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한빛문화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책은 진작 읽었는데도 지금껏 단 한 글자도 끼적거리지 못한 것은 이젠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좀더 죽음과 멀었던 시절에는 시간도 그만큼 더디게 흘렀고 청춘의 무게가 죽음을 압도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아!’ 하고 죽음을 얕본 것은 그만큼 죽음을 온몸으로 실감하지 못한 치기였을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죽음이 어깨를 겯고 있으니 자칫 죽음이라는 구멍에 빠져도 운명, 순리, 섭리 따위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교만했다.

언제부터 되도록 늦게 죽고 싶어졌을까? 언제부터 좀더 오래 살고 싶어졌을까? 자꾸 살다 보니 이것저것 욕심이 생겼는데, 그제야 그 욕심들을 모두 채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령 책에 욕심을 부려 수천 권을 집에 쟁여두었는데, 어느 날 문득 이런 공포가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에 관해서는 당장 내일도 장담할 수 없는데, 내가 내일 죽으면 이 책들은 다 어떡하나? 이 책들을 다 읽기 전에는 죽기 싫어. 억울하단 말이야.’ 또 가령, 우리의 아기. 사랑해서 결혼했으니 우리를 닮은 아기를 보고 싶다는 가장 간절한 욕심이 생기자, 적지 않은 나이라 하루하루가 아쉽기 그지없다. ‘내 아기를 품어 한번 배불러보지도, 낳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지!’ 하는 오기가 생겼다. 나의 시간은 점점 가속도를 더해가는데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의 춤』은 20세기 프랑스 실존주의 지성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사색한 에세이다. 욕실에서 엉겁결에 넘어지는 바람에 대퇴골 골절로 입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암 진단을 받고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죽기까지 6주 동안, 그녀는 엄마 곁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엄마와 함께했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투병의 나날을 이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죽음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삶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문득 수전 손택의 마지막 나날들이 겹쳐졌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생에 대한 지독한 열망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 수전 손택을 회상한다. 그녀는 죽음과 화해하는 대신 죽음과 맞서는 길을 선택했다.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고상하게 준비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을 뿌리치고 삶을 부여잡은 그녀의 마지막 사투를 감히 누가 추하다고 비하할 수 있을까.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자연사란 없다. 개인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 사건이다. 죽음은, 그가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무엇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라고 말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는 사실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수전 손택은 “생전 처음으로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초월하지 않는 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문제다”라고 말했다. 죽음은 ‘나’라는 실존을 세상에서 제거하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 그리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세상, 결국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떨궈놓는다. 그 잔인한 진실 앞에서 누군들 신의 섭리, 자연의 순리, 인간의 운명으로 죽음을 담담하게 영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생(生)과 사(死)는 묘하게 닮아 있다. 생과 사는 모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에게 불시에 닥치는 가장 치명적인 돌발 사건이다. 생과 사는 똑같이 ‘삶’을 가운데 두고 양극단에 생명줄을 부여잡은 채 생은 우리를 삶으로 떠나보내고 사는 우리를 삶으로부터 끌어당긴다. 생이 시작되면 사로 끝나야 한다. 그래서일까, 서로를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글자가 이질감 없이 어울려 ‘생사’라는 단어를 만드는 것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엄마처럼, 수전 손택처럼 죽음이라는 인간의 자명한 종결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해 삶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는 것은 그동안 한세상 잘살게 해준 생에 대한 최고의 예의가 아닐까. 살아 있는 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용감한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위대한 삶의 방식이다. 죽음과는 생에 대한 예의를 다한 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부터 영원히 인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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