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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대 1 - 봄.여름
로버트 매캐먼 지음, 김지현 옮김 / 검은숲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왜 이제야 읽었을까 하고 후회하면서도 휙휙 넘어가는 책장이 조바심쳐지고 그만큼 빠르게 줄어드는 책장이 아쉬워지는 소설이 있다. 로버트 매캐먼의 『소년시대』가 딱 그런 소설이었다. 나는 당장 읽지는 못할지라도 곧 읽을 생각인 책들을 화장대 위에 잔뜩 쌓아두는 버릇이 있다. 당연히 그중에는 생각뿐인 책들도 수두룩하고, 어떤 책은 반년이 지나도록 다른 책들 밑에 깔린 채 번번이 ‘다음에는 꼭 읽어야지’ 하고 읽을 순서가 뒤로 밀리기도 한다. 그렇게 더 이상 읽기를 미루기가 미안해졌을 때야 『소년시대』를 본격적으로 탐독했다. 아뿔싸, 재미의 무게를 직감으로 달고서 『소년시대』를 뒤로한 사이에 나는 그보다 재미없는 책들을 얼마나 읽어댔던가.
나는 로버트 매캐먼의 다른 소설도 번역되지 않았을까 허겁지겁 찾아보면서 그의 집필 이력을 눈여겨봤다. 놀랍게도 호러, 스릴러, 판타지, 미스터리, SF 등을 주로 써왔다는 매캐먼의 작가 인생에서 『소년시대』는 유독 다른 빛깔로 도드라지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그가 구축한 책장 속 세계 가운데 가장 천진하고 사랑스럽고 서정적인 세계를 그렸을 것이다.
성별에 따라 소년이든 소녀든 유년 시절은, 그 안전한 경계를 벗어나 이제 스스로를 책임지고 나 아닌 다른 누군가도 함께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라는 것을 불시에 깨닫고서 소스라치는 성인에게 마법의 네버랜드이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머물려고 버둥거려도 결국은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번 지나온 시절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법칙 앞에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시간이 째깍거리는 소리에 단호하게 등 떠밀리며 허둥지둥 삶을 꾸리다가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고 책임의 무게에 압사할 지경에 처하면, 나 대신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고 세상이 나에게 상처라도 남길세라 온몸으로 가로막아주는 누군가가 있는 유년으로 가장 먼저 숨어들고 싶어진다. 그곳은 절대적인 보호 아래 냉혹한 현실도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며 무지갯빛 미래를 꿈꾸고, 오로지 성장과 모험과 상상에만 몰두하면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그 시절에 유독 왕성해지는 호기심과 장난기 때문에 조금 위험해져도 내가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며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항상 곁에 있고, 아무리 끔찍한 상상을 하다가 잠들어 악몽을 꿔도 꿈에서 깨어나면 누군가의 손길이 내 머리를 쓸어주며 머리맡을 안전하게 지켜준다.
『소년시대』는 로버트 매캐먼이 그리운 유년 시절에 바치는 헌사이다. 매캐먼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셀마 네빌 선생님의 말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속삭인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거란다.” 어른은 없고 ‘시간의 흙이 두껍게 덧씌워진 어른의 가면 뒤에 겁에 질린 아이’가 안간힘을 써서 세상의 관습이 그 나이만큼 요구하는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지고 강요를 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 아이가 의무도, 책임도, 강요도 없이 진정한 자신으로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유년뿐이라고,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하다가 그 시절을 맥없이 흘려보내도 그토록 아름다운 마법은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렇다, 인생에서 어떤 마법이든 허용되는 시간은 유년이 유일하다. 그래서일까, 매캐먼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열두 살 소년 코리 매켄슨에게 유년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친구(데이비 레이 캘런, 벤 시어스, 조니 윌슨), 개, 자전거, 잡지 『유명한 괴수들』에 나오는 온갖 괴물들, 동시 상영 영화, 방학, 캠핑, 풋사랑, 티컴서 강바닥에 사는 전설의 거대한 물고기 올드 모세, 축제단과 트리케라톱스 같은 것들부터 자전거와 개와 선생님과 친구의 죽음까지, 심지어 주로 장르 소설을 써온 작가답게 살인 사건까지 말이다. 코리는 새벽에 우유 배달부 아빠를 도우려고 함께 나섰다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남자가 차에 갇힌 채 색슨 호수로 가라앉는 것을 목격한다. 이 사건은 내내 아빠의 꿈속을 드나들며 영혼과 육신을 갉아먹는다. 왜냐하면 그 참혹한 살인이 제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퍼는 할아버지가 평생 살아왔고, 그 아들인 아빠가 계속 살아갈 것이고, 그 아들의 아들인 코리가 자라고 있는 마을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유년을 보내는 제퍼에서 아빠는 모든 이웃들이 착하다고 생각해 왔다. 아빠를 더욱 괴롭힌 것은 자신이 선하다고 철석같이 믿어왔던 이웃들 중 한 사람이 범인이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하다고 확신했던 곳이 자신이 지켜야 할 아내와 아들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면 그보다 더한 공포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러나 매캐먼은 살인자를 추리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만 할 뿐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는 색슨 호수의 불가해한 심연을 이용해 독자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소년시대』가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소설의 통상적인 범주에 구속되지 않고 성장소설로 분류돼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물론 매캐먼은 어른인 아빠가 아니라 소년인 코리에게 살인 사건을 직시하도록 한다. 그것은 언뜻 잘 수긍되지 않는 처사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캐먼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곰곰 생각해 보면 단지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소년에게 그 역할을 맡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보다 소년이 용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더 이상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아이와, 언제나 어디에서나 무슨 짓을 해도 부모가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준다고 믿는 아이 중에 누가 더 용감할 수 있을까?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자기 자신은 물론 꼭 지키고 싶은 사람이 둘이나 늘어난 아이는 어른의 가면을 쓰고 강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지켜주지 못할까 봐, 그리하여 잃게 될까 봐 겁에 질려 있을 것이다.
사실 모든 유년이 코리만큼 흥미진진하고 짜릿하고 신비로운 사건들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유년은 훨씬 단조롭고 자잘한 일들로 연이어진다. 어쩌면 매캐먼의 실제 유년도 별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나에게는 소중하고 애틋한 추억으로 의미를 되새기게 될지라도 남에게는 무의미하여 지루하고 심드렁하여 하품만 날 뿐이다. 그렇다고 보통의 유년이 코리의 유년만큼 반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유년이라도 자신만이 아는 마법을 품고 있다. 코리는 어른의 가면 뒤에 숨겨놓은 유년의 로망이다. 매캐먼은 이제 자신과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잃어버린 마법을 몽땅 코리에게 되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