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돌리며 맥주 마시는 중. 

지금 두 캔째인데 (두 캔만 사왔고) 모잘;;;모자라;질것같은 예감. 

대학원 시절엔 차가 있어서 운전하고 다녔었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올 때 차에서 자주 듣던 노래 중엔 이것이 있었다. 




들으면 그 시절이 바로 회상되는 노래. 

그런데 얼마 전 이 뮤비 보다가 본 조비가 입은 슬림핏 검정티, 이게 멋있어 보였고 따라 입고 싶어졌다. 

입을 수 있으며 입고 싶어졌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입을 수 없지만 앗 나도 저렇게 입고 싶다 언젠가는.........  

그건 맥주를 영원히 끊어야 가능할 것임을 아는 나. 나님. 나여사.;;;; 


그건 그렇고 

몽테뉴 에세이에 "고독에 대하여"도 있던데, 제목에 적은 것같은 문장이 나온다: "무리 속에 있을 때 일어나는 전염은 위험하다. 무리 속에 있으면, 사악한 이들을 모방하거나 아니면 증오해야 한다." 


하아 그런데 이것이, 이것도 내가 먼저 했던 말이다.;;;; 내 말이야 이것도!!!

인간은 혼자이게 되어 있는 동물이라며, 그 이유로 저걸 생각했었다. 인간이 무리를 지으면 생겨나는 악덕, 그것의 일부가 되고 참여하거나 아니면, 나는 아니라며 그들을 지탄하거나. 후자의 경우엔 머지 않아 고립을 택하거나 고립이 강요되거나. 



*두 캔 마시고 빨래 널고 나니 의외로 취한 기분이라서 오늘은 여기서 그만. 

음 이것도 그럼 나중에 보충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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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07-15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깨달음을 주네요. 재밌기도 하고 말이죠~ ㅋ
저도 맥주가 갑자기 땡기는데... 이거 어떡하죠?

몰리 2016-07-16 06:50   좋아요 1 | URL
몽테뉴 에세이는 정말 엄청날 것같은데, 단어 하나도 허술하게 읽어선 안되면서 그게 또
다 자기 얘기로 보인다는 게 더더욱 엄청남이고, 니체가 잘 말했던 거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살았으며 그가 글을 썼다는게 이 지상의 삶의 즐거움을 얼마나 증대했는지.

어떻게든 시간 내서 읽어야만 하는 책이겠어서 덮고 밀어둔 책을 보기가 두렵네요. ;;;
 

"현학에 대하여" 


우린 우리의 기억을 채우기 위해서만 공부하고 우리의 이해와 양심은 비어 있게 내버려둔다. 

낟알들을 찾아다니는 새들이 때론 낟알을 맛도 보지 않은 채 부리 안에 간직했다가 새끼들에게 모두 먹이로 주듯이, 우리의 현학자들은 책들 속을 누비며 오직 그들 입안에만 머물 지식들을 약탈한다. 그럴 때가 오면 뱉아내서 바람 속으로 날려보내기 위함이다. 


이 어리석음이 온전히 내것이기도 함은 경이로운 일이다. 내가 이 글들을 쓰면서 거의 언제나 하는 일이,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일이지 않나? 여기 이 책에서 하나 저기 저 책에서 하나 날 즐겁게 하는 말들을 구걸해 얻어와서는, 그걸 보관하는 것도 아니고 (내게 창고가 있지도 않으니) 이 글들 속으로 옮겨 놓는다. 진실을 말한다면, 이 말들은 그들의 원래 자리에 있었을 때 내것이 아니었듯이 이 글들 속으로 옮겨져도 내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현재의 지식에서만 배운다고, 미래의 지식에서 배울 수 없듯이 과거의 지식에서도 배울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이 어리석음보다 더 나쁜 건, 새끼새들이 그렇듯이 현학자들의 학생들도 자양과 지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전해지는데, 오직 그같은 전수를 전시한다는, 남들에게 그에 대해 말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지어 보겠다는, 목적에서다. 지식은 이들에게, 오직 셈의 수단일 뿐이며 셈이 끝나고 나면 쓸어 내버리는 전표의 가치와 용도를 가질 뿐이다. "그들은 남들 사이에서 대화하는 법은 배웠지만, 자신과 대화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키케로). "말재주가 아니라 조타력이 필요하다네. Not talking, but steering, is needed." (세네카). 







오래오래 보관만 한 이 책, 오늘 꺼내 보았다. "Of Pedantry" 이 제목이 끌려서 보는데 

재미, 음 이상한 재미 있다. 몽테뉴의 에세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그리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음. 


위에 옮겨 온 대목.  

그 어리석음은 자기 것이기도 하다더니 바로 또 두 개의 인용을 하는 몽테뉴. ;;; ㅋㅋㅋ ;;; 좋다. 

애독자들은 예외없이 자신을 이 글들 속에서 본다더니, 나는 오늘 처음 읽은 거나 마찬가지임에도, 저 대목 내 얘기라고 바로 알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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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를 읽을 때) 우리는 여기서라면 늘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걸 안다.

여기엔 자기 집의 확고한 주인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움, 꾸밈없음이 있다.

게다가 그의 집은 얼마나 부유한 집인지.

 

쇼펜하우어는 심오함을 간명하게, 감동을 수사 없이, 엄밀한 과학성을 지루한 현학 없이, 표현하는 방법을 안다 (....) 스타일과 관련해, 그 자신의 말이 가장 잘 그의 특징을 요약한다: "시나 수사학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고 글을 쓰려면, 철학자는 대단히 정직해야 한다." 세상에 정직이라 불리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게 심지어 미덕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은, 이 여론(public opinions)의 시대엔 표현이 금지된 사견(private opinions that are forbidden)에 속한다. 따라서 내가 다시, 쇼펜하우어는 정직한 저자라고 강조한다면 나는 그를 칭송하는 게 아니라 그의 특징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정직한 저자는 거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든 불신하고 봐야 한다. 쇼펜하우어와 비교할 만한, 아니 실은 그보다 위에 놓을 다른 저자로 나는 단 한 사람만을 알고 있다. 그는 몽테뉴다. 이런 사람이 글을 썼다는 게, 그게 지상에서 우리 삶의 즐거움을 얼마나 증대했는지. 영혼들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고 가장 막강한 이 영혼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가 플루타르크에게 느꼈던 그것을 나도 느끼게 되었다. "그를 한 번 보기만 해도 내겐 다리 하나가 아니면 날개 하나가 생긴다." 내게 그 과제가 주어진다면, 몽테뉴와 함께 이 세계를 내 집으로 만들며 나는 살 것이다.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2절, p. 135)



책세상판 <반시대적 고찰>을 샀던 걸로 알고 있다가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구매리스트를 검색. 사지 않았다. 사려다가, 번역에 비판적인 독자리뷰 보고 안 샀나 봄. 이 대목이 한국어판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나 궁금하고 찾아서 같이 올리고 싶었으나 일단 영어판 보고 내가 한 번역만. 


마이클 더다의 "at home in the world" 이 구절과 두 곳에서 공명한다. 

(1) 쇼펜하우어는 자기 집의 주인이다. 그리고, (2) 몽테뉴와 함께 이 세계를 내 집삼아 살아볼 수 있(었)으리라. 


(2)에선 (물론 영어 번역으로 그런 것이니, 독어 원문 표현은 어떤 건지 확인해야겠지만) 이 구절 그대로 반복된다. 마지막 문장 전체를 옮겨 오면: If I were set the task, I could endeavor to make myself at home in the world with him. 


이거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함. 

세상을 내 집처럼 느껴보기. 내 집의 주인으로 살아보기. 정신의 영역에서 말이다. 몽테뉴나 쇼펜하우어의 방식으로. 

물리적 거주공간으로서의 집..... 의 문제라면, 니체 자신 세입자로 평생 살았던 데다 ;;;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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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성적입력 마감이라 성적입력을 했던 오늘. 

그 와중 지난 학기 강의평가가 나와서 보다가, 지금까지 내가 받았던 최악의 혹은 최고의 강의평가들.. 생각함. 

대학원 시절 대학원 강의조교로 했던 영작문 과목. 학생 수 많지 않은 과목이었고 그러니 서술형... 평가를 했던 학생들도 많지 않았는데 몇 학기 연달아 "이 수업은 English Composition 아님. philosophy 과목임. 실제로 리딩도 그런 거 택함" 이런 거 적은 학생들 있었다. 


(그 시절엔 당연시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놀라운, 

어쨌든 먼저 선생을 (그게 대학원생에 불과할지라도) 옹호함... 이런 방침이 학교에 있었다. "너희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 너희의 잘못이고 그래서 학부모에게서 학교로 연락이 오더라도, 우리는 먼저 너희를 옹호한다." 이런 얘길 대학원 ta들과 주임교수 모임에서 수시로 들었다. 이건 성추행 포함해 진정한(?) 잘못, 이런 것이 일어날 가능성을 정말 최소로 잡는 것이기도 했고 하여간 나중 생각하면서, 그럴 수도 있었구나.. 놀라는 대목).  


그 비슷한 말을 한국 와서 했던 과목들에선 들은 적이 없다가 지금 처음 들음. "이 과목은, 영어라기보다 인생 얘기를 한달까, 철학적입니다." 


















교수들의 연구를 왜 지원해야 하나. 

이것의 가장 막강한 대변인.... 내게 그건 (지금까진) 이 책이었다. 

이 책 저자 서문인가 감사의 말인가에, 이 책을 쓰기 위해 어디서 어떤 재정지원을 받았고 소속 대학이던 학교에선 연구년 포함 어떤 배려를 받았으며..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을 본 건 올해 초. 이 책 보기 전에도 교수들이 연구년 동안 연구비 받으며 쓴 책들을 많이 봤지만, 이 책만큼 강력히 "그 모두가 가치 있었다"를 말하던 책은 없었음. 


비정규직이며 언젠가 정규직이 되긴 할건지 알 수 없는 (굳이 따지면 그 면에선 비관적이면 비관적인) 

나같은 사람에게도, 돈과 시간을 주면 누군가는 이런 걸 쓴다.. 사실 안 주어도 쓰겠지만... : 이걸 아는 건 도움이 무척 됨. 


(갑자기 화제를 바꾼, 한 포스트 안 두 화제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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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더다 책 보다 썼던 노트엔 이런 것도 있었다.  

내가 아직 젊던 (30대. 쓰고 보니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내가 제일 예뻤.. 이진 않고 젊었.. 던 때. 제일 아니고 조금 젋었던 때) 시절이라 지금보다 아주 많이 순진하고 (유치하고) 기운이 넘친다는 걸 알아봄. 10년은 안 되는 세월이 흘렀는데 그 사이 "what beasts human beings really are"에 관한 내 몫의 배움을 피하지 못한 것같다. 




1960년대에 심리학자 R. D. Laing은 가족이 광기를 유발하도록 고안된 기계라고 선포했다. 그러고 보면, 상대는 비난하고 자기는 면죄하는 게 가족내 의사소통의 핵심적 방법인 듯하다. 어떤 아이이든, 자기 부모와 형제들이, 가족내 불화에 관한 유진 오닐의 파란만장한 드라마 <밤으로의 긴 여로> 속 인물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게 되는 때가 온다. 자, 그럼 우리도 그들처럼 가슴을 쥐어 뜯으며 소리 지르고 흐느끼며 울도록 하자!

 

최근 인기 있는 장르, 회고록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라. 회고록이 성공하려면, 주인공이 불행한 가족에 태어나는 것이 좋다. 술 취한 어머니. 폭력적인 아버지. 조울증에 걸린 형제들. 약물 중독에 빠진 자매들. 성추행을 일삼는 삼촌들. 이런 것이 유년기와 사춘기를 다루는 현대의 몽상 속에 반드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다. 일찌감치 공포와 정신적 외상을 겪은 다음이라야, 영적 개종이나 지적 에피파니와 함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게다가, 행복한 유년기라니? 그것만큼 감상적인 것도 있는가.

 

이 모두를 우리가 알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우린 다수의 엄마와 아빠들이 그들의 최선을 다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카풀을 하고, 직장에 출근하고, PTA 모임에 늦더라도 나가며, 세탁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과 축구 경기를 한다. 이들은 그들을 필요악 정도로, 아니면 자기들 용돈의 출처로만 아는 십대의 자식들과 토론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거울 속에 비친 그들의 얼굴을 볼 때, 한때 빛났던 얼굴들 대신 푹 꺼지고 주름이 깊이 패인, 우리가 사진으로 보아 알고 있는, 19세기 네브라스카에서 사이클론이 앨펄퍼 수확을 날려 보낸 직후 오두막 앞에 웅크리고 서 있던 농부들처럼 먼지 붙어 창백하고 핼쓱한, 얼굴을 볼 것이다. 흐릿한 잿빛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그들은 다음의 타격을 기다린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건 그들의 - 나이가 열살이든, 스무살이든 아니면 마흔살이든 - 자식들이다.

 

그러니 나는 젊은이들에게 조그만 조언을 하고 싶다. 부모는 그만 원망하라 (Cut the old folks some slack).

-"Domestic Unrest," 79-80.

 

   R. D. Laing. 60년대 구루같은 모습.

 

 


 

*맨 마지막 문장은, 꼭 맞게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문장. (모자란 면이 있더라도) 좀 봐줘라. 눈감아줘라. 이런 뜻이긴 한데,

그게 우리말로 그렇게 말하면 영어엔 있지 않은 서열이 (그것도 전도되어) 등장한다고 해야겠지. 그러고 보면 한국어라는 언어 자체에, 서열 따지기의 무의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대출했던 책들 반납 운동을 하는 중인데,

마이클 더다의 이 책 반납을 할까 말까 결정하려고 펴서 넘기다 마주쳤던 대목. 처음 읽을 때도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왜 인상적이었느냐. "부르주아를 향한 혐오, 이것이 모든 윤리의 출발점이다" 플로베르의 말. 그 말이 생각나게끔, 부르주아의, 자기는 알지 못하는 악덕을 잘 보여주는 문단들이라 생각했다.

 

*그 악덕이 무엇이냐.

그 어떤 급진성, 전복성도 무력화시키는 힘으로써의 (멍청하고 오만하고 탐욕적인) 자기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므로, 그 무엇에도 놀라지 않는 능력. 가족이 광기를 유발하기 위한 기계라는 R. D. Laing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여 짧은 세 문단만에 아무렇지 않게 "노인네들, 봐줘라"로 끝낼 수 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R. D. Laing이 급진적이었다고 하면 코웃음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R. D. Laing 저서 두어권을 뒤적이면서 받았던 인상은, 깊이 혁명적이고 전복적이면서 동시에 의식적으로 시대의 조류를 타고 또 이용했던, 그런 아이디어들을 제시했던 이. 과연 60년대의 자식이라 할 만한), "가족이 광기를 유발하는 기계" 요 아이디어는 맥락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급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이 급진적인가. 

그로 인해, 거기 동의하기 위해서든 동의하지 않기 위해서든, 내 경험의 전반적 검토가 불가피할 때. 
"가족은 광기를 유발하는 기계"란 아이디어도, 거기 비춘 내 경험의 진짜의 점검이 있은 다음에야 논평할 수 있는 아이디어일 것이다. 위에 옮겨 온 대목에서 마이클 더다의 목적이, 이 아이디어의 논평에 있던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나야 물론 이런 것도 다 알고 있어" 식의 인용은 (그 아이디어의 가치엔 무관심하면서 말이다)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어쩌고 저쩌고 쓰고 있다보니,

부르주아니 급진적이니를 떠나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1. 그게 어떤 아이디어든 거기 반응하기 위해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그에 비추어 자기 경험을 검토하는 사람,

2. 1번과 같이 하지 않는 사람. ㅎㅎㅎ;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어 "가치엔 무관심하고 가격엔 관심이 많은" 사람을 부르주아라고 한다면,

그런 이유에서 2번에 속하는 부르주아들이 있는 거겠지. 마이클 더다와 같은 경우엔, 가치에도 민감하고 올바르게 관심을 갖는 듯한 때가 있지만 그게 거의 공정한 (그가 보기에 공정한) 가격을 매기고자 함에서라고 ...., 참 아침부터 쓸데없는 생각을. 

 

 

 

  

 

 

(*덧붙임. 밤이 되어 술마시고 있는 중).

*조금 더 생각하면, "술 취한 어머니. 폭력적 아버지. 약물 중독에 빠진 자매들..."

등등의 주요 인물들이 벌였던 가족 드라마, 거기서 고통 겪은 이들을 끌어오면서 하는 '가족'이 주제인 얘기를,

이따위로밖에 할 수 없음에 대하여 점점 더, 어이없을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정도의 생각이라도 하는 사람이 어딜 가든 0.1%나 될까말까임 또한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존경을 보내고 긍정해야할 거 같은 갈등의 상황에 빠진다.

 

*사랑이란 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든,

진짜로 '대인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 말하자면, 깊고 진실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

에고는 작고 프라이드는 큰 사람. 등등. 뭐가 '대인배'인지 정의는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아예 그걸 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 실은, 다수라는 거. 가까운 타인을 향해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한 방법이 그를 사랑하지 않기이며,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는 일도 언제나 일어난다는 거. 그런데도 "그래도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사랑을 거둠, 이것도 사랑의 중요한 한 방법이라고 우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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