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악어이야기
조경란 지음, 준코 야마쿠사 그림 / 마음산책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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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이 악어가 무슨 악어인가 했다. 이름이 '제이크'라니 분명 야생에서 행복하게 사는 이름없는 악어는 아니렷다. 그런데다 이 악어는 진짜 악어의 징그럽게 커다란 몸집과 꺼칠꺼칠한 감촉,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한 공격성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신종 애완용 악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의 삶 속에 기생하는 이 악어는 때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만큼 작으며, 때론 미키마우스처럼 귀엽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어질 만큼 사랑스럽기조차 하다. 가끔 애드벌룬이나 하늘의 흰구름처럼 부풀어 커질 때에도 언제나 우리에게 다정하고 친근한 모습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여러분들은 생각할 것이다. '아하, 관념 속의 악어로구나!' 맞다, 이것은 실재의 악어가 아닌 관념 속 악어이다. 의식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관념 속에 숨어있다 어느 순간 불시에 툭 튀어나오는 이 악어는 그가 지닌 현실 환기력으로 인해 그를 감지하는 사람들의 삶을 일순에 변화시킨다.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밥상 위에, 창틀 위에, 컴퓨터 모니터 위에, 손가락 반지 위에, 시선이 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살 수 있는 이 악어 제이크는 인간 삶의 모든 모호한 진실과 허상들의 표징인 셈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악어 이야기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제이크가 박쥐나 도마뱀, 혹은 개미핥기의 이름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우리는 '제이크'라는 고유명사나 그 이름으로 통용되는 악어 이야기보다는, 그것을 보거나 그것과 맞닥뜨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마음이 쏠리기 때문이다. 자서전적인 이 책 역시 '악어 이야기'라기보다는 '조경란 이야기'라고 하는 게 내용상 더 걸맞을 것이다. 후자의 제목이 심심하다면 '악어에 올라탄 조경란 이야기'라고 하면 어떨지.

관념 속에서 나온 것을 이리저리 굴리며 갖고 노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이 만약 그런 류의 일종에 불과했다면 나는 단호하게 '제이크는 신종 애완용 악어'라고 초입에 말해버렸을 것이다. 관념이 길러낸 애완용 악어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 조경란이 살아온 이야기의 힘을 받고 있었다. 솔직한 그 힘 속에서 관념 속 제이크는 살아 꼬물거릴 수 있었고, '뭔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관념이 가치를 갖게 되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재 속에서 뿐이지 않은가.

제이크라는 이름의 악어라거나 혹은 그 무엇이거나, 여전히 그것은 내게 모호한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완독에 두어시간이면 충분한 이 책을 읽고 조경란을 괜찮은 작가라고 인정해버렸다. 소설보다 더 힘든 작업이라고 여겨지는 자전적 글을 이만큼의 미적 거리를 갖고 쓰기도 쉽지 않았을 터이지만, 개인적 삶을 토해내는 과정 속에서 제이크라는 악어를 빌미로, 하나의 생각할 꼭지점을 내게 던져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나로서는 제이크라는 악어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작가 조경란을 보다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소중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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