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쟈크 엘룰 / 대장간 / 1992년 12월
평점 :
절판


 자끄 엘룰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으나 그의 책을 읽어보기는 처음이다. 그가 사회개혁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독교(한국의 김진홍 목사같은)를 내세우면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대안제시에 열정적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약간 현학적 논증들로 답답하고, 지루하지 않을 까 생각했는 데 가벼운 책들에 길들여져 있는 요즘 세태에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현실성있고, 바른 문제제기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요약이 필요한 것 같아 요약을 하면서 중간중간의 소감들을 써 보았고, 마지막에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1장 문제제기를 다루면서, 이땅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소명과 사명을 다루고 있다. 성경만이 그 ‘소명’이 무엇인가를 말해 줄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할 ‘역할’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성경은 이 역할을 세 가지로 정의하는 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며,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곧 저자는 세상에서 감당할 특정한 역할, 즉 세상을 보존하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가를 알려주며,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세상 속에서 계속 새롭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징’의 삶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한 모순적인 한 숙명에 놓여있다고도 말하는 데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죄를 감소시킬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죄된 현실을 묵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앞에서 저자는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세상가운데서의 참여와 도전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그는 ‘보존’이라는 말로 쓰는 데,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심으로써 그것을 보존시키시며, 그 보존을 활용하심으로써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문을 내가 헬라어 성경을 보며 사역(私譯)을 해본 바로는 ‘세월’은 하나님의 때,시간,사건으로 번역할 수 있고 아끼라는 ‘구속하라’‘값을 지불하고 구출해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때가 악하기에, 시대가, 세상이 악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지혜로운 삶의 대한 도전과 명령은 하나님의 사건이 이 시대에 임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종말의 때를 오게하라, 댓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 나라가 오게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문제의식과 사상은 내가 사역(私譯)하고, 이해한 관점과 어느정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2장 기독교의 혁명성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그의 진단을 시작하며 그가 쓰는 용어가 그의 사상을 대변해 준다. ‘혁명’. 공산주의만 혁명을 하는 줄 알았지, 또는 분에 쌓인 농노계급들만 그런 혁명을 하는 줄 알았지 유순한 양과 같은 우리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마치 딴 얘기하듯, 과격분자가 얘기하듯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단은 단호한 어조로 세상이 보존되려면 진정한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현재의 이 세상는 타락으로 인해 뒤틀려져 있으며, 세상과 하나님 나라사이에는 대립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대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데 필요한 세가지 지침을 설명하는데,  첫째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인간의 진상을 보여주시는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와 일치되게 살 수 있는 정치 사회적 조건들을 발견하여야 한다. 둘째, 하나님이 제정하신 일정한 틀 안에서 작업하여야 한다. 그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자신이 속한 사회에 해를 끼치게 된다. 셋째, 이 보존의 질서는 구원 선포를 목적으로 할 때만이 의미가 있게 된다. 그 지침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하고, 종말을 앞당기는 진정한 혁명(교회는 본래적으로 혁명적 성격을 띤다고 말함)이 일어나야 하며, 세상을 알아서 현대 문명의 억압에 대항하여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대안과 혁명적 상황을 창조할 것을 도전한다.

 3장은 세상을 알고,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어떠한 우상에 사로잡혀 있는 지를 말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수단화’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문명에서는 ‘더 이상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우리는 집단의 목표를 상실한 채 거대한 수단만을 갖고 있다고 분석한다.과학과 기술, 경제활동, 국가 등 자신을 섬겨야하는 그 수단이 자신을 지배하여 현대인의 우상이 되어 수단 앞에 목적을 상실하고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그 수단은 수단이 수단을 낳고, 수단이 자신을 정당화 시킨다. 그래서 인간이 전혀 수단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고, 삶의 전영역으로 확산되며, 이 수단에 대해 인간이 부과하는 모든 목적은 명백히 가치없고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마치 덫에 걸린 것 같이 수단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실앞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목적과 수단의 분리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은 수단과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설립을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었던 것이고, 동시에 목적이요, 구원과 나라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 세상의 반대상황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앞에 우리는 수단의 노예됨에서 극복해야 하며, 씨름하여야 하는 데 하나님의 원리는 하나님이 목적을 세우시고, 인간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 목적이 인간 사회안에 실현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성경에서 찾아야 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금 강조하며 하나님께 달려있고, 행동과 제도적 개혁을 우선하기 전에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존재됨을 온전히 자각함을 말한다. 즉, 우리는 살아있어야하든 데, 세상속에 메이지 않는 ‘자유’의식을 가져 목적을 바로 세우며 수단은 수단으로서 자기자리를 찾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4장은 기독 지성인의 위치와 임무를 나타낸다. 3장에서는 영적인 삶의 존재됨의 회복과 그로인한 삶의 우선순위를 말했다면 이 장에선 지성의 제자도, 즉 ‘마음을 새롭게함’(롬12:2)을 말하고 있다. ‘마음’은 헬라어로 ‘누스’인데 이것은 지성적 마음을 나타낼 때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저자는 우리의 믿음이 지성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키며,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과 관계가 있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단순한 지적 차원의 변화가 아니라 성령께서 행하셔서 마음에 영감을 주시고, 새로운 사고방식과 살고있는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심으로 삶 자체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 변화의 목적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현실 인식에 대한 거부함이 팽배해 있고,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그림자, 신화들이 우리를 가리우며, 혼란스러움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앞에 우리는 어떻게 간격을 좁힐 것인가? 세상과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해야하며, 신화들, 이전 시대의 지적 교리들(공산주의, 정치적 자유주의...)을 무너뜨리고, 객관적 실재를 발견하려는 의지, 즉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실들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또한 인간적 차원에서 파악하고자 하며, 현대의 문제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여하고 결단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를 인식하려는 이 노력은 결국 성령께서 우리가운데 행하셔야 한다. 성령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세가지 정도로 우리의 할 중요한 일들을 요약해 볼 수 있는 데, 먼저 이웃을 재발견하는 것인데, 성령께서 진정한 인간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에 그 언어를 발견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둘째는 그 사건, 그리스도의 사건의 재발견이다. 단순한 역사속의 사건 혹은 신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를 살리는 근거가 된다는 확신으로 인해 그 사건이 중심이되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의미를 재발견토록 권면하는 것이다. 셋째는 거룩한 영역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인간지성의 한계를 진단하고, 그것이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사이를 나누고 있는 경계선을 발견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다.    

 
마지막 5장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룬다. 여기엔 이 책의 목적과 최종적 대안을 어느정도 제시하고 있는 데 그러나 저자의 말은 ‘이 책이 해결 방안을 내놓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갱신을 위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과거 이레네우스나 칼빈은 나름대로 그 시대에 맞는 대안을 제시함으로 나왔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이 시대를 분별하고 있는 가? 어떤 영적 통찰력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의미를 분별하고 있는 가? 사탄의 전략은 복음을 중립화 또는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싸워야할 적은 누구이며, 우리의 전투는 어떤 성격의 것인가 또한 어떠한 무기들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며, 이 싸움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저자의 도전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싸움을 하는 가운데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진주를 세상 사람들에게 던지는 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단지 그들은 개와 돼지와 같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이니 상종도 하지 말라라는 의미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들을 귀를 만들어 줄 정도의 다양한 삶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적인 수준의 회복과 복음에 대해 반응을 보여야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닐까? 그런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모든 인간을 돼지와 같이 존재케 만들어 거룩한 진주를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했다면 우리는 그렇게 만든 현대 문명의 토대들을 공격하는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 있어 두 가지 잘못(첫째, 기독교의 이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이념들 중 하나를 채용하여 기독교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둘째, 성경 속에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찾은 질서를 객관적으로 세상에 제시해놓고는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려 세상이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복종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그 정도의 작업에 만족하는 것이다.)을 피하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나칠만한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모든 것에 대해 신앙의 빛에 비추어 의문을 제기하고 재검토하여야하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재검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변화된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부단한 성경연구(Text)와 살고있는 이 세상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Context) 등을 통해 그러한 사상을 형성해가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서구 기독교에 대한 개혁과 혁명과 같이 생각하는 한 관점을 제시하는 데, 공동체적 차원의 과제를 말하면서 물질적 차원에의 도움, 공동체적 기독교를 말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물든 기독교의 위기성을 진단할 뿐아니라 사유 재산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살짝 엿보이고 있다. 그러나 또한 사회적인 운동으로의 변질을 우려하고 있는 데, 복음의 선포를 통한 영혼의 구원과 사회정의를 위한, 구조악을 대항한 복음에 대한 균형감각을 상실할 때 기독교가 영향력을 잃어갔다는 것을 반영한 저자의 목소리인 것 같다. 

  다른 책을 통해 이어져 갈만한 이 책에서 말한 다양한 문제의식과 약간의 대안에 대한 방향성을 맛보여줌과 구체적인 대안제시의 필요성(당위성)을 남겨 놓았다. 현대 사회의 모순성, 유혹, 우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며, 그것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에 있고, 복음의 그 자체의 생명력에서 나온 혁명성과 영향력을 온전히 회복, 자각하여 세상에 정복해 나가는 것이다. 단순히 세상 조류에 흘러가지 않고 세상에 바른 대안과 기독교적 목소리를 내야할 때이다.

그러나 현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서구 기독교가 자끄 엘룰이 말한 대로의 대안을 준비하지 못하고, 복음의 생명력과 신앙의 중심성을 잃어간 자유주의 기독교에 붙잡혀서 대안준비는커녕 탁상공론으로 일삼아서 그 혁명성은 잃어갔고, 결국에는 그가 우려했던 대로 유럽의 기독교는 폭삭 주저앉은 듯 보인다. 그에 비해 한국 기독교는 어떠한 가?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진실되고 깊이있는 성경에 대한 연구(Text)와 이시대의 흐름과 사상에 대한 진단(Context)에 동떨어진 민중이 좋아하는 복음을 선포하고, 왜곡된 목회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내 교회의 교세 확장에 중점을 두진 않은 가? 카타르시스적인 자신이 받을 축복만을 추구하고 현실과 복음의 생명력에 대한 둔감과 그로인한 세상의 모순됨에 대항하는 하여 대안을 제시하고 바로 일으켜 세우려고 치열하고 고민하고 전진하는 혁명성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이 현실 아닌가? 안타깝다. 자끄 엘룰과 같은 유럽사회에 예언자와 같은 목소리를 우리 한국 기독교는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인 연구나 발 빠른 대안제시보다 그의 기초 작업으로 바른 성경연구에서부터 시작해야할 것이다. 원어에서부터 차근차근 기초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말하는 석의(exegesis) 없는 시대 적용적 해석학(협의의 해석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 가? 신학교안에서만 석의작업을 하고, 졸업 후엔 교회 성장을 위한 다양한 도구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현 흐름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깨어있는 몇몇의 교회의 지도자들, 목회자들부터 기반다지기 작업을 새로 시작하며, 현실의 모순과 실태에 대한 바른 진단과 치열한 적용과 영적 전쟁에 대한 싸움의 몸부림, 그리고 종말에 열어 가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슴에 새기며 그에 따른 삶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땅 끝까지 가는 미전도 종족 선교와 아울러 이 시대의 사회적 악에 대한 구석구석의 선교 또한 함께 진행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는데, 이 거대한 싸움과 과제 앞에서 우리의 교회가 하나 될 근거는 충분히 존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브 액츄얼리 - [할인행사]
리차드 커티스 감독, 리암 니슨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는 한마디로 휴머니티. 사랑 지상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감정이나, 자기로부터 근거를 두어서, 원천에서 나오는 사랑은 불완전하고, 채워지지 않는다. 정작 지금 당장은 강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고 영원한 것 같아도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불완전한 죄성의 존재이기에 점차 이기적인 속성이 올라오고 그것 앞에 지배당하기도 한다. 그것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고, 그 사랑이라는 상대적인 논리 앞에 또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이므로 이해해 주고자하고, 모든 대중문화의 대표 주자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내 스스로, 타락한 죄성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기적인 사랑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의 죄성이 변화된 다음, 거듭난 다음, 성령의 역사로 내 자신이 완전히 새 사람이 된 다음 나는, 또한 상대방도 진정한 사랑을 배움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사랑과 이 세상의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함께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순서는 먼저 변화된 다음 새로운 인종의 사람들 끼리, 언어가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성령의 교제가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다.

  젊은의 사랑(12-14세 초-중학생이상). 미국, 영국 애들은 부모와도 오픈open대화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섹스의 얘기도 농담으로 하고, 그 나라의 문화자체가 성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표현을 하라는 말을 했고, 가슴에 묻어 두지 말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있다. 그런데 마구 고백하는 것은 좋은 것일까? 건전한 고백과 건전한 교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이 결혼과 연관되지 않고, 그때의 느낌이나 감정 앞에 지배받아서 책임지지 않고, 자신이 책임질 필요도 없는 그 문화가 되면 흥청망청,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도 없고, 나아갈 목표의식도 없다. 애들에게도 사랑은 할 수 있으되,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되, 책임을 지는 삶을 살라. 성경이 말하는 성에 대해서 가르쳐 주라. 그리고 open 해서 자녀와 대화하도록 하라.

국경 없는 사랑 where 의 차이가 없는 사랑 , 수상과 비서와의 수직의 차이가 없는 사랑, 미국지상주의 현재의 환경을 넘어서면 더 나은 사랑과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결혼한 친구의 아내를 좋아한 사랑 그 사랑도 고백하는 게 좋다는 책임질 수 없는 사랑, 그것은 이기적인 게 아닐까?  환경의 한계 속에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자신이 맡아야할 책임이나 사명이 있는 가운데서 해야 하는 사랑, 이 사랑은 크리스천하고 비슷한 거 같다. 우리에겐 사명이 있으므로 같은 사명이 없는 사람과는 함께할 수가 없다. 사랑은 같이 하나의 미래를 보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자기에게만 집중하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많은 사랑, 다양한 사랑을 보여주었는데 크리스마스에는 그 사랑을 고백하라고 말한다.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이렇게 돼버렸나? 세상의 로맨티스트들이 기다려오고, 자기 마음껏 고백하고, 자기들끼리 즐기는 시간이 되었단 말인가? 아 슬프다. 아 안타깝다. 성탄절의 참 의미를 알고 싶다. 또한 내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를 알려주고 싶다. 교회가 품은 이 깊은 소식을 알려주고 싶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그 모든 사랑의 원천과 근원을. 그리고 그 근원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할 사랑의 본질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의에서 확신으로
알리스터 맥그래스 / IVP / 199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드는 주변에 이 저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로 인해 어느정도 알고있었고, 그의 글을 약간 접해봐서 낯설지는 않았다. 그는 어렵지 않고 매끄러운 문체와 체계적인 사고와 논리로 독자에게 접근해가는 사람이다. 이 책도 내용은 그리 많지 않고 작은 책이지만 신앙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회의 그 자체와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과 하나님과 복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시각을 가지므로 회의를 극복해 내고, 이러한 회의는 결국 우리의 정신을 잃게 하거나 당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과 지식을 자라게 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회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잡히지 않을 무렵 성경의 용어적 접근은 이해를 용이하게 하였다. 주저함, 우유부단함, 두마음을 갖는 것과 마음의 상태로 표현되는 회의라는 성경의 용어를 통한 예시는 이해를 도와주었고, 이 회의는 또한 성화의 과정속에 죄로인해 오염되어있고, 여전히 죄의 세력안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싸워가야하는 과정속에는 필연적이며, 산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수 있는 마음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에겐 어떻게 이 회의를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 남은 것이다.

 저자는 먼저 복음에 대해 회의를 가질 수 있음을 말하며, 복음은 인간 본성의 근본 문제 즉 사회가 아무리 진보할지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문제임을 말하고, 또한 복음의 배후에 진정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힘과 영향력은 잃지 않고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기에 신뢰할 수 있음을 말한다. 다음은 자기 자신의 대한 회의를 말하는 데, 우리 자신이 쉽게 가질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욕구, 열등감과 죄책감과 같은 하나님앞에서 자격미달의식에 대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신 은사, 그리고 각자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말하며, 인간의 연약을 통해 그 능력을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세 번째로 말한 예수님에 대한 회의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성, 부활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가 분명하니 주를 신뢰하며, 회의를 극복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예를 든 하나님에 대한 회의는 ‘내가 이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라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회의감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인과율’에 따른 하나님의 사랑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회의 자체를 너무 열중하여 빠져들지 말고, 영적 성장의 촉진제로서, 그것을 통해 자라게, 성숙케 하실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회의 치료책으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았던 돌밭에 떨어진 씨앗,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을 묵상하고, 적용함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저자의 탁월한 적용력과 내 삶의 연약한 부분들을 알게 되고, 회의에 들어있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상담하고, 도와줄 것인가에 대한 통찰과 교훈을 얻게 되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이 신앙이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경우는 좋은 토양으로 바꿀 것을 권면한다. 이것은 곧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과 이해을 깊게하는 데 노력하고 시간을 들여야 함을 말한다. 회의를 가라앉히는 방법은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믿음을 성장시키고, 자극과 도전을 줄 수 있는 책을 읽으라고 말한다. 또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많은 유혹과 환난, 압력앞에 쉽게 무너지며 회의에 빠질 수 있기에 영적 지도자와 동역자들과 삶을 나누고 도움을 얻기를 권면한다. 또한 영적 훈련을 개발하여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며 그러한 과정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더욱 순종과 헌신이 깊어지도록 하는 것이 영적훈련의 목적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성경을 통해서 출애굽의 광야의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의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있었던 회의와 십자가이후 부활이전에 제자들의 회의를 다루며 그런 상황가운데에 우리도 있을 수 있으나, 믿음의 반대쪽으로 생각하게끔 하는 죄악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먼저알아 대처해야함을 말한다.

 내게도 이런 회의가 종종 찾아올 때가 있음을 고백한다. 사역중에 지칠때, 일에 쫓겨서 일이 앞서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묵상함이 무너졌을때,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성품이 내게 멀리 느껴졌을 때, 그리고 규칙적인 영적 훈련과 영적 전투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했을 때이다. 이 책을 보며 나의 분주함과 영적 훈련의 우선순위를 되새겨 보게 되었고, 회의에 있는 우리의 지체들에게 차분히, 그리고 성실하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손동희 지음 / 아가페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자신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자신의 고백과 다른 사람의 증언들을 토대로 전기를 쓴 것이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삶을 통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희생과 사랑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감동과 자신의 삶에 대한 회개를 가져왔다.

 내가 이 간증을 처음 접한 것은 94년인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교회에 손동희권사님이 오셔서 간증집회를 하셨는 데 3시간 가량 쉬지 않고 하시는 동안 나는 시작한 지 얼마되지않아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고 간증이 끝날 때까지 흐르는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때의 감동과 눈물은 두고두고 나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 주님의 성품으로의 변화가 어떠한 것인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속한 캠퍼스에 손권사님을 초청해서 간증집회를 열기도 하여서 많은 감동을 끼친적이 있었다. 곧 책으로도 다시 접하면서 단순한 감동 뿐만아니라 당시 일제치하에서 어려웠던 신앙생활, 그리고 공산주의 세력앞에서의 핍박과 신앙의 도전앞에서 담대함과 초연함, 그리고 본성을 뛰어넘는 성령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의, 그리스도의 사랑에의 실현을 공감하면서 또한번 눈물을 닦았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먼저 손양원 목사님의 아버지의 신앙을 보면서 한 집안의 신앙의 조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초창기 우리 민족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얼마나 큰 문화충격과 핍박을 감수해야 했는가? 많은 토속신앙과 제사, 그리고 선입관들을 깨는데 신앙의 조상은 얼마나 큰 고생을 했던가를 되새겨 보면서 나의 신앙의 안일함과 무덤덤함에 가슴아프고, 마음을 동여매곤 했다. 손문준 장로님이 처음 교회나갔을 때 기도해 주었던 한 성도의 뜨거운 기도가 예비된 영혼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하나님앞에서 삶의 의미와 신앙을 발견함이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아직 다 복음화되지 못한 나의 가정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 전도자의 심정을 지니고, 영혼을 사랑했는가? 우리교회에 새로운 신자가 왔을 때, 초신자나 모르는 지체가 왔을 때 얼마나 그 영혼을 품으며 기도하였는가? 무책임하지는 않았나를 되새겨보게 되었다.

 둘째는 이런 신앙의 계대가 죽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참 소중한 것을 느낀다. 손문준 장로님의 신앙이, 손양원 목사님에게, 그리고 동인, 동신 형제에게 이어지는 것을 볼 때에 그 신앙의 대 물림,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의 중요성, 신실한 가정안에서의 삶의 모범을 보면서 자라가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지금의 현 시대의 신앙인들은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

셋째는 동인,동신의 억울한 죽음(순교)을 통해서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자들의 과격성, 행동력을 보면서 잘못된 시대사조와 인간중심의 역사관의 파행,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살인이 정당화되는 당시의 현실앞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고, 역사는 다음세대에 꼭 심판됨을 느꼈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생명의 복음과 사상이 잘못된 시대사조를 정복해야 함을, 그래서 이땅과 인류를 하나님앞에 바로 세워야함을 절감했다.

넷째는 손양원 목사님의 10가지 감사기도를 읽으면서 정말 우리는 가짜신앙 생활을 하는 건 아닌가? 껍데기의 신앙만을 하면서 만족하며 살지 않았나를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이를 아들을 삼으신 것은 정말이지 나로서는 한계상황이다. 설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떻게 그를 계속 보면서 아들삼아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복음의 능력은 이리도 큰 가? 참으로 감동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그때는 이렇게 신앙을 지키고, 복음의 순수성을 고수하고, 순교의 피를 흘리는 것이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신앙이었는데, 지금의 시대는 핍박이 없고 자유롭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 진정한 신앙인으로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단지 이제는 지키는 신앙이 아니라 정복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 까? 복음안에서의 삶, 본성을 이기는 성령안에서의 삶을 살아감으로(비록 많이 넘어질 지라도), 그 삶의 탁월성과 높은 의식과 대안을 제시함으로 세상과 악한 세대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구출해 내고, 그 주님의 종말의 시간이 오게 하는 데 앞장서야 할 때인 것 같다.

우리시대의 순교적인 영성으로 오늘을 살아감이 정말 필요할 때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미도 한정판 - 일반판 + 싸인액자(동판+아크릴) + 스페셜북 + 엽서6종 + 양장본케이스 (3Disc)
강우석 감독, 설경구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한국영화로서 참 잘된 영화라고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생각 안하고 봤는데, 주제의 문제의식, 감독과 각본자의 깊이있는 역사적 탐구와 그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잘 묘사했다.

 설경구,안성기,정재영 등과 조연들의 연기들은 실감있었고, 폭력적인 장면과 잔인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지만 리얼하게 묘사하였고, 특수효과나 전투장면들은 한국영화의 차원을 한차원 높인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성기가 마지막 장면에서 교육대장으로서 자기가 키운 병사들을 죽이는 임무는 참으로 가혹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대처하는 방식은 불만이 좀 있다. 실미도 부대원이 듣게하고 교관들도 듣게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전쟁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던 그 나약한 리더쉽은 어떤것인가? 지도자로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나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미리 더 대화를 하여야 끝까지 투쟁(鬪爭)해봐야 되지 않았을까? 내가 죽던지.. 참 모를 일이다. 어려운 문제다.

역사를 왜곡했다는 평가도 받는 다. 역사 왜곡이라. 역사는 항상 누가 해석하고, 어떤 사관에 의해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다만 fact, 즉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될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