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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ㅣ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오가와 요코는 내가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것에서 아름다운 감동을 찾아낼 줄 아는 소설가이다. 그녀는 내게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숫자를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면 놀랍게도 음악이고, 시이고,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 책이 바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수의 세계에서 매혹적인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로 체스의 세계에 그 신비로운 마법을 불어넣는다.
체스는 가로 여덟 칸, 세로 여덟 칸, 흑백 모눈의 정사각형 체스 판 위에서 흑말 열여섯 개, 백말 열여섯 개로 두 사람이 대국하여 상대의 킹을 궁지로 몰아넣는 게임이다. ‘게임’, 체스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에게 체스는 심심한 시간에 따분함을 달래기 위한 수많은 놀이들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다.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이 움직이는 체스의 규칙을 숙지하고 오로지 킹을 사로잡기 위해 나머지 말을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승리와 패배를 결판내는 것이다. 이기거나 지거나 말고 체스에서 다른 무엇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이 언제나 가장 소중한 의미는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두어 진심 어린 애정의 눈길이 아니라면 그토록 깊이 가닿지 못한다. 오가와 요코는 체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체스 판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일반적인 크기든, 테이블 자체든, 수영장 바닥이든, 체스 말이 오래 길들여져 손가락 사이에 쏙 들어앉는 목재 말이든, 열여섯 말의 상징물을 각각 머리에 올린 인간 말이든, 돋보기로 들여다봐야 겨우 분간할 수 있는 대추야자 씨 말이든, 체스는 체스 판의 공간적인 경계를 뛰어넘고 그 체스 판 위에서 규칙대로 움직여야 하는 체스 말의 숙명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우주의 무수한 별들 사이를 유영하고 무한히 넓고 끝없이 깊은 바다에 잠수하는 모험이다. 오가와 요코는 그것이 게임의 승패와 상관없는 체스의 본질이라고 귓가에 속삭인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본질에 가닿도록 독자를 이끌기 위해 입술이 달라붙은 채 태어난 열한 살 소년을 등장시킨다.
소년의 이상한 입술을 묘사하면서 “입속에 감춘 어둠”, “출구를 잃은 목소리”처럼 태초의 침묵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사용한다. 맞붙은 입술을 절개하고 정강이 살을 이식하여 입속의 짙은 어둠을 헤치고 목소리의 출구를 찾아줬다고 생각하지만, 그 입술은 어디까지나 모조품일 뿐이다. 소년은 억지로 벌린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봉합 자국을 맞대고 있을 때야 제자리를 찾은 듯이 안도한다. 입속에 어둠을 감추고 목소리를 가라앉히는 소년의 침묵은 입 밖으로 떠드는 수다보다 더 풍요로운 이야기들을 품는다. 이 이야기들은 물리적인 소리가 부닥치게 마련인 표현의 한계에 구애되지 않고 체스 판 위에서 자유롭게, 아름답게, 숭고하게 피어난다. 그리하여 소년은, ‘반상盤上의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전설적인 체스 그랜드마스터 알렉산드르 알레힌의 이름을 따서 ‘반하盤下의 시인 리틀 알레힌’으로 불린다.
‘반하’라고 해서 체스의 품격이 ‘반상’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소년은 체스 판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체스를 두기 때문이다. 체스 판에서 움직이는 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말이 놓이는 소리에 귀 기울여 말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려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년은 좁은 체스 판에서 한정된 체스 말로 이미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면서도 체스 판, 체스 말, 규칙을 모두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를 자유롭게 불러들이지만, 체스를 떠난 현실에서는 선명한 한계 안에 자기 몸을 가둔다. 완전히 다물어진 본래 입술부터 비좁고 어두컴컴한 장롱 침대, 체스의 감동적인 지문을 처음 새겨준 마스터의 체스 테이블 아래, 체스를 두는 인형 ‘리틀 알레힌’ 속, 그리고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몸속까지 소년은 육체를 극한의 한계 속에 유폐시킴으로써 정신을 일말의 한계 없이 확장시킨다. 이것은 비단 소년뿐만이 아니다. 몸이 거대해지는 바람에 백화점 옥상에 갇힌 인도 코끼리 인디라부터 벽과 벽 사이에 파묻힌 소녀 미라, 회송 버스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뚱뚱한 거구의 마스터, 세상과의 연결 통로라곤 낡은 곤돌라뿐인 산중의 에튀드(체스연맹 회원들을 위한 노인 요양 시설) 노인들까지 소년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육체의 구속을 인식하는 만큼 정신에는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어찌 이보다 더 자유롭게 육체의 한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오가와 요코는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 체스가 단순히 “말을 움직이는 법만 배우면 되는” 게임이 아님을 책장마다 감동적인 미문과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보여준다. 그런데 왠지 그녀는 체스란 무엇인지를 독자와 공감하기 위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감동은 과한 표현의 남발, 이상하고도 특별한 인물, 이국적인 설정 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번역본 표지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감동 소설!”이라는 글귀가 박혀 있지만,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리틀 알레힌 같은 존재는 다름 아닌 교통사고로 기억력을 주관하는 뇌에 문제가 생긴 박사이다. 낡고 살풍경한 별채에서 누구와도 온전히 교류하지 못한 채 수학만을 애지중지해 온 박사는 ‘80분짜리 기억력’이라는 자기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평범한 파출부 모자와 소박한 인연을 쌓아간다. 작가에게 강요당하지 않아도, 그 꾸밈없는 인연이 눈물겹도록 따뜻해서 마음의 온도가 저절로 상승한다. 그에 비해 체스의 철학이 아름다운 언어들로 화려하게 수놓인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는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오가와 요코이기에 쓸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