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그러니까 집에 쌓인 책 더미 사이에서 얇지만 다 읽어내기에 만만치 않은 이 프랑스 소설을 하필 먼저 집어 든 것은 진작 지나버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리뷰 이벤트’ 때문이었다. 기한 내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남긴 리뷰들 중 100명(?)을 추첨하여 상당 금액에 해당하는 책을 준다는 말에 혹했다. 설마 100명이나,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읽지는 않고 쌓아두기만 한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을 낑낑 빼냈다. 그 책이 바로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여명』이었다. 부록과 해설과 연보, 그리고 앞 부속물을 제외하면 겨우 168쪽에 불과하다. 만만해 보였다. 대학생 시절 잠깐이나마 흠뻑 빠져들었던 신경숙이 사흘 새벽에 『여명』을 읽고 “내가 써야 되는데 왜 이 사람이 썼지?”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 만만해 보였다. 그러다가 큰코다쳤다. 아무리 읽는 속도가 느려도 며칠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거의 스무 날이나 되어서야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흑심은 후회로 바뀌어버렸다.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어서 지금껏 좋았던 게 무엇이 있었던가. 아뿔싸, 푼돈에 눈멀어 까맣게 잊었다!

아무튼 이 소설은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자전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부터 ‘콜레트’이다. 쉰에 접어든 작가 콜레트의 의식과 시선에 의지해 서술된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라고 말할 만큼 도드라지는 사건은 쉰 살 “나이 든 여자” 콜레트와 서른다섯 살 “젊고 잘생긴 남자” 발레르 비알, 그리고 “젊고 예쁘고 건강한 여자” 엘렌 클레망의 삼각관계가 유일하다. 그 외에는 프로방스 지방 지중해 해변에 맞닿은, 포도밭과 정원이 있는 별장에서 콜레트가 흙을 만지고 햇볕에 그을며 동물들과 교감하고 식물들을 가꾸는 일상이 줄곧 이어진다. 빗장이 걸리지 않은 대문만 지나면 곧장 펼쳐지는 해변을 거닐거나 바다에서 수영을 하기도 한다. 굵직하고 또렷한 이야기에 길들여진 나 같은 독자가, 언뜻 차분하고 담담해 보이는 어조로 이어져 심지어 지루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그 섬세한 감성을 단번에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비알은 40여 쪽이 지나야 콜레트의 이야기 속에 겨우 등장하는데, 그마저도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비알의 등장이 대단히 인상적이지는 않아 단조로운 일상의 일부라고 오해하게 된다.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의 책장은 더디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명』을 처음 읽었던 스무 날과 그 앞뒤로 여러 날 동안 내 마음은 메말라 붙어 강퍅했다. 갑의 위치에서 조직의 강자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약자에게는 세우는, 오로지 돈 냄새를 좇아 무엇이라도 팔 수 있는 사람들과 뒤얽혀 있어야 했다. 머릿속 한 켠에 내내 그들과의 일이 불쾌하게 맴도는 와중에, 이토록 민감하게 조응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소설을 무턱대고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책장을 목표로 삼는 오기를 부렸으니, 이렇게 잡설을 늘어놓는 감상이라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면 영영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의 가장 뜨거운 동시에 가장 차가운 매력을 모른 채 죽을 뻔했다. 뒤늦게 읽은 흔적이라도 남겨놓자 싶어서 다시 책장을 뒤적였는데 내가 별 감흥 없이 몰두하지 못했던 그 소설이 아닌 줄 알았다. 나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콜레트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어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머니는 딸을 만나러 오라는 두 번째 사위의 초대에 “내가 기르는 붉은 선인장이 곧 꽃을 피울 것 같아서요”라고 거절의 편지를 보낸다. 일흔여섯의 주름마저 활짝 펴고 떨리는 마음으로 선인장 꽃의 붉은 개화를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은 어머니의 모습인 동시에 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명』을 함축하는 가장 핵심적인 상징이다. 콜레트는 자기 이야기 도중에 불현듯 죽음 너머로 돌아간 어머니에게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때론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어머니처럼 자신에게 말하기도 한다.


“아! 네가 포옹하고 있는 것은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선인장 꽃이 아니더냐? 놀랄 만큼 자랐구나. 그리고 많이 변했어! ……그런데 내 딸아, 네 얼굴을 보니 알겠구나. 너의 흥분을, 너의 기다림, 너의 헌신, 가슴 떨리는 너의 마음을…… 그리고 캄캄한 새벽에도 꾹 참고 내지 않았던 외침 소리를. 그래, 난 다 알아. 그 모든 것들을 네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단다. 그냥 그대로 있어. 감추지 마라. 너희 두 사람을, 너와 네가 포옹하는 그 사람 둘 다 편안히 내버려두렴. 왜냐하면 그는 바로, 곧 피어날 나의 선인장 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란다.”


모녀의 쌍둥이 영혼이 자꾸만 향하는 ‘선인장 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들이 포옹하고 싶은 사람, 혹은 포옹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콜레트도, 그녀의 어머니도 사랑 따위에 지쳤을 법하게 신산한 삶을 살았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1890~1914)’을 살았던 콜레트는 1893년, 스무 살에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저널리스트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여성 편력으로 이혼한다. 1912년, 잡지 편집장과 두 번째 결혼을 하지만 역시 그의 여성 편력으로 두 번째 이혼을 한다. 자기를 배신한 두 번째 남편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그의 아들과 연인으로 지낸다. 이 근친상간의 성격이 짙은 연애는 1925년, 그 의붓아들이 결혼할 때까지 유지된다. 바로 그해에 10년 후 세 번째이자 마지막 남편이 될 열여섯 살 연하의 모리스 구드케를 만난다. 모리스를 만나기 이전에는 작가로, 팬터마임 배우로, 뮤직홀 댄서로 벨 에포크의 파리 사교계를 화려하게 누볐던 만큼 어린 남자들과의 염문은 물론 여러 번의 동성애로도 온갖 구설수에 오르내린다. 『여명』은 두 번째 남편, 그리고 그 아들과도 헤어진 후, 모리스와 만났지만 아직 결혼은 하기 이전인 1928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그때 콜레트의 나이는 쉰다섯이었고, 모리스의 나이는 서른아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콜레트의 나이 예순둘, 모리스의 나이 마흔여섯에 결혼했다. 콜레트는 여든하나에 돌아갔다.

『여명』에서 콜레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젊은 남자 비알을 제 나이에 어울릴 법한 젊은 여자 엘렌에게 돌려보내려고 애쓴다. 아니 그런 척한다. 남자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어서 이젠 사랑 따위에 냉담해진 척, 무심해진 척, 급기야 이미 사랑의 속성까지 속속들이 간파해서 초탈한 척한다. 더 이상은 “그놈의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다가 죽고 싶은” 것이 진심인 것처럼, 비알에게서는 “마음의 떨림”, “손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 “(사랑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를 향해 아무런 “욕망”이 일지 않아 안타까운 것처럼 그와의 사이에서 ‘우정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환기하지만 사실 거짓말이다.

콜레트는 비알과 아무 사이도 아닌 듯 행동하려 하지만, 엘렌은 “하필 당신이 비알을 옹호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라고 자기 사랑을 가로막는 연적으로 콜레트를 콕 짚고, 콜레트의 별장 앞 해변에서 함께 해수욕을 즐기던 친구와 이웃들도 비알이 콜레트와 단둘이 남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콜레트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암고양이의 미소를 통해 비알이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이후, 콜레트는 비알에게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절로 신경 쓰인다. 젊은 비알이 나이 든 자신에게 “부인”이라고 부르자,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지극히 당연한 그 호칭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나를 콜레트라고 불렀잖아!” 또 콜레트는 비알과의 나이 차이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그토록 자주 나이를 상기할 여지도 없어야 한다. 비알이 자기 가슴팍에 놓인 그녀의 손을 바라보자 콜레트는 “부끄럽지 않”아도 “내 나이를 말해 주는 손”, “내 나이보다 몇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사위어가는 그녀의 육체와 대조적으로 한창 무르익은 엘렌의 육체(“어깨와 팔꿈치 사이에 아직 군살이 붙지 않은 불그스레하고 예쁜 팔”)도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콜레트의 별장에서 콜레트와 비알이 처음으로 함께 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맞이한 날, 비알은 예정대로 사업차 프로방스를 떠난다. 그리고 예정보다 오래 돌아오지 않는다. 콜레트가 알지 못하는 비알의 소식을 엘렌이 과시하듯이 콜레트에게 전한다. 그것은 그날 밤사이 콜레트가 비알을 엘렌에게 돌려보내려고 애쓴 결과일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초연한 듯 행동한 것이 그녀의 진심이었다면 콜레트는 그 일을 반겨야 한다. 하지만 콜레트는 비알에 대해 묘하게 자신감을 보인다. “부인, 비알이…… 비알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거예요.” “비알 근처에 당신만 없다면 나는 자신 있어요.” 이 말들은 엘렌의 말이 아니다. 침묵 속에 엘렌이 차마 하지 못한 말,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면 엘렌이 했을 법한 말이라고 콜레트가 생각한 말이다. 콜레트는 엘렌에게 보내놓고도 비알을 기다린다. 콜레트는 단 한순간도 비알을 보내지 않았다. 너무나 모순적이지만, 그 이성적인 모순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의 얄궂은 감정을 온전히 교감하게 된다. 모순적인 감정이 만 갈래로 엇갈리는 사랑 앞에 애끓어보지 않은 사람, 그 사랑에 배신당해 본 적 없는 사람, 질투로 괴로워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 우리와 콜레트에게서는 모두 같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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