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사람들 - 세계 최고의 독서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말하다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알베르토 망구엘은 단연 독서계에서 최고의 고수이다. 개인적인 인연과 추억에 기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후광이 굳이 없더라도 말이다. 어떤 책이든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읽을 권리가 있고 그 독서에 정답이나 모범 답안 따위는 없지만, ‘무엇’을 ‘얼마나’ 읽어내느냐에 대한 차이가 여전히 남는다. 『책 읽는 사람들』에서 망구엘이 인용하고 내가 재인용하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말이다. “해석의 한계는 상식의 한계와 일치한다.” 망구엘에 의하면, 읽는다는 행위는 “텍스트의 재구성”. 즉 작가의 경험과 인식을 토대로 창조된 언어의 세계, 곧 책을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인식에 비추어 자기 언어로 재해석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사사키 아타루가 궁극의 읽기란 자신의 ‘본능적인 검열’ 없이 책을 통해 작가의 무의식에까지 완전하게 접속하는 경지라고 열렬하게 말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어떤 책을 읽는 순간의 오늘까지 독자가 경험하고 인식해 온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것에 자동적으로 기대게 되는 해석 자체가 ‘본능적인 검열’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망구엘은 사사키 아타루처럼 ‘접서(接書)’의 경지에 도달하려 하지 않지만,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또 다른 책으로 무한히 증식하는 ‘정신의 도서관’을 구축한다.


“정신의 도서관에서는 물리적인 실체를 갖지 않은 책들도 끊임없이 책꽂이에 끼어들 수 있다. 과거에 읽었지만 지금은 불완전하게만 기억하는 책들이 뒤섞인 책들, 다른 책들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해석하고 해설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는 책들, 꿈이나 악몽을 꾸는 중에 쓰여서 이제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책들, 우리가 알기에는 분명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쓰인 적이 없는 책들, 말로 다할 수 없는 경험이 담긴 자전적인 책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이 담긴 책들, 과거에는 분명했지만 지금은 잊힌 진실이 담긴 책들, 너무나 고상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생각이 담긴 책들이 정신의 도서관을 채운다. 세계 각국에서 지금까지 발간된 『돈키호테』의 모든 판본은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 실제로 마드리드의 세르반테스 문화원에는 모든 판본이 수집되어 있다. 그러나 나만의 『돈키호테』들, 즉 내가 지금까지 읽고 또 읽으면서 창작해 낸 『돈키호테』들, 결국 내 기억이 꾸며내고 내 망각이 편집한 『돈키호테』들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정신의 도서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책 읽는 사람들』에는 그 ‘정신의 도서관’이 구현되어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등이 망구엘의 정신 속에서 그가 그 책들을 읽을 때마다 그의 해석을 덧붙여 또 하나의 독립적인 새 책으로 분화한다. 같은 사람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어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의 차이만큼 경험이 누적되고 인식이 변화하여 새로운 시선으로 같은 책을 이전과는 다르게 읽어낸다. 또 한 권의 책, 추가요! 또한 망구엘이 쓴 『책 읽는 사람들』은 물론 그가 읽고 다시 쓴 책들에 대해, 각각 내 사고의 한계 내에서 내가 받아들인 해석이 더해진 책들도 무더기로 쌓인다. 물질의 책을 읽는 동시에 정신의 책이 쓰인다는 생각은 아주 재미있다. 이것은 마치 수많은 거울들이 하나의 책을 끊임없이 반사하여 무수한 책들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아마도 이 모든 책들이 무한히 꽂혀 있는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창조물, 한계 없는 ‘바벨의 도서관’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아마도 ‘정신의 도서관’은 망구엘이 자기 거울로 되비춘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일지 모른다.

『책 읽는 사람들』은 그동안 망구엘이 여러 매체들에 단편적으로 기고했던 글들을 한데 엮은 책이다. 그런데도 각각의 글들이 얼기설기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망구엘이 8개의 부(部)마다, 그 아래에 포함되어 있는 각각의 글들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문장을 일관되게 제사(題詞)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지, 과연 내가 ‘앨리스’를 읽은 적이나 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물론 루이스 캐럴이 원래 예쁜 꼬마 친구인 어린 소녀 앨리스 리델에게 들려준 이야기이지만, 동화라고 하기에는 이야기 곳곳에 복잡하고 난해하게 장치된 은유와 상징과 수수께끼 덕분에 어른이라도 온전히 이해하며 읽어내려면 풍부한 주석의 도움을 받아야 하긴 하다. 루이스 캐럴 이후로 많은 예술가들이 ‘앨리스’에게 영감을 받아왔어도,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남녀 주인공이 테마북 ‘앨리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 마음을 확인하긴 했어도, 나는 사실 많은 부분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줄거리만 좇기에 빠듯했다. 그런데 망구엘이 자기 이야기를 여는 열쇠말로 빌려온 ‘앨리스’의 문장들은 그 함의까지 선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 숨겨놓은 의미가 아니라 독자인 망구엘이 자기 언어로 읽어낸 의미, 즉 새로운 ‘앨리스’들이다.

이처럼 망구엘이 ‘독자와 읽기와 책’을 주제로 한 권의 책을 얼마나 다채롭게 읽어내는지는 비단 ‘앨리스’에 그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망구엘에게 “글 읽기는 배웠지만 책은 읽지 않는” 소년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도덕을 끌어내기 위해 필요한 문자 체계를 연습하는 일”을 통해 지배층의 시선에서 “사회적인 규범에 순응하는 이상적인 시민의 축소판”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카를로 콜로디는 당대의 고리타분한 어른으로 피노키오의 모험을 통해 거짓말 안 하고 말썽 안 부리고 어른의 말에 순종하며 어른의 꼭두각시처럼 학교에 착하게 잘 다녀야 행복해진다는 권선징악의 표면적인 교훈을 전하려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구엘은 피노키오에게서 콜로디의 한계에 갇힌 비극적인 꼭두각시를 읽는다. 피노키오가 읽지 못한 책을 망구엘은 읽었던 것이다.

꽤 오래전에 여기까지 쓰고 말았다. 한동안 잠시도 고요한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2월 19일도 정신없이 지나갔고, 내 투표권 행사와 상관없이 독재자의 딸이 인권변호사를 이기는 이변이 일어났다! 너무나 자명한 아버지의 독재를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지 않아도 그 딸을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한 결과였겠지만, 나와 내 지인들이 이루는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너도나도 다 떠나려는 해외여행에도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서는 이런 나라에서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민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책 읽는 사람들』에는 책과 독서를 둘러싼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서, 문득 망구엘이 아르헨티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쓰여 있는 페이지가 떠올랐다. 대략 ‘사람들은 나에게 왜 아르헨티나를 떠났느냐고 묻곤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제 와서 아무리 책장을 뒤적여도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다. 그 페이지는 내 기억의 편집으로 내 정신의 도서관에만 꽂혀 있을까. 아무튼 대신 다른 페이지들에 띄엄띄엄, 그리고 불쑥 언급되는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었다.

망구엘은 군부독재가 득세할 즈음 1969년에 아르헨티나를 떠났다. 1969년은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 체제하에서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3선개헌이 날치기로 통과됐고,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가열된 해이다. 그때 망구엘은 스물한 살이었고,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며, 엄마와 아빠는 아직 결혼도 하기 전이었다. 망구엘은 처음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수개월을 보냈지만 따분하고 상상력이 결여된 강의는 지루하기만 했고” “『오디세이아』 초기 판본의 원문에 관련된 문제를 매가리 없이 강의하는 교수의 목소리를 몇 시간씩 듣고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유럽으로 떠났다. 앞뒤 정황 없이 이 이야기만으로는 망구엘이 아르헨티나를 떠난 이유가 그리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왜 대학의 문학 강의가 ‘매가리 없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었을까? “걸핏하면 쿠데타로 정권과 대통령이 수시로 바뀌고 대로에 탱크가 일상적으로 굴러다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피노키오에게 “상식적이고 착하게 행동하라”고 순종을 강요하는 학교처럼, 아무리 위대한 문학작품이라도 그들이 통제와 착취를 위해 주입하고자 하는 매뉴얼대로만 읽을 것을 강제한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저항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허용될 여지가 없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마음대로 마음껏 읽을 권리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망구엘로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억압한 것은 망구엘의 본능이었을 테니까.

망구엘은 독서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지 않았다. 망구엘이 고백하길 비겁자의 선택이었다. “군부독재를 묵인하며 사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도 “총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망구엘은 유럽으로 떠나오기 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스물한 해 동안 사고 읽은 책들을 모두 남겨두었다. 만약 그가 아르헨티나에 남았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의심스럽게 보이는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체제 전복자로 기소당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됐을지 모른다. 이렇게 책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책을 감추고 불살라야 하는 광경은 참 익숙하다.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이 등장하는 예전 TV드라마에서 경찰 등이 자취방에 난입해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책이었다. 읽기의 매뉴얼을 강요하는 자들이 이럴 때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폭력적인 권력 남용을 합리화했다. 18대 대선에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독재자가 조작하여 국가가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국민 여덟 사람을 살해한 인혁당 사건이 다시금 불거졌다. 그 무고한 여덟 목숨 가운데 한 사람인 우홍선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회사에 출근했다가 느닷없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그날 남편을 직장에 보낸 후 아내가 라디오를 들으면서 쉬고 있던 집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짓밟았다.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구석구석을 뒤지던 그들은 “이 집에는 책도 없네”라고 “중얼거렸다”. (“중얼거렸다”는 2012년 9월 14일 『경향신문』 이효상 기자의 기사에 나오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어투가 그저 중얼거리는 어투이기만 했을까? 아마도 누명을 뒤집어씌우기 딱 좋은 책 말고 다른 것을 번거롭게 찾아야 한다는 사나운 낭패감이 배어 있지 않았을까. ‘재수 없게 이놈의 집구석에는 책도 없잖아!’ 정도로. 과민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책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얼마 전에 새로 산 ‘라디오’였다. 아내가 한가롭게 즐겨 듣던 그 라디오는 “남편이 북한 방송을 듣기 위해 산 것”으로 법정에 제출되어 남편의 사형 판결을 위한 증거로 둔갑했다.

망구엘이 떠난 아르헨티나에 그대로 남은 그의 친구들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주유소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군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사라졌다. 그의 싸늘한 시체가 우편 행낭으로 집 현관 계단 앞에 배달됐지만 심하게 난도질당해 처음에는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학생자치위원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그녀는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납치당했다. 그녀가 구금됐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군부가 관리하던 강제수용소 중 하나인 엘 캄피토에서, 그녀가 신체검사를 받으려고 두건을 벗었던 잠깐의 순간에 그녀를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군부에서는 나중에라도 수감자들이 고문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감자들에게 두건을 씌우는 게 관례였다.”
“엘 캄피토에 수감된 사람들 중 적어도 2천 명 이상이 군인들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그들에게는 파나노발이라는 강한 약물이 주입됐다. 수초 만에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심장발작 같은 증상을 유발하는 약물이었다(그 주사를 맞은 수감자는 살아 있지만 의식을 잃었다). 주사를 맞은 수감자들은 바다에 던져졌다. 등록되지 않은 유령 비행기들로 아주 낮은 고도로 비행했다. 비행기를 뒤쫓아오는 상어 같은 아주 큰 물고기가 육안으로 보이기도 했다. 조종사들은 상어들이 인간을 먹어 살이 쪘다고 말하곤 했다.”


독재자의 딸은 아버지의 독재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되었다. 2012년 9월,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하여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답을 한번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2007년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최종 무죄로 판결했을 때 그녀의 인터뷰를 되풀이한 것이다. “법원에서 정반대의 두 가지 판결을 내렸다. 역사적 진실은 한 가지밖에 없으니 역사가 밝혀주기를 바란다.” 이 말에 대한 여파가 사그라지지 않자 딸은 사과의 형식을 가장한 기자회견을 했다. “보릿고개”와 “북한에 맞선 안보”를 이야기하면서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고, “반드시 국민을 잘살게 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목표와 고뇌”로 (독재의) “비난과 비판”을 감수했다고 아버지를 옹호했다. 미안하긴 한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듯이. 그 끔찍한 인혁당 조작 사건이 어째서 “북한에 맞선 안보”로 이어지는가? 게다가 “자녀가 부모를 평가한다는 것, 더구나 공개적으로 과오를 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우리나라 풍토를 끄집어낸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살인을 옹호하고 미화하는 것이 자식의 역할인가? 이에 분노하는 것은 그녀가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의 독재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여 올바르게 과거를 청산하지 않는 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에서 안존하는 딸에게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과거가 고스란히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엄습한다. 완전히 용두사미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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