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이 장면에서 이런 진지함 좋지 않나. 

제임스 테일러 노래, 진짜 잘 쓰였고. 이 노래에서 특히 

Don't you look down on me Jesus, you've got to (you gotta) help me make a stand. 

이 대목은 대학원 시절 여러 번 생각하고 힘을 얻었던 구절이기도 하다. 


마침내 채점 다 끝내고 (점수 내고, 점수 합쳐서 성적 내고 할 일은 남았지만) 

너무 좋은데 너무 지치기도 한 상태에서, 좋아했던 영화들 이것 저것 찾아보다가 이것에 낙점. 


이것 말고 옮겨 오고 싶지만 유튜브에서 찾아지지 않는 장면 중에 

HBO에서 만든 페미니즘 연작 단편 영화 If These Walls Could Talk에서 

Lean on Me 쓰였던 장면 있다. Lean on Me는 노래 자체가 좋지. 빌 위더스였나. 리메이크도 많이 되었나. 



Chloe Chevigny, 미셸 윌리엄스가 이럴 때 쓰였다. 


뭔가 쓰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던 것 같은데 감감. 감감. 

사실 채점하면서 거의 예외없이 느끼는 하나는 뭐냐면, 그래도 청년들이 다르다는 것? 

아래 쓴 "artistic" means "experimental", 이런 (급진적, 실험적, 진보적....) 자세 거의 늘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어른인 우리들에게선 보기 힘든 종류의 진지함도 어렵지 않게 본다는 것? 미디어에서 말하는 것 같은 청춘이 아니라는 것? 


어쨌든 내 경험으론 그렇긴 하다. 

나는 자주, 많이 감동 받았고 (그러니까 오늘만도) 

실제 수업에서 구원이었던 순간들도 많았다. 그게 누구든 타인이 내게 자신을, 열심히 생각하면서 말할 때 오는 그런 구원. 아아 흐으으으으으으ㅡㅇ 그렇긴 한데, 채점은...... 영혼을 먹어요. eats away the soul. 먹혀 죽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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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서 syo님이 쓰신 카유보트의 그림들 중 

나는 이것이 특히 좋기도 했다. 제목: 오렌지 나무. 

85년의 여름이 기억남. 고향 읍내에 시내버스가 들어오기 전이었고 

읍내에서 면단위 작은 동네까지 걸어 다니던 시절. 세시간까진 아니라도 

두시간 정도는 그냥 걸어 다니던 시절. 친구네 집도 아니고 친구네 할머니 댁에 

친구와 같이 오래 오래 걸어서 갔던 날. 이 그림 속 하얀 흙길이 그 날 걸었던 그 흙길 같다. 햇빛이나 그늘도 

그 날의 그 햇빛 그 그늘 같고. 전화가, 심지어 면단위에선 그 당시에도 집전화가 흔하지 았았던 듯. 할머니 댁에 

전화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우린 연락 없이 갔다. 이상의 "권태"에 나오는 권태로운 아이들처럼. 갈 수 있으니까 감. 


마침내 도착했을 때 가마솥 있는 부엌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놀라지도 않고 반가워하지도 않던 일. 우리가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였나 (캡틴큐?) 

적힌 화보든가 포스터던가 벽에 붙은 친구의 삼촌 방으로 들어가 놀고 있는데 할머니가 "꺼먹소 라면"을 

얘기해서 눈물을 흘리며 웃었던 일. (*까만소 라면..... 이라고 잠시 나왔던 라면이 있었다. 할머니의 한 단어 사투리 번역). 


Stand by Me,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

체험, 상황, 자연... 이 어쩌면 거의 보편적인 건지도. 형이 죽은 다음, 가족이 무섭고 (그래서) 시체를 보러 가는 일은 모험이고. 하루 사이에 유년기의 끝이고. 그런 일. 


햐튼. 흐으. 채점을 종일 하다 보면 

채점이 아닌 무슨 일이든 재미있고 짜릿할 거 같아지고 지금이 그런 때. 


"내가 시민시험을 출제한다면?" 이 작문 주제에 

미대 학생이 예술, 예술체험에 관한 출제를 하겠다면서 예술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를 

저런 문장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artistic" means "experimental." 이것도, 이런 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인가 하면 굉장히 심오해질 수도 있는 말 아닌가. 나는 순간, 하아 이것 아도르노네....... 


<미학이론>에서 인상주의도 꽤 자주 언급된다. 

"행복한 예술, 인상주의에도 방법의 잔인함이 있다" 이런 문장도 있다. 

인상주의의 소재/주제는 평화로운 자연이 아니었고 인상주의자들은 그들의 그림으로 

문명의 파편들을 통합하고자 했다. : 이런 얘기. 그 밖에, 까다롭고 까다로워서 해석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보완도 해야 하는 얘기들. bbc 인상주의 다큐멘터리엔 심지어 <미학이론>에서 인상주의에 대해 제시된 

까다로운 지점들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 같은 대목들도 있던데. 그렇다면 정말, bbc 안 죽었네. (죽은 적이 없었다고! 인가....) 


어제도 끝엔 맥주 마시고 잤는데 

오늘, 조금 있다 그냥 자고 싶은가 하면 

맥주. 맥주다 맥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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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12-25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그림이 카유보트 작품이었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서 검색해보았더니 그건 존 싱어 사전트 작품이었네요. 문외한의 눈으로는 분위기가 카유보트와 비슷해보였나봐요.
그림의 저 숙녀분은 뭐하고 있는 모습일까요? 오른쪽 위에 저는 고양이가 누워서 자고 있는 것 같은 환청, 아니 환상을 보았어요.
캡틴큐, 까만소라면, 이상의 권태... 추억 돋는 페이퍼였습니다~ ^^

몰리 2016-12-25 20:32   좋아요 0 | URL
히히. hnine 님도 70년대 초 생이신 거죠. 까만소 라면은 라면계의 구본승이랄까 ;; 거의 세대 표지. ;;; 였어요. 몇 번 얘기해봤을 때 모른다 모르겠다 반응 겪다 보니, 그런 게 있었나 싶어지기도 했던 까만소 라면.

오른쪽 위에 엎드려 있는 건 큰 이미지로 보면 개로 보이긴 하는데
고양이로 상상해 보니 (개보다 고양이가 더 좋은 사람에겐 꼭 그러겠듯이) 별별 여러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고양이의 그 뜬금없고 귀엽고 매력적인 동작, 표정. 그러다 지쳐 널부러짐. ㅋㅋㅋ 여름에 태어난 길냥이 3형제가 동네에 있는데 얘들 다 어찌나 뜬금없는지, 열심히 나무 타다가 (바로. 선택의 단계 없이) 낙엽 갖고 놀기. 그냥 막 뛰기. 그러다 가만히 있기.

전 남자는 신문을 읽는 척하고 여자는 책을 읽는다, 여자는 책에 집중하지만
남자의 관심은 여자를 향해 있다... 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고 있으니 그 반대로도 상상되네요.
남자가 햇빛과 오후를 즐기고 있을 때, 여자가 다가옴......... 책을 꺼냄. 두 사람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인 두 사람이라 해도,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무엇이 있다 해도, 어느 쪽이든 상상이 자극되고 그게 매력인 그림이지 않나 해요.

hnine 2016-12-25 21:17   좋아요 0 | URL
꺼이꺼이...70년대 초 생 아니어요 ㅠㅠ 85학번인걸요.

몰리 2016-12-26 19:30   좋아요 0 | URL
언젠가 ˝위 아래로 다섯살 차이까지 친구할 수 있는가?˝ 주제로 토론을 해보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한 명도 없었던 것같은 (손들어봐! 할 수는 없으니 느낌으로요) 그 놀라웠던 분위기. 위의 사람과 친구되는 건 ok, 아래 사람과는 한 살 차이와도 그러지 않겠다: 이 쪽이 다수였던 듯해요. 그런데, 이것도 정말 우리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진정한 곤경에 속하지 않나... 새삼 또 생각해보게 되네요.
 


(*Berthe Morisot의 1875년경 작품이라고. 제목이 Grain Field). 


Sensitive? 

-- Yes. 

Revolutionary? 

-- Very



BBC에서 만든 인상파 4부작 다큐멘터리가 있던데 

그 중 1부가 1874년에 있었던 인상파의 최초 전시에서 끝난다. 

끝나기 직전에 "이 전시에 출품한 여성 화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베트 모리소." 

그러더니 하는 말이 위의 네 단어. 특히 Revolutionary? 에 이은 Very는 이탤릭체로 표시해야하게

강하게 말한다. 


얼마전 어쩌다 (아무거나 눌러보다가) 들었던 어떤 현대미술 주제 다큐멘터리에선 

모리소의 습작과 초기 활동에 대해서, (그녀 가족에게나 그녀 자신에게나) 그림은 결혼 전 대강 취미처럼 해보려던 

것이었음. 그런데 하다 보니 그녀, 예술을 향한 열망이, 그리고 거의 천재적인 재능이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함. 여성성의 관습을 답답하게 여기며 자기 선생보다 나은 자신의, 그 재능의 실현이라는 남성적 길을 택함. : 대략 이런 얘길 하고 있었다. 어느 다큐멘터리였나 모르겠어서 지금 다시 확인은 못하겠고 조금 맞지 않게 기억한 걸 수도 있는데, 하여튼 저 방향. 자기와 자기 재능에 대해 별 기대도 없고 그러니 믿음도 없이 시작했다가, 바로 자신의 힘을 발견하는 여성 예술가. 그리고, 포기하지 않음. 


인상파는 저 bbc 다큐멘터리에서 아주 적절하게 말하듯이 

"terribly popular, terribly familiar, terribly commercialized"이긴 해서 

유튜브에 인상파 주제 다큐멘터리만 한 수십 편은 있는 것 같다. 이 중 이미 본 것들도 몇 편 있는데 

내가 본 것들 중에선 이 bbc 4부작이 최고. 일단 대본의 퀄리티 최고. 1부에서는 인상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인상파는 무엇을 하고자 했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해 한 시간 안에 줄 수 있을 제일 좋은 답 주고 있지 않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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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12-2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마네와 모네 정도는 구분하자는 목표로 한 보름동안 인상주의 관련된 책만 읽었는데, 그때 카유보트와 함께 좋아하게 되었지요. 모리조의 흰색에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몰리 2016-12-25 11:48   좋아요 0 | URL
피카소의 전기 다큐를 보았더니
그의 십대 시절 어린 막내 여동생이 약만 있으면 살았을 병으로
약이 없어서 죽었는데, 피카소는 그 여동생을 끔찍히도 사랑했고
여동생이 살기만 한다면 평생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좋다는 맹세를 신에게 했을 정도.
여동생의 죽음은 그가 겪은 가장 큰 상실. 이것이 이후 그의 여성편력을 설명하는데, 그가 사랑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그에게 뮤즈이자 예술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이기도 했다는 점.............

이런 얘기가 나오길래
아으 진짜. 그만 해! 피카소의 여성편력 얘기할 1의 시간이 있다면
여성 예술가 모리소의 자기발견 얘기할 10의 시간을 내도록 해! 미술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해주세요...... 제 말이 들리세요?

저런 심정 되었었네요. ;;;;
 



이 분도 

이 사태 전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분. 

근데, 이 분 외모 멋있지 않나. 눈이 반짝반짝. 눈빛으로 밝아지는 얼굴. 

특검 결과에 따라, 아오 이젠 싫다고 싫다고 할 수도 있는 분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오홍 이런 분도 계셨었구나다. 


*지금 이미지 찾아보니 

사진보다 동영상이 더, 맞는 분 같다. ;;;;;;;;;;;; 





이 분도 멋있으심. 

외모가 아주 딱 그 사람 자신인 사람. 흐리멍텅한 바 없고, 흐리멍텅하지 않은 사람. 

그렇게 내겐 느껴지고 아무튼 이 분도, (당연 이 사태 전엔 들어본 적도 없는 분. 심히 정알못이기도 했다만) 지금까지 본 어떤 이미지에서든 '나는 나' 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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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16-12-2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윤석열 검사님 기대가큽니다.^^ 남기신 말도 멋지구요~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

몰리 2016-12-25 08:43   좋아요 1 | URL
이 사회의 상층부엔 무슨 저런 쓰레기같은 인간들만 가득한가..
하다가 그게 이 사회가 아니라 이 정부라서 그랬던 걸거라고 잠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정부라서 특히 더 그렇긴 하지만 사실 전반적으로, 부패하지 않고 상향이동할 수는 없는 사회라서 헬조선 아닌가. 하면서요. 이 두 분, 앞으로 영원히 우리의 모범이시게끔 정말 잘해주셨음 좋겠습니다.
 



퀴즈와 중간, 기말시험에서 

영어 작문이 거의 전부인데, 문법이 일관되게 정확하고 좋은 문장 쓰는 학생은 

(당연히도?) 아주 드물다. 다수 학생들에게, 문법의 모든 면모가 약하지만 특히 읽는 사람에게 어려움 안기는 건 

시제, 그리고 수. 내 수업 들었던 학생들 중 어쩌면 "시제 시제 시제 복수 복수 단수, 단복수 단복수..." : 수업이 이랬다고 기억하는 학생들도 있을지 모를만큼, 이 두 가지만 일단 맞게 해보자고 나는 여러 번 강조하지만 


퀴즈나 시험지를 받아보면 

다른 것 떠나서 저 둘만이라도 정확한 답안지는 소수. 


이 점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시제를, 시제를 정확히 이해하기를 게을리 함은 

혹시 영원히 현재 시제로 쓰여진 책이 있다면 (있을 수 없지만, 하여튼 어떤 종류의 학술서들이 그렇게도 보일 수 있겠으니 그런 책을 상상하면서), 그런 책도 실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 아닌가. 시제, 이것이 실은 인간을 (이 체제에, 자본주의에 적합하게) 길들이는 기제다......... 같은 얘기를 <미니마 모랄리아>에서도 볼 수 있긴 하다. 그런데 그러니까 무엇보다 이런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시제를 명확히 알고 명확히 표현해야 하지 않나. 영어를 공부하면 영어의 시제를. 다른 언어는 그 언어만의 시제를. 


저런 생각도 해보았고, 이러니 저러니 어쩌니 저쩌니 해도 외국어 교육의 핵심은 문법이다... 는 생각도. 

아니 외국어에 특히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언어든 그렇다. ; 하여튼, 한국어의 문법, 한국어의 어법에 대해 

자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국어가 모어인 사람이 외국어를 잘 공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같은 생각도. 


시제는 영문법에서 아주 큰 부분이고 어떤 문법책에서든 중요하게 다루겠지만, 수는 짧고 쉽게 넘어가는 부분일텐데 

그런데 이것도 실은 아주 중요하다는 것. 거의 관사 정도로 중요하지 않나. 영어만이 아니라, 서양 언어 전부에서 그렇지 않나. 명사의 수는 관사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 이해 없이,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사유, 상상력의 최고 고차원까지, 정확한 이해는 불가능하지 않나. 아닌가? 아닐 리가?


며칠 전 아마 주제가 animal rights 였을 텐데, 어떤 팟캐스트를 들었다. 

저 주제 하에, rights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의 아기를 인간으로 봐야 하는가'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던 중 한 게스트가 "A baby is a human being, but a non-person" 이런 말을 했고, 이 말이 생각을 자극했다. 이 말, 한국어로 쓴다면 주석 필요하지 않나. 가령, "아기는 사람이지만 인간은 아니다"고 쓴 다음 주석으로: "여기서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차원을 강조하며, 인간은 (한자 "간"이 말해주듯이) 그것의 사회적 차원을 중심에 둔다". 이 문장의 경우엔, 시제도 성도 의미의 중요한 부분이 아니지만 그런데 이런 문장도, 정확히 알아보고 이해하고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시제와 성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느 시점부터 이 포스트는 그냥 횡설수설같아 보이겠. ;;;; 내일은 내일의 횡설수설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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