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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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니까 집에 쌓인 책 더미 사이에서 얇지만 다 읽어내기에 만만치 않은 이 프랑스 소설을 하필 먼저 집어 든 것은 진작 지나버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리뷰 이벤트’ 때문이었다. 기한 내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남긴 리뷰들 중 100명(?)을 추첨하여 상당 금액에 해당하는 책을 준다는 말에 혹했다. 설마 100명이나,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읽지는 않고 쌓아두기만 한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을 낑낑 빼냈다. 그 책이 바로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여명』이었다. 부록과 해설과 연보, 그리고 앞 부속물을 제외하면 겨우 168쪽에 불과하다. 만만해 보였다. 대학생 시절 잠깐이나마 흠뻑 빠져들었던 신경숙이 사흘 새벽에 『여명』을 읽고 “내가 써야 되는데 왜 이 사람이 썼지?”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 만만해 보였다. 그러다가 큰코다쳤다. 아무리 읽는 속도가 느려도 며칠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거의 스무 날이나 되어서야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흑심은 후회로 바뀌어버렸다.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어서 지금껏 좋았던 게 무엇이 있었던가. 아뿔싸, 푼돈에 눈멀어 까맣게 잊었다!

아무튼 이 소설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자전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부터 ‘콜레트’이다. 쉰에 접어든 작가 콜레트의 의식과 시선에 의지해 서술된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라고 말할 만큼 도드라지는 사건은 쉰 살 “나이 든 여자” 콜레트와 서른다섯 살 “젊고 잘생긴 남자” 발레르 비알, 그리고 “젊고 예쁘고 건강한 여자” 엘렌 클레망의 삼각관계가 유일하다. 그 외에는 프로방스 지방 지중해 해변에 맞닿은, 포도밭과 정원이 있는 별장에서 콜레트가 흙을 만지고 햇볕에 그을며 동물들과 교감하고 식물들을 가꾸는 일상이 줄곧 이어진다. 빗장이 걸리지 않은 대문만 지나면 곧장 펼쳐지는 해변을 거닐거나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도 한다. 굵직하고 또렷한 이야기에 길들여진 나 같은 독자가, 언뜻 차분하고 담담해 보이는 어조로 이어져 심지어 지루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그 섬세한 감성을 단번에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비알은 40여 쪽이 지나야 콜레트의 이야기 속에 겨우 등장하는데, 그마저도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비알의 등장이 대단히 인상적이지는 않아 단조로운 일상의 일부라고 오해하게 된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의 책장은 더디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명』을 처음 읽었던 스무 날과 그 앞뒤로 여러 날 동안 내 마음은 메말라 붙어 강퍅했다. 갑의 위치에서 조직의 강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약자에게는 세우는, 오로지 돈 냄새를 좇아 무엇이라도 팔 수 있는 사람들과 뒤얽혀 있어야 했다. 머릿속 한 켠에 내내 그들과의 일이 불쾌하게 맴도는 와중에, 이토록 민감하게 조응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소설을 무턱대고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책장을 목표로 삼는 오기를 부렸으니, 이렇게 잡설을 늘어놓는 감상이라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면 영영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가장 뜨거운 동시에 가장 차가운 매력을 모른 채 죽을 뻔했다. 뒤늦게 읽은 흔적이라도 남겨놓자 싶어서 다시 책장을 뒤적였는데 내가 별 감흥 없이 몰두하지 못했던 그 소설이 아닌 줄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콜레트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어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머니는 딸을 만나러 오라는 두 번째 사위의 초대에 “내가 기르는 붉은 선인장이 곧 꽃을 피울 것 같아서요”라고 거절의 편지를 보낸다. 일흔여섯의 주름마저 활짝 펴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인장 꽃의 붉은 개화를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은 어머니의 모습인 동시에 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명』을 함축하는 가장 핵심적인 상징이다. 콜레트는 자기 이야기 도중에 불현듯 죽음 너머로 돌아간 어머니에게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때론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어머니처럼 자신에게 말하기도 한다.


“아! 네가 포옹하고 있는 것은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선인장 꽃이 아니더냐? 놀랄 만큼 자랐구나. 그리고 많이 변했어! ……그런데 내 딸아, 네 얼굴을 보니 알겠구나. 너의 흥분을, 너의 기다림, 너의 헌신, 가슴 떨리는 너의 마음을…… 그리고 캄캄한 새벽에도 꾹 참고 내지 않았던 외침 소리를. 그래, 난 다 알아. 그 모든 것들을 네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단다. 그냥 그대로 있어. 감추지 마라. 너희 두 사람을, 너와 네가 포옹하는 그 사람 둘 다 편안히 내버려두렴. 왜냐하면 그는 바로, 곧 피어날 나의 선인장 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란다.”


모녀의 쌍둥이 영혼이 자꾸만 향하는 ‘선인장 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들이 포옹하고 싶은 사람, 혹은 포옹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콜레트도, 그녀의 어머니도 사랑 따위에 지쳤을 법하게 신산한 삶을 살았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1890~1914)’을 살았던 콜레트는 1893년, 스무 살에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저널리스트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여성 편력으로 이혼한다. 1912년, 잡지 편집장과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역시 그의 여성 편력으로 두 번째 이혼을 한다. 자기를 배신한 두 번째 남편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그의 아들과 연인으로 지낸다. 이 근친상간의 성격이 짙은 연애는 1925년, 그 의붓아들이 결혼할 때까지 유지된다. 바로 그해에 10년 후 세 번째이자 마지막 남편이 될 열여섯 살 연하의 모리스 구드케를 만난다. 모리스를 만나기 이전에는 작가로, 팬터마임 배우로, 뮤직홀 댄서로 벨 에포크의 파리 사교계를 화려하게 누볐던 만큼 어린 남자들과의 염문은 물론 여러 번의 동성애로도 온갖 구설수에 오르내린다. 『여명』은 두 번째 남편, 그리고 그 아들과도 헤어진 후, 모리스와 만났지만 아직 결혼은 하기 이전인 1928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그때 콜레트의 나이는 쉰다섯이었고, 모리스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콜레트의 나이 예순둘, 모리스의 나이 마흔여섯에 결혼했다. 콜레트는 여든하나에 돌아갔다.

『여명』에서 콜레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젊은 남자 비알을 제 나이에 어울릴 법한 젊은 여자 엘렌에게 돌려보내려고 애쓴다. 아니 그런 척한다. 남자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이젠 사랑 따위에 냉담해진 척, 무심해진 척, 급기야 이미 사랑의 속성까지 속속들이 간파해서 초탈한 척한다. 더 이상은 “그놈의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다가 죽고 싶은” 것이 진심인 것처럼, 비알에게서는 “마음의 떨림”, “손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 “(사랑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를 향해 아무런 “욕망”이 일지 않아 안타까운 것처럼 그와의 사이에서 ‘우정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환기하지만 사실 거짓말이다.

콜레트는 비알과 아무 사이도 아닌 듯 행동하려 하지만, 엘렌은 “하필 당신이 비알을 옹호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라고 자기 사랑을 가로막는 연적으로 콜레트를 콕 짚고, 콜레트의 별장 앞 해변에서 함께 해수욕을 즐기던 친구와 이웃들도 비알이 콜레트와 단둘이 남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콜레트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암고양이의 미소를 통해 비알이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이후, 콜레트는 비알에게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절로 신경 쓰인다. 젊은 비알이 나이 든 자신에게 “부인”이라고 부르자,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지극히 당연한 그 호칭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나를 콜레트라고 불렀잖아!” 또 콜레트는 비알과의 나이 차이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토록 자주 나이를 상기할 여지도 없어야 한다. 비알이 자기 가슴팍에 놓인 그녀의 손을 바라보자 콜레트는 “부끄럽지 않”아도 “내 나이를 말해 주는 손”, “내 나이보다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사위어가는 그녀의 육체와 대조적으로 한창 무르익은 엘렌의 육체(“어깨와 팔꿈치 사이에 아직 군살이 붙지 않은 불그스레하고 예쁜 팔”)도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콜레트의 별장에서 콜레트와 비알이 처음으로 함께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맞이한 날, 비알은 예정대로 사업차 프로방스를 떠난다. 그리고 예정보다 오래 돌아오지 않는다. 콜레트가 알지 못하는 비알의 소식을 엘렌이 과시하듯이 콜레트에게 전한다. 그것은 그날 밤사이 콜레트가 비알을 엘렌에게 돌려보내려고 애쓴 결과일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초연한 듯 행동한 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면 콜레트는 그 일을 반겨야 한다. 하지만 콜레트는 비알에 대해 묘하게 자신감을 보인다. “부인, 비알이…… 비알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거예요.” “비알 근처에 당신만 없다면 나는 자신 있어요.” 이 말들은 엘렌의 말이 아니다. 침묵 속에 엘렌이 차마 하지 못한 말,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면 엘렌이 했을 법한 말이라고 콜레트가 생각한 말이다. 콜레트는 엘렌에게 보내놓고도 비알을 기다린다. 콜레트는 단 한순간도 비알을 보내지 않았다. 너무나 모순적이지만, 그 이성적인 모순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의 얄궂은 감정을 온전히 교감하게 된다. 모순적인 감정이 만 갈래로 엇갈리는 사랑 앞에 애끓어보지 않은 사람, 그 사랑에 배신당해 본 적 없는 사람, 질투로 괴로워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 우리와 콜레트에게서는 모두 같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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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다니엘 포르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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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첫인상을 가장 크게 결정짓는 것은 아마 제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책을 보며 했다. 죽음의 대명사이기도 한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의 그림―한 남자가 등에 칼이 꽂혀 있는 그림이 원래의 표지 같지만 국내판도 크게 나쁘진 않아 보인다―과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라는 제목은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제목처럼 한 페이지마다 죽음에 관한 것이 등장한다니 그야말로 죽음으로 가득한 책일 터,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스릴러나 공포물이 아닌 ‘블랙코미디에 대한 순수한 오마주’라는 이 책이 독자에게 어떤 죽음을 선사해 줄 것인가?

애인에게 실패한 인간이며 겨드랑이나 씻으라는 등 비참한 말로 이별을 통보받은 주인공은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오지만 그가 목격한 것은 담벼락을 들이받고 운전자가 튕겨져 나와 죽어버린 교통사고였다. 경찰서에서 진술을 마치고 온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헤어진 여자의 다른 남자친구였다. 그는 살인범으로 의심을 받지만 꿋꿋하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서는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 않은가? 전쟁, 질병, 사건, 사고 등 하루하루가 죽음의 연속이다. 소설이 아닌 실제의 삶이 그렇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가 아니라 ‘순간순간이 죽음 하나’다. 실제의 죽음뿐 아니라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관념적인 죽음―그레이트풀 데드 같은 밴드의 이름이나 전구가 나가는 것도 죽음이다―까지 더한다면 죽음은 사는 것만큼 익숙해진다. 실제로 이 책은 피가 난자하거나 시체가 즐비한 스릴러가 아니라 이름이나 직업, 나이조차 뚜렷하지 않은 어떤 한 남자의 이야기일 뿐이다. 실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려 하지만 그와 관계된 누군가는, 혹은 무엇인가는 항상 죽어가고 그는 그 죽음에 엮여 늘 일이 풀리지 않는다. 그의 삶이 죽음과 더불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저자의 경력답게 책의 느낌 자체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게 경쾌하다. 다만 그 경쾌함이 블랙코미디로서의 씁쓸함을 덮고 있는 경쾌함이 아닌 톡톡 튀는 광고의 느낌뿐이라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어쩌면 책 띠지의 ‘블랙코미디에 대한 순수한 오마주’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에 대한 순수한 패러디’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가득한 책이지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책이다. 책의 분위기 결말까지도 역시 블랙이 아닌 밝음에 더 가깝다. 말미에는 책에 등장한 죽음의 목록이 나오는데 돌연사로 시작해 소설로 끝나는 목록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롭다. 다만 옮긴이의 말처럼 번역의 과정을 거치며 한 페이지가 아닌 거의 한 페이지에 죽음이 등장하게 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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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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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면 프랑스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인기 있는 작가라는 수식어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자주 들르거나 CF에도 출연하고 그의 근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국인 캐릭터 등을 보아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인기가 우리나라에서 많다는 점은 확실할 것이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부분에서는 꼭 보았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우연찮게도 이 작가의 작품을 이것저것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최고의 히트작 『개미』 이외에는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읽은 『파피용』은 다시는 이 작가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마음이 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파피용』에서 보여줬던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뻔할 정도로 빈곤―성경이 모티프가 된 이야기는 물론 많긴 하지만 노아의 방주를 우주로 날린다는 이처럼 노골적으로 이름만 바꾼 이야기가 있던가―했고 이야기의 전개 과정 또한 보기 민망할 수준이었다. 이러던 차에 이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을 읽을 기회가 생겼으니 이 또한 작가와의 인연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은 과거에 출간되었던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 확장판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이른바 자기 해석식 백과사전류의 책이다. 예전을 잘 기억하는 독자라면 우리나라에도 이런 책이 한창 유행했던 때가 있었던 것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이 책 역시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것들을 베르나르식으로 해석한 백과사전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베르나르가 열네 살 때부터 기록해 왔다는 비밀노트를 책으로 묶어낸 것인데 베르나르 상상력의 근간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30년 동안의 그의 기록들―스스로 떠올린 영감들,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들, 발상과 관점을 뒤집게 하는 사건들, 생각을 요구하는 수수께끼와 미스터리,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해석 등이 두꺼운 책에 빼곡히 실려 있다. 이 책도 물론 백과사전이기도 하므로 꼭 첫 페이지부터 읽어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시간 날 때마다 아무  곳이나 펼쳐 보는 것도 이 책을 즐기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이었지만 실망했던 소설과 달리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전작이기도 한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그의 소설에서도 인용되는 재미있는 설정을 가진 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과사전이라기에는 빈약한 외양도 확장되어 두툼하고 풍성해져 이제 진정한 백과사전처럼 거듭나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국내판의 제목을 ‘Nouvelle encyclopedie du savoir relatif et absolu’인 원제를 왜 바꾸었는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작가의 이름이 가장 중요한 세일즈 포인트였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전작의 제목이 이 책에는 딱 어울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이라는 빈곤한 상상력의 제목은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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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들 - 세계 최고의 독서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말하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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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알베르토 망구엘은 단연 독서계에서 최고의 고수이다. 개인적인 인연과 추억에 기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후광이 굳이 없더라도 말이다. 어떤 책이든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읽을 권리가 있고 그 독서에 정답이나 모범 답안 따위는 없지만, ‘무엇’을 ‘얼마나’ 읽어내느냐에 대한 차이가 여전히 남는다. 『책 읽는 사람들』에서 망구엘이 인용하고 내가 재인용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말이다. “해석의 한계는 상식의 한계와 일치한다.” 망구엘에 의하면, 읽는다는 행위는 “텍스트의 재구성”. 즉 작가의 경험과 인식을 토대로 창조된 언어의 세계, 곧 책을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인식에 비추어 자기 언어로 재해석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사사키 아타루가 궁극의 읽기란 자신의 ‘본능적인 검열’ 없이 책을 통해 작가의 무의식에까지 완전하게 접속하는 경지라고 열렬하게 말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떤 책을 읽는 순간의 오늘까지 독자가 경험하고 인식해 온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것에 자동적으로 기대게 되는 해석 자체가 ‘본능적인 검열’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망구엘은 사사키 아타루처럼 ‘접서(接書)’의 경지에 도달하려 하지 않지만,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또 다른 책으로 무한히 증식하는 ‘정신의 도서관’을 구축한다.


“정신의 도서관에서는 물리적인 실체를 갖지 않은 책들도 끊임없이 책꽂이에 끼어들 수 있다. 과거에 읽었지만 지금은 불완전하게만 기억하는 책들이 뒤섞인 책들, 다른 책들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해석하고 해설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는 책들, 꿈이나 악몽을 꾸는 중에 쓰여서 이제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책들, 우리가 알기에는 분명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쓰인 적이 없는 책들, 말로 다할 수 없는 경험이 담긴 자전적인 책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이 담긴 책들, 과거에는 분명했지만 지금은 잊힌 진실이 담긴 책들, 너무나 고상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생각이 담긴 책들이 정신의 도서관을 채운다. 세계 각국에서 지금까지 발간된 『돈키호테』의 모든 판본은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 실제로 마드리드의 세르반테스 문화원에는 모든 판본이 수집되어 있다. 그러나 나만의 『돈키호테』들, 즉 내가 지금까지 읽고 또 읽으면서 창작해 낸 『돈키호테』들, 결국 내 기억이 꾸며내고 내 망각이 편집한 『돈키호테』들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정신의 도서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책 읽는 사람들』에는 그 ‘정신의 도서관’이 구현되어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등이 망구엘의 정신 속에서 그가 그 책들을 읽을 때마다 그의 해석을 덧붙여 또 하나의 독립적인 새 책으로 분화한다. 같은 사람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차이만큼 경험이 누적되고 인식이 변화하여 새로운 시선으로 같은 책을 이전과는 다르게 읽어낸다. 또 한 권의 책, 추가요! 또한 망구엘이 쓴 『책 읽는 사람들』은 물론 그가 읽고 다시 쓴 책들에 대해, 각각 내 사고의 한계 내에서 내가 받아들인 해석이 더해진 책들도 무더기로 쌓인다. 물질의 책을 읽는 동시에 정신의 책이 쓰인다는 생각은 아주 재미있다. 이것은 마치 수많은 거울들이 하나의 책을 끊임없이 반사하여 무수한 책들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아마도 이 모든 책들이 무한히 꽂혀 있는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창조물, 한계 없는 ‘바벨의 도서관’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아마도 ‘정신의 도서관’은 망구엘이 자기 거울로 되비춘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일지 모른다.

『책 읽는 사람들』은 그동안 망구엘이 여러 매체들에 단편적으로 기고했던 글들을 한데 엮은 책이다. 그런데도 각각의 글들이 얼기설기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망구엘이 8개의 부(部)마다, 그 아래에 포함되어 있는 각각의 글들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문장을 일관되게 제사(題詞)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지, 과연 내가 ‘앨리스’를 읽은 적이나 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물론 루이스 캐럴이 원래 예쁜 꼬마 친구인 어린 소녀 앨리스 리델에게 들려준 이야기이지만, 동화라고 하기에는 이야기 곳곳에 복잡하고 난해하게 장치된 은유와 상징과 수수께끼 덕분에 어른이라도 온전히 이해하며 읽어내려면 풍부한 주석의 도움을 받아야 하긴 하다. 루이스 캐럴 이후로 많은 예술가들이 ‘앨리스’에게 영감을 받아왔어도,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남녀 주인공이 테마북 ‘앨리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 마음을 확인하긴 했어도, 나는 사실 많은 부분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줄거리만 좇기에 빠듯했다. 그런데 망구엘이 자기 이야기를 여는 열쇠말로 빌려온 ‘앨리스’의 문장들은 그 함의까지 선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 숨겨놓은 의미가 아니라 독자인 망구엘이 자기 언어로 읽어낸 의미, 즉 새로운 ‘앨리스’들이다.

이처럼 망구엘이 ‘독자와 읽기와 책’을 주제로 한 권의 책을 얼마나 다채롭게 읽어내는지는 비단 ‘앨리스’에 그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망구엘에게 “글 읽기는 배웠지만 책은 읽지 않는” 소년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도덕을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문자 체계를 연습하는 일”을 통해 지배층의 시선에서 “사회적인 규범에 순응하는 이상적인 시민의 축소판”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카를로 콜로디는 당대의 고리타분한 어른으로 피노키오의 모험을 통해 거짓말 안 하고 말썽 안 부리고 어른의 말에 순종하며 어른의 꼭두각시처럼 학교에 착하게 잘 다녀야 행복해진다는 권선징악의 표면적인 교훈을 전하려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구엘은 피노키오에게서 콜로디의 한계에 갇힌 비극적인 꼭두각시를 읽는다. 피노키오가 읽지 못한 책을 망구엘은 읽었던 것이다.

꽤 오래전에 여기까지 쓰고 말았다. 한동안 잠시도 고요한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2월 19일도 정신없이 지나갔고, 내 투표권 행사와 상관없이 독재자의 딸이 인권변호사를 이기는 이변이 일어났다! 너무나 자명한 아버지의 독재를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지 않아도 그 딸을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한 결과였겠지만, 나와 내 지인들이 이루는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너도나도 다 떠나려는 해외여행에도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서는 이런 나라에서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민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책 읽는 사람들』에는 책과 독서를 둘러싼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서, 문득 망구엘이 아르헨티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쓰여 있는 페이지가 떠올랐다. 대략 ‘사람들은 나에게 왜 아르헨티나를 떠났느냐고 묻곤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제 와서 아무리 책장을 뒤적여도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다. 그 페이지는 내 기억의 편집으로 내 정신의 도서관에만 꽂혀 있을까. 아무튼 대신 다른 페이지들에 띄엄띄엄, 그리고 불쑥 언급되는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었다.

망구엘은 군부독재가 득세할 즈음 1969년에 아르헨티나를 떠났다. 1969년은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 체제하에서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3선개헌이 날치기로 통과됐고,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가열된 해이다. 그때 망구엘은 스물한 살이었고,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며, 엄마와 아빠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이었다. 망구엘은 처음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수개월을 보냈지만 따분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강의는 지루하기만 했고” “『오디세이아』 초기 판본의 원문에 관련된 문제를 매가리 없이 강의하는 교수의 목소리를 몇 시간씩 듣고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유럽으로 떠났다. 앞뒤 정황 없이 이 이야기만으로는 망구엘이 아르헨티나를 떠난 이유가 그리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왜 대학의 문학 강의가 ‘매가리 없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었을까? “걸핏하면 쿠데타로 정권과 대통령이 수시로 바뀌고 대로에 탱크가 일상적으로 굴러다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피노키오에게 “상식적이고 착하게 행동하라”고 순종을 강요하는 학교처럼, 아무리 위대한 문학작품이라도 그들이 통제와 착취를 위해 주입하고자 하는 매뉴얼대로만 읽을 것을 강제한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저항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허용될 여지가 없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마음대로 마음껏 읽을 권리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망구엘로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억압한 것은 망구엘의 본능이었을 테니까.

망구엘은 독서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지 않았다. 망구엘이 고백하길 비겁자의 선택이었다. “군부독재를 묵인하며 사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도 “총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망구엘은 유럽으로 떠나오기 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스물한 해 동안 사고 읽은 책들을 모두 남겨두었다. 만약 그가 아르헨티나에 남았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의심스럽게 보이는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체제 전복자로 기소당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됐을지 모른다. 이렇게 책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책을 감추고 불살라야 하는 광경은 참 익숙하다.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이 등장하는 예전 TV드라마에서 경찰 등이 자취방에 난입해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책이었다. 읽기의 매뉴얼을 강요하는 자들이 이럴 때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폭력적인 권력 남용을 합리화했다. 18대 대선에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독재자가 조작하여 국가가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국민 여덟 사람을 살해한 인혁당 사건이 다시금 불거졌다. 그 무고한 여덟 목숨 가운데 한 사람인 우홍선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회사에 출근했다가 느닷없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그날 남편을 직장에 보낸 후 아내가 라디오를 들으면서 쉬고 있던 집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짓밟았다.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구석구석을 뒤지던 그들은 “이 집에는 책도 없네”라고 “중얼거렸다”. (“중얼거렸다”는 2012년 9월 14일 『경향신문』 이효상 기자의 기사에 나오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어투가 그저 중얼거리는 어투이기만 했을까? 아마도 누명을 뒤집어씌우기 딱 좋은 책 말고 다른 것을 번거롭게 찾아야 한다는 사나운 낭패감이 배어 있지 않았을까. ‘재수 없게 이놈의 집구석에는 책도 없잖아!’ 정도로. 과민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책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얼마 전에 새로 산 ‘라디오’였다. 아내가 한가롭게 즐겨 듣던 그 라디오는 “남편이 북한 방송을 듣기 위해 산 것”으로 법정에 제출되어 남편의 사형 판결을 위한 증거로 둔갑했다.

망구엘이 떠난 아르헨티나에 그대로 남은 그의 친구들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주유소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사라졌다. 그의 싸늘한 시체가 우편 행낭으로 집 현관 계단 앞에 배달됐지만 심하게 난도질당해 처음에는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학생자치위원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그녀는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납치당했다. 그녀가 구금됐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군부가 관리하던 강제수용소 중 하나인 엘 캄피토에서, 그녀가 신체검사를 받으려고 두건을 벗었던 잠깐의 순간에 그녀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군부에서는 나중에라도 수감자들이 고문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감자들에게 두건을 씌우는 게 관례였다.”
“엘 캄피토에 수감된 사람들 중 적어도 2천 명 이상이 군인들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그들에게는 파나노발이라는 강한 약물이 주입됐다. 수초 만에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심장발작 같은 증상을 유발하는 약물이었다(그 주사를 맞은 수감자는 살아 있지만 의식을 잃었다). 주사를 맞은 수감자들은 바다에 던져졌다. 등록되지 않은 유령 비행기들로 아주 낮은 고도로 비행했다. 비행기를 뒤쫓아오는 상어 같은 아주 큰 물고기가 육안으로 보이기도 했다. 조종사들은 상어들이 인간을 먹어 살이 쪘다고 말하곤 했다.”


독재자의 딸은 아버지의 독재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되었다. 2012년 9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하여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답을 한번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2007년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최종 무죄로 판결했을 때 그녀의 인터뷰를 되풀이한 것이다. “법원에서 정반대의 두 가지 판결을 내렸다. 역사적 진실은 한 가지밖에 없으니 역사가 밝혀주기를 바란다.” 이 말에 대한 여파가 사그라지지 않자 딸은 사과의 형식을 가장한 기자회견을 했다. “보릿고개”와 “북한에 맞선 안보”를 이야기하면서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고, “반드시 국민을 잘살게 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목표와 고뇌”로 (독재의) “비난과 비판”을 감수했다고 아버지를 옹호했다. 미안하긴 한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듯이. 그 끔찍한 인혁당 조작 사건이 어째서 “북한에 맞선 안보”로 이어지는가? 게다가 “자녀가 부모를 평가한다는 것, 더구나 공개적으로 과오를 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우리나라 풍토를 끄집어낸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살인을 옹호하고 미화하는 것이 자식의 역할인가? 이에 분노하는 것은 그녀가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의 독재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여 올바르게 과거를 청산하지 않는 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에서 안존하는 딸에게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과거가 고스란히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엄습한다. 완전히 용두사미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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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정원
리앙 지음, 김양수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타이완(대만)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른바 국공 내전(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내전)에서 중국 국민당이 패배 후 타이완 섬으로 이주해 세운 국가로 중국과는 여전히 분쟁 중이라는 것,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 우리와는 여러 분야에서 경쟁 관계이며 예전에 뉴스에서 간혹 들렸던 자유중국이라는 단어는 중국과의 수교 이후 사라졌다는 것 정도가 타이완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일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경우 친일 국가, 우리를 질투하는 국가 등등 좋지만은 않은 이미지로 박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로 타이완은 역사적이나 경제적으로도 우리와 닮은 점이 무수히 많다. 역사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 공산당과의 내전 후 독재를 했던 점도 그러하고 경제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도 그렇다. 친일이 득세한다는 것도 비슷하려나? 리앙의 『미로의 정원』은 1950년대 국민당 독재 시절과 1970년대 고도 성장기 타이완의 모습에, 주잉홍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아버지 주주옌, 그리고 젊은 부동산 재벌 린시겅과의 관계를 시공간을 넘나드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정치적, 경제적 격동기를 보낸 타이완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그려냈다.

주잉홍은 함원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아버지 주주옌은 사상범으로 함원에 틀어박혀 카메라를 사고 함원의 사진을 찍고 자동차를 사들이는 게 유일한 낙이 되었다. 아버지는 죽고 함원은 주잉홍에게 남겨졌다. 이후 부유한 부동산 개발업자인 린시겅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린시겅은 유부남에 소문도 좋지 않았지만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린시겅에게 두 번이나 버림을 받게 된다. 그녀는 돌아올 곳이 함원밖에는 없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정원(함원, 迷園)은 이 소설의 전부를 함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주옌이 국민당에 대한 반발로 칩거하고 주잉홍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주주옌은 함원을 가꾸며 중국과는 맞지 않는 식물을 뽑아버리고 타이완의 기후에 맞는 나무를 심으며 주체를 강조했고 주잉홍에게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주잉홍 역시 버림받고 돌아와 상처를 어루만진 곳이기도 하지만 중국식의 건축물에 아열대 나무가 자라는 미로와 같은 복잡한 이곳은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곳이기도 하며, 이는 결국 타이완 현대사의 단면 같은 장소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주주옌은 국민당에 대한 반발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딸인 주잉홍을 아야코라고 부르며 이를 정제성을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주잉홍이 반했던 린시겅은 부동산 재벌로 술과 성(性)이 뒤섞인 비즈니스 접대문화로 이루어진 타이완 경제성장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타이완의 정치와 경제의 역사를 지운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이 숨어 있다고 하지만, 이 책은 타이완의 역사를 빼면 그저 그런 통속소설이 될 뿐이다. 타이완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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