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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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을 다 읽고 책을 빌려주었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마워, 다 읽었어'
'응, 어때?'
'깔끔하네. 상당히 감성적이지만 지저분하지 않고 깨끗해'
'그렇지?...'

사실 동생이나 나나 무슨 문학적 심미안이 있다고 아는 척을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끼리의 대화가 이렇게 문 밖으로 나온 것은 이 책이 한번 읽고 잊어버릴 만큼 가볍지는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가볍지 않아서'가 아니라 '잊어버리기 싫어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요 몇 년간 바깥세상에 눈을 감고 살았던 나는 <키친>을 읽기 전에 이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저 무심히 답답했던 속이나 풀자고 집어들었던 책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 바나나? 이름 웃기네' 하면서. 작가에 대한 기대가 없었으므로 이 책에 대한 별다른 기대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이 내게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키친>은 줄거리로 기억되는 책이 아니다. 모든 책들이 읽힐 때는 줄거리를 따라 읽히지만 그 모든 책들이 그것의 줄거리로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책을 줄거리로만 파악하고 따져 생각한다면 소녀적인 감성을 그럴 듯 하게 포장해놓은 연애소설 정도로 조금쯤 우습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키친>의 세 이야기 중 맨 마지막에 나오는 '달빛 그림자'는 슬픔을 느끼고 그에 대응하는 방식이 꽤나 감성적이다. 보다 설명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져 있달까. 그래서 오히려 담백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보다는 '키친'이나 '만월'이 훨씬 나이들어 보이고 (작품도 나이로 보자면) 세련되어 보인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 슬픔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내가 책이나 영화를 볼 때 가장 주의깊게 보는 대목이다. 특히나 이 책은 '죽음'이라든가 '인간 본연의 고독' 같은 것을 밑그림처럼 배경에 깔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분명 경쾌한 성격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키친>을 읽으며 우리는 우울해지거나 침울해지거나 하다못해 답답해지지도 않는다. 문체는 일상적이고 단순하며 스타카토 창법으로 노래부르듯 톡톡 끊어진다.

말하자면 쿨하다. 그러나 흔히 쿨하다고 표현되는 '빠른 감각의 전환'과 '시선 돌리기'가 아닌 슬픔을 살짝 덧씌운 담백함 식으로 쿨하다. 정(靜)적인 담백함. 그리고 우린 그 담백함을 껌처럼 씹으며 여운처럼 남는 그 슬픔, 혹은 고독의 향을 즐긴다. 사실 '우리'라기보다는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이야기지만.

문득 어느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여자 주인공이 어두운 밤 텅 빈 수영장에 들어가 수영을 하던 장면이 있었다. 그녀는 물 속에 잠겨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러지? 걱정이 될 정도로. 그렇게 한참을 물 속에 들어가 있다가 후-하고 그녀가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슬픔을 내면화하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울지도 않았고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씬이었다.

<키친>은 어떤지. 일상의 모든 일들이 '굉장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별 일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적 같기도 하고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한' (본문 57p) 속에서, 우리는 매일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부산하게 시간을 떠나보낸다. 그들처럼. 세상속 모든 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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