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이 책은 현실적인 것의 우위성이라는 이 명료하고 단순한 독트린을 논박하기 위해 쓰여졌다. 순탄치 않을 이 지반 위에서, 나는 "창조적" 상상력의 원초적이며 심리적으로 근원적인 성격, 그것의 긍정을 시도하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인지된 이미지와 창조된 이미지는 두 개의 아주 다른 심리적 현상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상상된" 이미지를 가리킬 새롭고 특별한 범주가 요구된다. 교과서에서 "반복(재생) 상상력 reiterative imagination"이라 기술되는 그것은 인지, 그리고 기억의 영역으로 귀속되어야 한다. 창조적 상상력은 과거 인지의 재생산에 의지하는 상상력과 아주 다르게 기능하는데, 이것이, 심리적으로 말할 때, 심리학자들이 개인의 "현실"에의 -- 사회적 승인을 누리는 그 무엇이든 -- 순응을 말하기 위해 자주 거론하는 "현실 원칙"과 비교할 때 어떤 점에서든 그만큼 강력한 "비현실 원칙"에 의해 관장되기 때문이다. 고독의 가치를 재수립하는 것이 이 비현실 원칙이며, 평범한 몽상은 고독의 가장 기본적인 면모에 속한다. 상상된 이미지를 모색하는 상상하는 상상력을 좇아가고자 한다면, 창조적 상상력의 활동이 갖는 수많은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지 그리고 의지의 몽상> "서문" 2쪽에 있는 문단.
아도르노가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한 (여러 이유에서) 곳들에
바슐라르는 단호하고 자유롭게 간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 문단에서 특히 밑줄 친 부분도 그 예.
내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은 조금 꼬여 있지만 ("convoluted" 영어권에서도 이 말로 복잡하게 길어지는 문장들을 규탄할 때 많다) 그런데 그게 영어 번역문도 그렇다. Creative imagination functions very differently than imagination which relies on the reproduction of past perceptions, because it is governed by an unreality principle every bit as powerful, psychologically speaking, as that reality principle so frequently invoked by psychologists to characterize an individual's adjustment to whatever "reality" enjoys social sanction. 흐으 (한숨). 이런 문장.
전체는 비진리고
사회는 사악한데, 그러나 (그래서) 개인은 겨우 존재하고
그것도 언제나 그 전체와 그 사회 속에서. : 아도르노에게 비관주의가 있다면, 이것이지 않을까.
<미니마 모랄리아>에는, 사회적 승인이나 현실원칙(그것에 순응함), 이것들이 부재하는 영역도 인간 정신에
있다고 말하려다 마는 것 같은... 대목들이 있다. 바슐라르가 그의 책들, 수많은 대목들에서 가는 곳이 그 영역.
In Our Time, "고독의 철학" 에피소드가
위의 소로우의 말 인용으로 시작하던데, 사실 소로우의 말도 좀 진부하지 않나.
고독이 주제일 때 바슐라르도 가끔 (아주 가끔. 한 두 번) 상투적인 말도 하는데, 그런데
들여다보고 생각할수록, 심오하고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