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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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선배와 술자리를 하면서, 선배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은 듯한 느낌이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애잔해 선배의 속마음을 헤아리며 몰래 눈시울을 적신 후배의 심정'이라면 너무 오바일까? 화자가 김수영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p.145, p.158)을 읽으며 저런 느낌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니구나 '안도'했다. 이런 약간의 부담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가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허구고 사실인지 경계가 모호한, 말그대로 저자의 젊음과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는 소설이다. 또한 저자(저자인지, 소설속 화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동일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가 말미에 언급하고 있거니와, 첫사랑 그녀 박은영과 그의 아들 김수영에게 바치는 소설이다. 저자가 삶을 돌아보며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간 것에, 제3자의 느낌은 건방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조심스럽다.

배경은 아직 박정희가 살아있던 70년대, 화자와 '그녀' 박은영의 운명적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난생 처음 본 '플레이보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화자는 대학 음악감상실에서 잠을 자고, 잠자던 박은영의 기타를 건드리는 실수를 한다. 이를 계기로 말을 나누는 두사람, 은영에 빠져버린 화자, 정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다. 화자는 말한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기절할 것만 같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그 즉시 그녀가 내 인생 최초의 진정한 포르노-플라토닉 러브의 상대가 될 것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했다."(p.19) 첫 눈에 반한 남자의 설램이 강하게 느껴진다.

'은영'은 적극적이고 활발한 여성이다. 화자가 '옹달샘'으로 데려가 사과의 뜻으로 커피를 사지만, 그녀는 "어휴, 구정물 같아."(p.23)라고 한마디하고(ㅋㅋㅋ), 음악감상실에서 자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박하기도 한다. 70년대 여자가 아니라, 요즘 여자같다^^ 은영의 꿈은 가수다. 그것도 십만명의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화자는 눈치없이 '망상 같다'(p.36)는 실언을 하고 사타구니까지 차인다. 대단히 화가 난 은영, 이 여자 성격도 화끈하다. 이어지는 둘의 관계는 뭔가 중요한게 빠진 듯 진전이 없다. 화자는 그녀를 정말 좋아하지만, 은영은 시종일관 비밀을 간직한 채 미스터리할 뿐이다. 들여다 보면 그녀도 그를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결정적인 순간에선 숨어버린다. 도대체 은영의 비밀은 뭘까? (그녀의 모든 비밀은 시간이 흐르고, 김수영이 등장(p.120이하)하고 나서야 밝혀진다.)

화자가 여행사 가이드를 하던 경험은 소설의 또다른 축이다. 화자는 단테를 안내해 준 베르길리우스 같은 가이드를 꿈꾸던 사명감 넘치는 가이드다. 그의 기억에 남은 두명의 외국인-독일인 '한스 뭘러', 전진 히피 '조 후버'-이야기는 또다른 흥미를 안겨줬다. 독감때문에 방에서 잠만 자다 떠난 한스 뭘러, 자유분방한 독설가이자 괘변가인 조 후버, 그들은 화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저자는 과연 베르길리우스 같은 여행 가이드란 작은 희망을 이뤘을까? 저자는 말한다. "나는 결국 단테의 베르길리우스 같은 여행 가이드가 된 것 같다. (중략) 소설가를 인생이라는 여행길의 가이드로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말이다."(p.70) 잠깐 등장하는 여행사 여직원과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화자를 좋아한다고 공개선언한 귀여운 여자, 하지만 그의 마음엔 은영뿐이다. 나중 여행사 여직원을 바람맞치는 장면, 눈물을 흘리던 귀여운 여자,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정말 사랑은 마음대로 안되는 듯.

그렇게 화자는 은영과 사랑이라 할 수 없는 사랑의 숨바꼭질을 하며, 베르길리우스 같은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자기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귀여운 여자를 바람맞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소설가가 된 화자를 찾는 김수영, 그의 정체는? 점점 드러난 것들. 그리고 인생. 진부한 70년대 로맨스로 취급할 수 없는 애잔함이 가슴에 밀려온다. 뭘까? 내가 느낀 지금 이 감정은 뭘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70년대를 이야기하는 이 책에서 난 뭘 느낀 것일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애잔하고 향내 가득한 책이다. 70,80년대를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이라도 '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마법의 책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사랑과 젊음, 인생은 시대를 초월하기에. 오랜만에 추천할 만한 국내소설을 읽었다.

 

* 구성이 독특하다. 도입부와 말미에 책 속 '화자'와 '저자'를 동일인물로 보게 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마치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내지 편하게 들려주는 이야기같은 느낌.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와 이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라는 배경부터, 소설 속 남녀관계까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사랑하지만, 결국 숨어버린 은영. 화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약간 지엽적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을 보자. '그녀는 아무 앉아 있다가 막 떠나려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몸짓을 해보였다. (중략) 그 모습을 보니 스무 살 그해 여름,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캠퍼스와 학교 앞 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때처럼 갑자기 강렬한 상실감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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