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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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요코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것에서 아름다운 감동을 찾아낼 줄 아는 소설가이다. 그녀는 내게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숫자를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면 놀랍게도 음악이고, 시이고,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 책이 바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수의 세계에서 매혹적인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로 체스의 세계에 그 신비로운 마법을 불어넣는다.

체스는 가로 여덟 칸, 세로 여덟 칸, 흑백 모눈의 정사각형 체스 판 위에서 흑말 열여섯 개, 백말 열여섯 개로 두 사람이 대국하여 상대의 킹을 궁지로 몰아넣는 게임이다. ‘게임’, 체스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에게 체스는 심심한 시간에 따분함을 달래기 위한 수많은 놀이들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이 움직이는 체스의 규칙을 숙지하고 오로지 킹을 사로잡기 위해 나머지 말을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승리와 패배를 결판내는 것이다. 이기거나 지거나 말고 체스에서 다른 무엇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언제나 가장 소중한 의미는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두어 진심 어린 애정의 눈길이 아니라면 그토록 깊이 가닿지 못한다. 오가와 요코는 체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체스 판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일반적인 크기든, 테이블 자체든, 수영장 바닥이든, 체스 말이 오래 길들여져 손가락 사이에 쏙 들어앉는 목재 말이든, 열여섯 말의 상징물을 각각 머리에 올린 인간 말이든, 돋보기로 들여다봐야 겨우 분간할 수 있는 대추야자 씨 말이든, 체스는 체스 판의 공간적인 경계를 뛰어넘고 그 체스 판 위에서 규칙대로 움직여야 하는 체스 말의 숙명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우주의 무수한 별들 사이를 유영하고 무한히 넓고 끝없이 깊은 바다에 잠수하는 모험이다. 오가와 요코는 그것이 게임의 승패와 상관없는 체스의 본질이라고 귓가에 속삭인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본질에 가닿도록 독자를 이끌기 위해 입술이 달라붙은 채 태어난 열한 살 소년을 등장시킨다.


소년의 이상한 입술을 묘사하면서 “입속에 감춘 어둠”, “출구를 잃은 목소리”처럼 태초의 침묵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맞붙은 입술을 절개하고 정강이 살을 이식하여 입속의 짙은 어둠을 헤치고 목소리의 출구를 찾아줬다고 생각하지만, 그 입술은 어디까지나 모조품일 뿐이다. 소년은 억지로 벌린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봉합 자국을 맞대고 있을 때야 제자리를 찾은 듯이 안도한다. 입속에 어둠을 감추고 목소리를 가라앉히는 소년의 침묵은 입 밖으로 떠드는 수다보다 더 풍요로운 이야기들을 품는다. 이 이야기들은 물리적인 소리가 부닥치게 마련인 표현의 한계에 구애되지 않고 체스 판 위에서 자유롭게, 아름답게, 숭고하게 피어난다. 그리하여 소년은, ‘반상盤上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전설적인 체스 그랜드마스터 알렉산드르 알레힌의 이름을 따서 ‘반하盤下의 시인 리틀 알레힌’으로 불린다.


‘반하’라고 해서 체스의 품격이 ‘반상’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소년은 체스 판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체스를 두기 때문이다. 체스 판에서 움직이는 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말이 놓이는 소리에 귀 기울여 말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려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년은 좁은 체스 판에서 한정된 체스 말로 이미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면서도 체스 판, 체스 말, 규칙을 모두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를 자유롭게 불러들이지만, 체스를 떠난 현실에서는 선명한 한계 안에 자기 몸을 가둔다. 완전히 다물어진 본래 입술부터 비좁고 어두컴컴한 장롱 침대, 체스의 감동적인 지문을 처음 새겨준 마스터의 체스 테이블 아래, 체스를 두는 인형 ‘리틀 알레힌’ 속, 그리고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몸속까지 소년은 육체를 극한의 한계 속에 유폐시킴으로써 정신을 일말의 한계 없이 확장시킨다. 이것은 비단 소년뿐만이 아니다. 몸이 거대해지는 바람에 백화점 옥상에 갇힌 인도 코끼리 인디라부터 벽과 벽 사이에 파묻힌 소녀 미라, 회송 버스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뚱뚱한 거구의 마스터, 세상과의 연결 통로라곤 낡은 곤돌라뿐인 산중의 에튀드(체스연맹 회원들을 위한 노인 요양 시설) 노인들까지 소년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육체의 구속을 인식하는 만큼 정신에는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어찌 이보다 더 자유롭게 육체의 한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오가와 요코는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 체스가 단순히 “말을 움직이는 법만 배우면 되는” 게임이 아님을 책장마다 감동적인 미문과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보여준다. 그런데 왠지 그녀는 체스란 무엇인지를 독자와 공감하기 위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감동은 과한 표현의 남발, 이상하고도 특별한 인물, 이국적인 설정 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번역본 표지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감동 소설!”이라는 글귀가 박혀 있지만,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리틀 알레힌 같은 존재는 다름 아닌 교통사고로 기억력을 주관하는 뇌에 문제가 생긴 박사이다. 낡고 살풍경한 별채에서 누구와도 온전히 교류하지 못한 채 수학만을 애지중지해 온 박사는 ‘80분짜리 기억력’이라는 자기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평범한 파출부 모자와 소박한 인연을 쌓아간다. 작가에게 강요당하지 않아도, 그 꾸밈없는 인연이 눈물겹도록 따뜻해서 마음의 온도가 저절로 상승한다. 그에 비해 체스의 철학이 아름다운 언어들로 화려하게 수놓인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는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오가와 요코이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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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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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추리 문화’가 일상적인 곳이다. 수많은 추리소설과 추리 관련 애니메이션은 물론 TV에서도 매번 추리 관련 드라마를 방영한다. 일본의 추리문학은 오랜 역사를 자랑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일본은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곳일 터, 그곳을 탐험하다 보면 일본 추리문학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하면서도 깊은 것인지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전통이 되어버린 일본 추리문학을 들여다보면 현대의 작가들을 제외하고서라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들이 있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이다. 현대문학―문학뿐 아니라 모든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에서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이 무의해져 버리기도 했지만 이전에는 추리소설의 경우도 여러 장르로 나누어지곤 했다. 트릭과 수수께끼 등이 주가 된 본격파 추리소설과 이에 반발해 범죄의 동기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등으로 눈을 돌린 사회파 추리소설이 그것이다(물론 둘의 장점을 흡수하려고 한 신본격파와 하드보일드 같은 터프한 작품들은 물론 코지미스터리 등과 같은 가벼운 터치의 작품들도 많다). 본격파 추리소설들이 너무 트릭과 해결에 집중한 나머지 범죄는 이유 없이 복잡해져 버리고 현실과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등장한 것이 사회파 추리소설이며, 『제로의 초점』의 마쓰모토 세이초는 바로 이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이다.

스물여섯의 데이코는 중매로 열 살 연상인 우하라 겐이치를 만나 급하게 결혼을 한다. 신혼여행 직후 일주일 후에 돌아온다며 근무지로 떠난 겐이치는 사라진다. 신혼여행에서 불안감을 느끼던 데이코는 남편의 실종에, 자신이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남편을 찾기 시작한다. 남편의 근무지로 간 데이코는 남편의 형인 우하라 소타로 역시 그를 몰래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과 남편이 전에는 순경이었으며 당시에 얽힌 과거가 복잡한 것을 알게 된다. 데이코에게 숨기며 동생을 찾던 형 우하라가 여관에서 살해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파 추리소설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제로의 초점』이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본격추리소설을 선호하고 정교한 트릭과 탐정을 좋아하는 입장인지라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이 작품은 읽기에 심심한 편이었다. 오히려 순문학적 장르에 추리소설이라는 양념만 친 게 아닐까 하는 정도인데 이는 작가의 글에 대한 신념―내용은 시대의 반영이나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를 이루어간다―과도 연관이 있을 듯하다. 순문학과 대중문학,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업적을 남긴 작가답게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로의 초점』은 추리소설이고, 추리소설은 반드시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회파 추리소설의 클래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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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삶을 먹다 - 대지의 청지기 웬델 베리의 먹거리, 농사, 땅에 대한 성찰
웬델 베리 지음, 이한중 옮김 / 낮은산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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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엥겔계수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엥겔계수는 한 가정의 전체 소비지출 가운데 식료품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식료품 지출의 비율이 높을수록 하류층, 낮을수록 상류층으로 구분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식료품, 즉 먹거리의 가치를 배제한 영악한 계산법이 아닐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지만,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음식물을 최소한으로라도 해결한 다음에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목숨을 가진 것들에게는 제 생명을 지켜주는 먹거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하며, 따라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 고매한 정신세계든 우아한 문화생활이든 먼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육체부터 튼튼하게 건사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건강한 생명 앞에 상류층이나 하류층이나 먹거리의 중요성이 어찌 다를까. 많이 가진 자든 별로 가지지 못한 자든 제 생명이 소중하다면 자기 먹거리에 한 치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밥상에 올릴 먹거리는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까? 웬델 베리는 그 선택이 대형 마트에 진열된 유기농 식품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온 삶을 먹다』(‘Bring It to the Table’이라는 원제에서 책의 내용을 충분히 포괄하면서도 근사하게 함축적인 제목을 떠올린 편집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에서, 그는 먹거리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먹거리와 관련된 모든 담론들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이야기하고 먹거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왜 지금과 달라져야 하는지 일깨운다.


웬델 베리는 우리가 가공하고 유통하고 요리할 수 있도록 먹거리를 처음 생산하는 농사와,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땅, 그리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주목한다. 그는 먹거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서 먹거리 생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명백하게 증명한다. 자신이 도시에 산다고, 농부가 아니라고 먹거리 생산에 무관심해도 된다고 쉽게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조차 농부가 어딘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위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야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딱히 증명이랄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여 대부분 의식 저편으로 밀쳐버린 진실이다. 여기에 그는 어떤 형태로든 자연을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연 보존론자들이나 환경 생태학자들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 그대로’를 노래하며 자연에 귀의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의 차이점이다. 웬델 베리는 자연과, 그 자연에 인간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농사 사이에 화해와 조화를 꾀한다. 직접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가 제기하는 고민과 사유와 결론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다.


1979년부터 2006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에세이들을 골라 엮은 이 책에서 웬델 베리가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농업의 가치를 단순하게 생산성과 효율성과 가격으로 환원하여 건실한 소농장을 파괴하고, 화석연료 없이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고가의 기계 및 설비,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 토질을 악화시키는 단일경작, 척박해진 땅을 눈가림해 주는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공장식 대규모 농장(식물공장, 동물공장)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예속시키는 산업농업에서 벗어나 농업의 독립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산업농업의 결과는 농사의 근원을 훼손하는 대가로 얻은 식량의 잉여이다. 이것은 얼핏 산업자본주의 경제가 포장하는 대로 그 훼손의 모든 부작용을 상쇄할 만큼 현혹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먹거리가 남아돌게 되면 먹거리의 소중함은 사라진다. 먹거리는 우리 사회의 ‘가장 덜 중요한 생산물’로 낭비되고, 농업은 ‘산업 위계의 맨 밑바닥’에 고착되며, 농부는 ‘경제학자와 과학자의 진단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건실한 농업이란 무엇일까? 웬델 베리는 농업이 자연과 인간의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농장 안의 동식물이라면 가릴 것 없이 모든 생명에게 관심과 애정과 정성을 들이고 땅을 건강하게 이용할 수 있을 만큼의 소규모 가족형 농장을 지향한다. 땅을 비옥하게 보존하고 그 땅 위에서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모두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순환하며 살아가도록 농장을 돌보는 ‘살림’은, 농장의 유지와 관리보다 생산에만 집중하여 단일 농작물을 대단위로 경작하고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도 도시 사람들처럼 자기 먹거리를 사 먹는 것을 대단한 혜택으로 여기는 대규모 산업농업에서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경시되고 있지만, 농부가 자신이 키운 가축으로 직접 농사지은 농작물을 기본적인 생존 수단으로 삼는 것만큼 먹거리의 건강한 질을 담보하는 것은 없다. 생산은 농업의 목표가 아니라 성실한 농사의 결과일 뿐이다.


웬델 베리는 농법이 어떠해야 농업을 건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직접 땅을 일궈본 농부답게 세심하게 언급하고 또한 그것이 백번 지당하지만, 우리나라 농업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다소 의구심이 든다. 일단 면적으로만 따지자면 ‘100에이커(12만 평) 이하’의 농장은 미국에서는 소농장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농장이다. 그는 기계를 대표하는 트랙터보다 말 같은 가축과 옛 농기구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지만, 나는 농사꾼인 내 부모가 농기계를 하나씩 구입할 여력이 생길 때마다 더없이 반가웠다. 그렇게 겨우 100마지기 남짓의 농사를 짓는데도 평생에 걸친 노동으로 무릎이 상하고 손가락은 다 휘었다. 웬델 베리는 농부의 삶보다 이상적인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런 부모를 곁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도 그렇게 수긍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과 욕망의 절제를 감수하길 요구한다.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들은 (거의) 자식만큼은 힘든 농사를 짓지 않길 바란다. 자신이 감당해 온 노동의 무게가 자식의 육체까지 고통스럽게 짓누르지 않도록, 농사에 쏟은 품에 비해 보잘것없는 대가로 누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누리지 못했던 욕망을 자식은 마음껏 누리며 살도록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 아닌가.


그러나 농부와 농사를 바라보는 웬델 베리의 철학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한다. 농부는 “낡아 빠졌지만 아직 버릴 수는 없는 기계 같은 존재”가 아니다. 농부는 건강한 먹거리를 건실하게 생산하는 “최고 단계의 장인”이며 “일종의 예술가”이다. 농사와 막일을 동일시하는 시각이 획기적으로 변화하지 않고서는 농업이 처한 부당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건실한 농업이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한다. 자기 먹거리가 건강하길 원한다면 자신이 먹는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가 얼마나 깨끗한 환경에서 정성스럽게 길러졌는지, 유통 과정에서 농기업과 유통업체에만 부당 이익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광고와 홍보에 현혹되어 무심결에 가공업체와 대형 마트가 통제하고 제공하는 대로 먹어온 것은 아닌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건강한 먹거리는 생산방식도, 유통 과정도, 이익의 발생도 바람직하다. 좋은 먹거리는 신체를 건강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정신까지 건강하게 해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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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54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부희령 옮김 / 비룡소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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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완전하게 신뢰하고 사랑해야 할 사이에 살인을 무참하게 저지르는 세상에서 조이스 캐럴 오츠의 『초록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는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돈 때문에, 의심 때문에, 폭력성 때문에 천륜을 거슬러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사건은 잊힐 만하면 TV에 또다시 보도되어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상대를 위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그를 죽이는 비극은 결국 ‘말세(末世)’로 치닫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과 죽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과 피를 나누고 인정을 주고받으며 끈끈한 유대로 결속된 사람들이 여태껏 보듬고 지켜온 세계까지 그 순간에 함께 끝장난다. 사랑, 신뢰, 안전, 진실, 위로, 격려, 웃음꽃같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이 피로 얼룩지면 집착, 기만, 구속, 거짓, 가식, 위협, 침묵같이 불안하고 무서운 단어들로 숨을 죽이는 것이다.

젊은 시절 미식축구 스타였으며 지금은 독보적인 스포츠 해설가로 자신을 추종하는 대중을 거느린 아빠 리드 피어슨, 한때 TV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아나운서였지만 지금은 남편을 내조하고 세 아이들을 보살피며 집안을 꾸려가는 아름다운 엄마 크리스타 피어슨, 아빠를 뒤이어 미식축구를 하는 명문대생 아들 토드,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폭발적인 잠재력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엿보이는 수영 실력을 가진 고등학생 큰딸 프란체스카, 수줍음이 많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한 초등학생 작은딸 사만다, 유명한 건축가가 포스트모던하게 설계한 집. 『초록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화려한 상류층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피어슨 가족이 등장한다. ‘훌륭한 이력과 멋진 외모를 자랑하는 부모와 그 든든한 배경의 지원을 누리는 엄친아’로 대변되는 그들에게는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그들은 예술적인 집에서 격조 높은 생활을 하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완벽한 가족의 표상으로 각종 언론 매체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피어슨 가족의 실재성은 의심스러워진다.

피어슨 가족은 아빠인 리드의 진두지휘로 행복한 가정이라면 무릇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공식에 따라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 여기에서 ‘답게’가 아주 중요한데, 리드는 크리스타에게는 ‘리드의 아내답게’, 토드에게는 ‘리드의 아들답게’, 프란체스카와 사만다에게는 ‘리드의 딸들답게’를 주문한다. 그와 상관없이 ‘아내’가 크리스타 자신으로만, ‘아들’이 토드 자신으로만, ‘큰딸’이 프란체스카 자신으로만, ‘작은딸’이 사만다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족은 그의 명성을 더욱 빛나게 완성해 줄 마지막 액세서리 혹은 들러리로,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그가 연기하도록 강요하는 ‘환상의 가족’은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포장해 보이고 싶은 전시용 가족일 뿐이다.


그것은 피어슨 가족의 ‘집’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크리스타는 한 가정을 돌보고 키우고 살찌우는 아내이자 엄마로서 가족이 사용할 가구를 직접 선택하고 싶어 했지만, 리드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그조차 자기 명성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유명한 실내 장식가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아빠의 착한 딸’로 대변되는 ‘프랭키(프란체스카)’조차 그 집에 대해 “고객의 실제 생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세상의 이목에 따라 “대중에게 공개되는 공간”이 거의 대부분인 전시용 집에 가족이 실제로 생활한 공간은 옹색하고 불편하게 숨겨져 있다. 온기가 배고 사랑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해야 할 가족의 보금자리는 기형적으로 변형되어 ‘어둠과 냉기로 스산한 무덤(조이스 캐럴 오츠는 “고대 무슬림 사원”에 비유했다. 왜 하필 그런 비유를 선택했을까? 어떤 편견이 작용했을까?)’으로 무겁게 숨죽인다.


피어슨 가족의 비극은, 다른 가족의 행복 따위는 자신의 성공과 명예욕 아래 가볍게 짓밟아버리는 리드의 폭력적인 욕망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다. 리드를 화려하게 포장하는 꼭두각시로 연기하길 더 이상 거부하고 제 삶의 주인공으로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되찾으려는 크리스타는 단지 그 비극을 표면화했을 뿐이다. 리드가 가족 모두의 장밋빛 현재와 미래인 양 자신만만하게 펼쳐 보이는 무대에서 ‘자신도 존재하는 희망’이 아니라 ‘자신은 부재하는 공허’를 알아차린 크리스타는 끝내 리드의 마수에 희생되지만, 더욱 비극적인 것은 세 아이들이다.


『초록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에서 토드와 사만다는 물론 이 소설을 서술하는 프란체스카가 내내 ‘아빠가 그렇게 말했어요!’라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광경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없다. 리드가 절대 ‘아빠’일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의 엄마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말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끔찍한 죄이다. 아이들은 생각을 멈춘 채 오로지 아빠의 말만 고집스럽게 반복한다. 아빠의 말과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눈에 보이는 사실’에서 뭔가 다른 낌새를 깨달을라치면 더욱 눈을 꼭 감고 귀를 꽉 막아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외면하면 그만이다. 그 편이 자신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가족에게도 무자비한 아빠와 맞서는 것보다 훨씬 쉬우니까.


‘프리키’는 프란체스카의 내면에서 아빠가 주입한 대로 ‘아빠의 말’만 하는 프랭키를 일깨워 자기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후 ‘자신의 말’을 하도록, 그리하여 진실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또 다른 자아이다. 프리키는 프란체스카로 하여금 엄마의 희생 속에 감춰진 진실을, 위선과 허위 일색인 아빠의 무서운 거짓을 똑바로 마주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의지를 되살리고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소설의 결말은 가족의 끔찍한 몰락 속에서도 프란체스카가 치명적인 상처를 극복하고 자기 안의 프리키와 함께 자신이 주인공인 삶으로 도약하는 희망을 제시한다. 그 희망은 온갖 폭력으로 살벌한 세상에서 실낱같이 여겨지기만 하지만, 그래도 그런 빛줄기 한 자락이나마 미약하게 남겨준 작가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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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 걸작선 1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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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세기말에 등장하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나 오래전에 TV에서 생중계를 해 줬던 대한민국 발 휴거 소동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2012년이 가까워지면서 마야의 예언이 다시 회자되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큰 이슈가 되지 않았지만 한두 달 전쯤 소행성이 지구 쪽으로 접근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이 행성이 수메르 신화에서 언급된 12번째 행성인 니비루(NIBIRU)가 아닌가 하여 다시 종말론이 고개를 들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종말론은 모두 실패했고 마야가 예언한 2012년도 별 문제없이(세계의 종말을 예언한 마야가 자신들의 종말을 피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숙명론적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였다면 모르겠지만) 지나갈 테지만 그때가 되면 또 다른 종말론이 나타날 것이다. 종말에 대한 공포와 매력, 인간이 가진 이 두 가지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가진 인간이면서도 그에 못지않은 호기심을 가진 인간의 양면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종말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이 멸종되지 않는 이상 꾸준히 만들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겁을 내면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집어들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지 않지만 요새 대 유행인 좀비물 역시 종말론을 살짝 변형시킨 이야기들로 조금 더 자극적이고 공포스럽다.
 

『종말문학 걸작선』에는 종말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종말 그 순간을 포착한 이야기, 종말의 원인이 되는 이야기, 종말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뜻밖으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두렵거나 공포스러운 것이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폭력의 종말』 같은 경우는 종말의 직접적인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종말 이후의 삶을 그린 이야기들이나 파올로 바시갈루피의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 같은 경우 인류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다루면서도 공포보다는 허무감을 들게 만드는 경우가 그것이다. 물론 여러 작가들의 작품집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내용 또한 다양하다. 고전적인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일 베일리의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의 종말』에서부터 컴퓨터의 시대에 어울리는 코리 독토로의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 그리고 SF의 세계관과 결합된 작품까지 과거부터 시작되어 미래에도 상상 가능한 종말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 준다. 직접적인 종말 이야기보다 인류의 종말에 대한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이야기 때문에 모든 작품을 흥미롭게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종말론의 허구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종말은 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지구 외적인 문제보다는 인간 스스로의 문제가 이유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미래는 알 수 없기에 더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이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나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종말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이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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