잘살게 해준 생에 대한 최고의 예의가 아닐까. 살아 있는 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용감한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위대한 삶의 방식이다. 죽음과는 생에 대한 예의를 다한 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부터 영원히 인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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