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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를 봤다 ㅣ 작가정신 소설향 8
성석제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덮으니 문득 만물상(萬物商)이 풀어놓는 이야기 잔치마당에라도 다녀온 느낌이다. 주인공들의 삶은 만물상이 짊어지고 다니는 보따리의 이리저리 기워붙인 천조각처럼 낡고 심란하며 뒤죽박죽이다. 가짜투성이, 헛것들과 버무려져 있는 어지러운 인생들.
작가의 거칠 것 없는 입담은 별달리 특별나 보이지도 않는 이 이야기들에서 우리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난 뒤 그다지 인상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이 책의 내용 자체만으로는 정말로 특별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모자이크처럼 잇는 구성력이었고 작가의 탁월한 표현력이었다. 그의 단어, 그의 표현들을 통해 나는 일상 속에서 뭐라 말하기 힘들었던 모호한 느낌을 정확하게 되짚어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작가의 머릿글에 다 나와 있다. 내게는 본문보다도 훨씬 인상적인 머릿글이었다.
'인생은 반복이다. 오늘은 어제의 동어반복이며 나는 남의 반복이다. 달라지려고 해도 달라지려는 것 자체가 평범한 게 되고 말며 게다가 그게 힘들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류의 동네 장기 같은 훈수라든가... '진주는 조개의 아픔 속에 태어난다' 같은 전통있는 가짜 사탕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 심심하고 평범하며 한심한 가짜투성이와 부딪치고 맞닥뜨리는 삶의 행로이지만 어느 구석에, 그래, 네 인생이 바로 '그것'이라는, 나아가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존재의 오의(奧義), 삶의 비의(秘義)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는 않을까. 가까이 가게 되면 입을 쩌어억 벌리며 어흥, 소리치는 건 아닌지...'
머릿글을 이렇게 길게 인용한 것도 처음이다. 작가 자신의 말이 내 어설픈 감상문보다는 훨씬 정확히 이 책을 소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머릿글 말미 '아득히 멀어져간 친구를 안경을 벗고 바라보는 느낌'이란 문구는 내 마음에 명징하게 와닿아 두고두고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