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선생님 아이세움 그림책 저학년 2
패트리샤 폴라코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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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이든 그림책이든 혹은 소설책이든 간에, 책을 읽으면서 온몸이 찌릿찌릿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몸의 반응이 뒤따르지 않는 감동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책과 나는 위치를 바꾼다. 책 속의 활자들은 제멋대로 살아 밖으로 튀어나오고, 책을 읽는 나는 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입을 약간 내밀고 고민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와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자한 표정의 선생님이 그려진 이 책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읽으며 내가 그랬다. 할머니와 트리샤의 풀밭에서의 대화를 엿들을 때도 그랬고, 트리샤가 마침내 기적처럼 책을 읽어내려갈 때도 그랬고, 할아버지가 남겨준 책을 껴안고 있을 때도,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에서 폴커 선생님을 30년 만에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내 어린 시절은 열등감과 제 나름의 우월감이 뒤섞여있던 시절이었다. 트리샤처럼 글을 읽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아이들과 섞여서 놀지 못했고 어울리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는 앞자리, 뒷자리의 친구들하고 조차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아이들이 모두 “와” 웃을 때도 나는 우습지 않았다. 아마도 어울리지 않은 탓이었겠지만 아이들의 속어나 비어는 내게 전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공부를 그리 잘한 것도 아니었고, 있는 듯 없는 듯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는데도 나는 그렇게 따로 놀았다. 내 친구가 되려면 나름의 내 판단으로 연예인 얘기가 아니라 삶과 인생에 대해 같이 얘기할 수 있어야 했으므로, 친구가 많으랴 해도 많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성적인 성격에 사회성 부족의 결과이다. 그러나 스스로도 어찌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초등과 중고등 시절에는 그에 대한 열등감과 위축감을 우월감으로 뒤집어 환산시켜 혼자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트리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놀림을 받지는 않았지만 같이 웃지 못해서 늘 조금씩 외로웠다. 그나마 ‘연예인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몇 명의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었을까. 나는 폴린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고 다 자라도록 ‘선생님’이란 명칭에 애정을 갖지도 못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단순한 직업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 일에 이제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아니 사실 무언가를 가르친다기보다는 함께 느끼고 함께 즐기는 법을 배우고 싶어 이 길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린 시절을 쓸 데 없이 조숙하게 보낸 탓에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그 시절의 즐거움들이 다시 나를 휘감고 드는 것일까.

  아이를 키우면서, 속 좁은 엄마답게 소리를 꽥꽥 질러대다가 문득 반성을 하곤 한다. ‘어른’임을 앞세워 지극히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우치는 것이다. 나는 자숙하고 다시 아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마주하고 서로 들여다보고 있자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가 없어진다.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을 것이다.

  내 아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을 대할 때도 그러할 터. 트리샤의 할머니가 트리샤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트리샤의 할아버지가 책에 꿀을 발라주던 그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려면 내가 얼마나 더 자라야 하는 것일까. 껍데기 어른일 뿐인 나는, 가르칠 것보다 배울 것이 더 많은 아이들 세상에서 그저 열심히 배우고 느끼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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