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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이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추리 문화’가 일상적인 곳이다. 수많은 추리소설과 추리 관련 애니메이션은 물론 TV에서도 매번 추리 관련 드라마를 방영한다. 일본의 추리문학은 오랜 역사를 자랑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일본은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곳일 터, 그곳을 탐험하다 보면 일본 추리문학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하면서도 깊은 것인지를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전통이 되어버린 일본 추리문학을 들여다보면 현대의 작가들을 제외하고서라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들이 있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마쓰모토 세이초이다. 현대문학―문학뿐 아니라 모든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에서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이 무의해져 버리기도 했지만 이전에는 추리소설의 경우도 여러 장르로 나누어지곤 했다. 트릭과 수수께끼 등이 주가 된 본격파 추리소설과 이에 반발해 범죄의 동기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등으로 눈을 돌린 사회파 추리소설이 그것이다(물론 둘의 장점을 흡수하려고 한 신본격파와 하드보일드 같은 터프한 작품들은 물론 코지미스터리 등과 같은 가벼운 터치의 작품들도 많다). 본격파 추리소설들이 너무 트릭과 해결에 집중한 나머지 범죄는 이유 없이 복잡해져 버리고 현실과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등장한 것이 사회파 추리소설이며, 『제로의 초점』의 마쓰모토 세이초는 바로 이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이다.
스물여섯의 데이코는 중매로 열 살 연상인 우하라 겐이치를 만나 급하게 결혼을 한다. 신혼여행 직후 일주일 후에 돌아온다며 근무지로 떠난 겐이치는 사라진다. 신혼여행에서 불안감을 느끼던 데이코는 남편의 실종에, 자신이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남편을 찾기 시작한다. 남편의 근무지로 간 데이코는 남편의 형인 우하라 소타로 역시 그를 몰래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과 남편이 전에는 순경이었으며 당시에 얽힌 과거가 복잡한 것을 알게 된다. 데이코에게 숨기며 동생을 찾던 형 우하라가 여관에서 살해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파 추리소설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제로의 초점』이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본격추리소설을 선호하고 정교한 트릭과 탐정을 좋아하는 입장인지라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이 작품은 읽기에 심심한 편이었다. 오히려 순문학적 장르에 추리소설이라는 양념만 친 게 아닐까 하는 정도인데 이는 작가의 글에 대한 신념―내용은 시대의 반영이나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를 이루어간다―과도 연관이 있을 듯하다. 순문학과 대중문학,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업적을 남긴 작가답게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로의 초점』은 추리소설이고, 추리소설은 반드시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회파 추리소설의 클래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