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를 학대하라
조이 고블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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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일러 있음.

분량은 꽤 되지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같은 또래 작가라 그런지 문체도 잘 맞았고, 이야기 속 등장하는 문화아이콘도 친근했다. 독특한 설정과 탄탄한 이야기전개, 전반에 깔린 유머코드까지, 재미있는데다 작품성도 빼어나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읽었는데도 완전히 몰입했다.

초반부 구성은 난해하다. 편지로 시작되고, 여러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시간흐름과는 무관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할런이 일곱 살인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는 의아하다. 내용이 도저히 어린아이에게 보내는 거라고 할 수 없다. '너에게 이런 말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중략) 나는 네가 햇빛 좋고 상쾌한 날 밖에 나가 조용하면서도 분명하게 외치기 바란다. "나는 절대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라고.'(p.11) 도대체 할런과 빈센트는 어떤 관계인가?

미디어왕국 'IUI-글로브터너'의 권력자 '포스터 리포비츠'이야기를 해야한다.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리포비츠였지만, 나이를 먹어가고 암과 싸우면서 지난 날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가 바란 것은, '주류 엔터테인먼트의 가치 체계가 상업이 아닌 예술로 전복되는 모습을 보는 것(p.36)이었고, 그 첫 걸음이 바로 '뉴르네상스 아카데미'(이하 '뉴르네상스')이다. (뉴르네상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p.40이하 참조)

빈센트는 뉴르네상스가 요구하는 문학적 소양을 인정받는다. 뉴르네상스는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빈센트의 엄마 '베로니카'와 접촉한다. "저희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을 선정해 매니저를 지정하고 있는데요, 빈센트가 그 중 한 명으로 뽑혔습니다. (중략) 매니저가 아이들이 창조적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울 겁니다."(p.46) 그래서 빈센트 매니저로 '할런 아이플러'가 파견(p.56)된다. 할런은 베로니카와 계약하는 과정에서 뉴르네상스의 목적, 비밀을 설명한다. "우린 당신 아들의 인생을 비밀리에 조종해서 빈센트를 고통에 빠트리고, 그것으로 그애가 지속적인 창조적 자극을 받아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길 원합니다."(p.72) 놀랍다. 예술적 창조를 위해 일부러 고통에 빠트린다니.

포스터 리포버츠가 할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고통받는 예술가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안은 이들을 고를 것이고, 선생님은 그때 개입하셔서 그의 인생이 맨 밑바닥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중략) 세 가지 실행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예술가를 끊임없이 고독하개 할 것. 2) 예술가에게 끝없는 창조적 자극을 줄 것. 3) 예술가가 계속 창작을 하도록 관리할 것, 이상입니다.'(p.119)

여기까지 살펴 봄으로써, 나머지 500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제목 '예술가를 학대하라'가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매니저 할런이 빈센트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독특한 이야기이다. 먼저 할런은 빈센트가 키우던 애완견 '위노라'에게 쥐약을 먹여 죽이고(p.127), 베로니카가 사라진 후에는 빈센트의 집을 불태워 버린다.(p.164) 또한 빈센트가 '대프니 설리번'과 사랑에 빠지자, 돈을 주고 그녀를 떠나 보내기까지 한다.(p.200) 이런 할런의 노력(?) 덕분일까? 빈센트의 글쓰기 실력은 나날이 발전(p.175)하며, 그가 만든 '너만을 위해'란 곡은 유명 여가수 앨범에 수록되기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고, 빈센트는 각종 로열티와 시나리오 판매수익이 계속 늘어 부자가 된다. 즐겁고 풍요로운 삶이 빈센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비뚤어진 기반 위에 이룩된 것이었다.

할런과 빈센트의 기묘한 관계는 주목할 만하다. 할런이 베로니카에게 털어놓은 비밀을 빈센트는 모르고 성장 대부분을 할런과 함께했기에, 빈센트는 할런을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 할런 역시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고 고민(p.387)한다. 빈센트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IUI-글로브터너'의 권력자이자, 뉴르네상스 아카데미의 창시자인 '포스터 리포비츠'가 사망(p.365)하고, '드류 프롬프츠'가 새 CEO로 취임한 것(p.372)이다. 리포비츠는 죽기 전에 할런과 빈센트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가 빈센트에게 건넨 말을 보자.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빈센트, 자네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잘 알았으면 하는 말을 하고 싶네. 정말로 도움이 됐다는 걸 알아주게. 기회가 있을 때 자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야. 자네의 고통은 헛되지 않았어. 자네와 뉴르네상스의 아이들은 정말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냈어. 하지만 자네야말로 가장 눈부시게 해냈어. 자넨 수많은 사람이 눈뜰 수 있도록 해주었어."(p.364)

빈센트에 호의적이었던 리포비츠의 죽음은 비극이었고, 프롬프츠의 CEO등극은 더 큰 비극이었다. 프롬프츠는 뉴르네상스의 노선변화를 꾀한다. 이는 빈센트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져, 예술적 창조활동에 소홀하다며 물리적 위해를 가하기까지 한다. 또한 할런이 자신의 노선에 동조하지 않자, 빈센트에게 다른 매니저를 소개(p.452)해 주려고 한다. 이런 갈등 상황에서 또 하나의 중요사건이 발생한다. 빈센트와 할런은 프롬프츠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는데, 파티는 난교파티(p.441)였다. 여기서 사라졌던 베로니카가 등장하고(잘못하면 어머니와 근친상간할 뻔한 상황-_-), 빈센트, 베로니카, 할런, 리포버츠 등을 둘러싼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예술가를 학대하라>엔 미국문화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깔려 있고, 다양한 문화아이콘이 등장한다. 그렇기에 미국문화를 잘 안다면 더욱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빈센트가 할런에게 노래가사를 인용해 말하는 부분(p.182)에선 해당 노래(Can't Take My Eyes off You)를 안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할런이 베로니카에게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p.47)에선 등장하는 음악가(노에프엑스, 돈 맥클린)를 안다면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잘 모른다해도 이 책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지장은 없다. 최세희 역자님께서 꼼꼼하게 역주를 달아주셨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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