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삶을 먹다 - 대지의 청지기 웬델 베리의 먹거리, 농사, 땅에 대한 성찰
웬델 베리 지음, 이한중 옮김 / 낮은산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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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엥겔계수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엥겔계수는 한 가정의 전체 소비지출 가운데 식료품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식료품 지출의 비율이 높을수록 하류층, 낮을수록 상류층으로 구분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식료품, 즉 먹거리의 가치를 배제한 영악한 계산법이 아닐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지만,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음식물을 최소한으로라도 해결한 다음에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목숨을 가진 것들에게는 제 생명을 지켜주는 먹거리가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하며, 따라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 고매한 정신세계든 우아한 문화생활이든 먼저 그것의 바탕이 되는 육체부터 튼튼하게 건사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건강한 생명 앞에 상류층이나 하류층이나 먹거리의 중요성이 어찌 다를까. 많이 가진 자든 별로 가지지 못한 자든 제 생명이 소중하다면 자기 먹거리에 한 치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밥상에 올릴 먹거리는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까? 웬델 베리는 그 선택이 대형 마트에 진열된 유기농 식품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온 삶을 먹다』(‘Bring It to the Table’이라는 원제에서 책의 내용을 충분히 포괄하면서도 근사하게 함축적인 제목을 떠올린 편집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에서, 그는 먹거리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먹거리와 관련된 모든 담론들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이야기하고 먹거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왜 지금과 달라져야 하는지 일깨운다.


웬델 베리는 우리가 가공하고 유통하고 요리할 수 있도록 먹거리를 처음 생산하는 농사와,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땅, 그리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주목한다. 그는 먹거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서 먹거리 생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명백하게 증명한다. 자신이 도시에 산다고, 농부가 아니라고 먹거리 생산에 무관심해도 된다고 쉽게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그들조차 농부가 어딘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위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야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딱히 증명이랄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여 대부분 의식 저편으로 밀쳐버린 진실이다. 여기에 그는 어떤 형태로든 자연을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연 보존론자들이나 환경 생태학자들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 그대로’를 노래하며 자연에 귀의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의 차이점이다. 웬델 베리는 자연과, 그 자연에 인간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농사 사이에 화해와 조화를 꾀한다. 직접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가 제기하는 고민과 사유와 결론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다.


1979년부터 2006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에세이들을 골라 엮은 이 책에서 웬델 베리가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농업의 가치를 단순하게 생산성과 효율성과 가격으로 환원하여 건실한 소농장을 파괴하고, 화석연료 없이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고가의 기계 및 설비,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 토질을 악화시키는 단일경작, 척박해진 땅을 눈가림해 주는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공장식 대규모 농장(식물공장, 동물공장)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예속시키는 산업농업에서 벗어나 농업의 독립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산업농업의 결과는 농사의 근원을 훼손하는 대가로 얻은 식량의 잉여이다. 이것은 얼핏 산업자본주의 경제가 포장하는 대로 그 훼손의 모든 부작용을 상쇄할 만큼 현혹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먹거리가 남아돌게 되면 먹거리의 소중함은 사라진다. 먹거리는 우리 사회의 ‘가장 덜 중요한 생산물’로 낭비되고, 농업은 ‘산업 위계의 맨 밑바닥’에 고착되며, 농부는 ‘경제학자와 과학자의 진단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건실한 농업이란 무엇일까? 웬델 베리는 농업이 자연과 인간의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농장 안의 동식물이라면 가릴 것 없이 모든 생명에게 관심과 애정과 정성을 들이고 땅을 건강하게 이용할 수 있을 만큼의 소규모 가족형 농장을 지향한다. 땅을 비옥하게 보존하고 그 땅 위에서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모두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순환하며 살아가도록 농장을 돌보는 ‘살림’은, 농장의 유지와 관리보다 생산에만 집중하여 단일 농작물을 대단위로 경작하고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도 도시 사람들처럼 자기 먹거리를 사 먹는 것을 대단한 혜택으로 여기는 대규모 산업농업에서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경시되고 있지만, 농부가 자신이 키운 가축으로 직접 농사지은 농작물을 기본적인 생존 수단으로 삼는 것만큼 먹거리의 건강한 질을 담보하는 것은 없다. 생산은 농업의 목표가 아니라 성실한 농사의 결과일 뿐이다.


웬델 베리는 농법이 어떠해야 농업을 건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직접 땅을 일궈본 농부답게 세심하게 언급하고 또한 그것이 백번 지당하지만, 우리나라 농업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다소 의구심이 든다. 일단 면적으로만 따지자면 ‘100에이커(12만 평) 이하’의 농장은 미국에서는 소농장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농장이다. 그는 기계를 대표하는 트랙터보다 말 같은 가축과 옛 농기구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지만, 나는 농사꾼인 내 부모가 농기계를 하나씩 구입할 여력이 생길 때마다 더없이 반가웠다. 그렇게 겨우 100마지기 남짓의 농사를 짓는데도 평생에 걸친 노동으로 무릎이 상하고 손가락은 다 휘었다. 웬델 베리는 농부의 삶보다 이상적인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런 부모를 곁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도 그렇게 수긍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과 욕망의 절제를 감수하길 요구한다. 우리나라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들은 (거의) 자식만큼은 힘든 농사를 짓지 않길 바란다. 자신이 감당해 온 노동의 무게가 자식의 육체까지 고통스럽게 짓누르지 않도록, 농사에 쏟은 품에 비해 보잘것없는 대가로 누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누리지 못했던 욕망을 자식은 마음껏 누리며 살도록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 아닌가.


그러나 농부와 농사를 바라보는 웬델 베리의 철학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한다. 농부는 “낡아 빠졌지만 아직 버릴 수는 없는 기계 같은 존재”가 아니다. 농부는 건강한 먹거리를 건실하게 생산하는 “최고 단계의 장인”이며 “일종의 예술가”이다. 농사와 막일을 동일시하는 시각이 획기적으로 변화하지 않고서는 농업이 처한 부당한 현실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건실한 농업이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한다. 자기 먹거리가 건강하길 원한다면 자신이 먹는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가 얼마나 깨끗한 환경에서 정성스럽게 길러졌는지, 유통 과정에서 농기업과 유통업체에만 부당 이익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광고와 홍보에 현혹되어 무심결에 가공업체와 대형 마트가 통제하고 제공하는 대로 먹어온 것은 아닌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건강한 먹거리는 생산방식도, 유통 과정도, 이익의 발생도 바람직하다. 좋은 먹거리는 신체를 건강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정신까지 건강하게 해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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