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기록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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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엄청 많아요!!

 

[어리석은 자의 기록][우행록]의 개정판입니다. 제가 [우행록]에 대한 리뷰를 올린 것은, 201051일이니, 벌써 7년 전의 일이네요. [어리석은 자의 기록]을 읽으면서 처음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위안해봅니다. 예전 리뷰를 보니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싶어, 뭔가 과거의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에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2010년의 저는 일을 시작한 지 3년차, 그때 겨우 하는 일에 익숙해져 처음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여유를 가지면서 오히려 애정은 깊어졌죠. 하지만 인간관계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떤 방법으로 그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기 힘들어요. 오히려 나이를 먹으니 더 생각이 깊어지고 복잡해져서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전보다 깊이 의식하지 않게 된 건 분명 좋은 일이겠죠. 조금은 초연해졌다 할까요.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고 아껴주는 사람에게 충실하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요. 어찌보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인가요.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이 글을 보면, -뭐야! 이런 생각을 했었어-라며 또 다시 제 자신을 질타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7년 전에는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리뷰는 다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었어요. 읽다보니 어쩌다 그리 되었고, 그건 아마 제가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인간관계가 아닌 따름일 거에요. 한 사람이 타인을 보는 시선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그 주관적인 시선에 하나씩하나씩 반응하며 반박하는 것도, 수긍하는 것도 조금은 시들하게 변해버리기도 했고요. 이번에 읽으면서 제가 마음이 쓰인 사람은 희생당한 일가족이 아니라 범인이었어요. 3세 여아를 영앙실조로 사망하게 한, 유아 방조 혐의로 체포된 그 어머니, 다나카 미쓰코.

 

무서워요. 제 상식으로는,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식 밖의 사람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인물이죠. 일가족 네 명을 몰살시킨 그 행동은 무척 잔인하고, 제 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무서웠지만, 동시에 무척 안타깝고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아버지에게 물리적이고 성적인 폭력을 당했음은 물론, 친어머니에게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어요. 오히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어머니로부터 여성으로서의 질투에 의한 홀대와 멸시까지 당합니다.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든 아이를 지켜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하물며 자신의 남편이 딸을 성폭행했는데 여자로서 질투라니,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그녀가 의지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을 지켜주려던 오빠, 한 사람 뿐이었어요. 지옥 같은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다나카는 어떻게든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무기는 미모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어린 시절 학대의 트라우마와 함께 그녀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어요. 상처투성이인 그녀가 낳은 아기가, 엄마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음은, 어찌 보면 정해진 일이 아니었을까요.

 

정상이라고 하기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다나카가 저지른 일을 알고 있었고, 그녀를 위해 인터뷰를 시작한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일을 벌이죠. 그가 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낀 건 무엇이었을까요. 죽은 사람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것? 여동생을 위해 필사적이었을테니 그 점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분명 알게 되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가고 있고, 어떻게든 자신을 타인의 우위에 두고 싶어한다는 점을요. 제가 인터뷰 속에서 느낀 건 그런 것들이었어요. 은연 중 내비치는 자신의 장점, 몰랐다는 듯 알려주는 타인의 약점. 그래서 그는 더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자신을 보호해주어야 하는 존재로부터 마땅히 보호받지 못한 남매의 상처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는 별개로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어요. 우리 아기곰 생각도 많이 났고, 아기곰이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두렵기도 하고요. 아기곰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 그 복잡다단한 관계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질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은, 아기곰은 부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닮지 말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중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따뜻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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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이별
박동숙 지음 / 심플라이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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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 의정부에 있었을 때,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가는 길에는 항상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와 함께 했었습니다. 하루의 피곤을 느낀 것도 잠시, 차분하고 달콤한 허윤희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마음을 아련하게 만드는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 꿈결 같았어요. 40, 혹은 1시간 가까이 걸리던 퇴근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그 길 위에 나만 혼자 있는 것 같은 그런 착각도 했었죠. 몸은 피곤했지만 주차하는 순간이 아쉬울 정도로 그 때의 감성은, 정말 최고였거든요. 허윤희 아나운서가 들려주는 사랑이야기는,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었고, 때로는 그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루던 날도 있었습니다. 귀로만 듣던 그 이야기들을 겨우 책으로 만났네요.

 

책을 읽는 내내 한동안 듣지 못했던 허윤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한밤의 라디오를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책을 읽는 그 순간만큼은 과거의 저를 떠올릴 수 있었죠. 그리고 제목이 [어른의 이별]인만큼 어쩔 도리 없이 과거의 인연들이 떠오릅니다. 과거의 인연들이 아쉽지는 않아요. 투닥투닥하더라도 저는 지금의 짝꿍을 무척 사랑하고, 이 사람이 아니면 오롯이 나를 받아들여주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도 있으며, 우리 아기곰을 얻게 된 건 정말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짝꿍 외에, 그리고 우리 아기곰 외에 그 어떤 다른 존재도 떠올릴 수 없을만큼 이 두 사람을 굉장히 아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헤어지던 그 때, 그리고 책을 읽는 순간에 떠오르던 질문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손을 놓은 건 내가 먼저였을까, 그가 먼저였을까. 시간이 흐른 뒤의 그의 연락에 내가 다른 식으로 반응했다면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짝꿍을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온 옛 인연의 소식에 잠시 마음이 어지러웠던 때도 있었거든요. 이제와서는 부질없는 질문이겠지만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처럼 저의 인생도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텐데 그 또다른 모습은 어떨지에 대한 순수한 의문이라고 해두고 싶네요. 다시 한 번. 전 짝꿍을 많이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히힛.

 

오랜만에 사랑과 이별에 관한 글을 읽었더니 마음이 울렁울렁합니다. 때도 알맞게 찬바람도 조금식 불어주고 있네요. 사랑의 순간도, 이별의 순간도 저의 인생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그 시간들의 터널을 지나 짝꿍을 만났고, 우리 아기곰을 만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해요. 부디 지금 곁에 있는 인연에 최선을 다해주세요. ‘어른의 이별이 무엇인지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맺어진다면 좋고 맺어지지 않는다 해도 후회 없이, 가슴은 아파도 다시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사랑을 하는 여러분,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 응원합니다. [어른의 이별] 덕분에 잃어버린 감성을 찾은 기분입니다. 흐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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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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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마쿠라에 다녀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일본에서 어학연수 중 같이 공부하던 언니, 오빠와 함께 갔었는데, 그 때는 딱히 가마쿠라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 역사적으로 의미도 있고, 또 휴일인데 기숙사에 마냥 있기가 싫어서, 그리고 먼 곳은 여행가기가 힘드니 비교적 가까운 곳을 고른 경향이 컸어요. 그러다보니 다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 위주로 헐렁헐렁 구경하다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나니 왜 좀 더 그 때의 시간을 즐기지 못했을까 그런 아쉬움이 생깁니다. 다 컸다면 다 컸고, 어리다면 어린 스물 한 살이었거든요. 제 자신보다 주변의 눈을 더 생각하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눈이 아직 없었다고 할까요. 돌아와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저런 일이 생기고 생활에 쫓기다보니 한 번 갔던 곳을 또다시 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네요. 가마쿠라의 이 골목 저 골목, 여기저기를 좀 더 누볐어야 했는데 그립습니다.

 

[츠바키 문구점]은 그런 가마쿠라에 위치한 문구점이에요. 대대로 대필을 의뢰받아 명맥을 이어가는 가문이기도 하지요. 주인공 하토코, 일명 포포라 불리는 그녀는(하토는 일본어로 비둘기를 뜻해요.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일본에서는 포포라 한답니다) 선대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가게를 이어받아 문구점을 경영하고 있어요. 물론 조기교육을 받은 덕분에 할머니가 하시던 대필도 같이 하고 있지요. 이렇다 할 친구는 없지만 옆집에 사는 할머니 바바라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고 대필을 하면서 맺게 된 인연들과 정다우면서도 평화로운 생활 중입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안고 츠바키 문구점을 찾은 사람들의, 여름부터 봄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손편지라니, 말만 들어도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지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네요. 저는 요즘도 종종 손편지를 쓰곤 합니다. 짝꿍의 생일, 우리의 기념일, 그리고 짝꿍과 다퉜을 때도 편지를 써요. 사실 저보다는 짝꿍이 편지를 자주 쓰는 편입니다. 다퉜을 때 주로 메모나 편지를 써서 주더라구요. 흐힛. 덕분에 저도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손편지를 잊지 않고 써나갈 수 있었죠. 포포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그에 맞는 편지지, 봉투, 우표, 그리고 글씨체까지 고릅니다. 까다로운 시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도, 돈을 빌려달라는 지인에게 보내는 거절의 편지도,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첫사랑에게 보내는 편지도 모두 훌륭하지만, 그녀가 단 하나 보내지 못한 편지가 있어요.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보내는 마음. 이제는 전달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전하죠.

 

마구마구 감동이 뭉실 흐른다거나 하는 작품은 아니에요. 다만, 소소한 일상이 따뜻하게 그려져 있어서 좋았고, 편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설명들이 상세히 쓰여져 있어 하나의 일본문화책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멋진 부분은 포포가 쓴 편지들이 모두 일본어 원문 그대로 실려있다는 점이었어요. 오랜만에 접한 원문이라 그런지 저에게 그리움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답니다.

 

문득 그리운 것들을 잊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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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7 - 민폐 삼형제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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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저와 두식이의 비슷한 점을 발견했어요. 문득 생각났는데요, 대학생 때 학과 방에서 다 같이 자장면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독특하게도 삶은 달걀이 같이 오는 중국집이었는데, 저는 삶은 달걀을 마지막에 먹는 게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면을 먹고 있는 중, 어떤 선배가 제 삶은 달걀을 홀라당 먹어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대경실색한 제가 펄쩍 뛰었더니, 그 선배 왈, 먹기 싫어하는 줄 알았다며. 아니, 물어는 봐야하는 거 아닙니까! 두식이도 육포를 무척 좋아해요. 그래서 아껴 먹으려고 코로 살짝 옮겨놓으려는 찰나, 마담 북슬씨가 두식이는 육포 싫어했던가?-하시며 가져가버리십니다. 두식이도 얼마나 놀라고 슬펐을지, 그 마음, 저는 이해합니다. 훌쩍.

 

귀여운 냥이 콩알, 팥알과 토실토실 순박한 개 두식이의 일곱 권째 이야기이옵니다. 이번 책에서는 뉴페이스가 등장해요. 무섭게 생기고 퉁실퉁실한 고양이 그레이. 그녀는 집에 들어온 첫날부터 두식이의 밥그릇을 빼앗고 심지어 두식이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콩알, 팥알이에게는 마치 어미 고양이처럼 잘해주면서 말이에요.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랑 똑 닮았다며 반가워하는 두식이를 첫만남에서부터 공격, 손톱으로 할퀴고, 온몸의 털을 세우며 경계합니다. 토실하지만 소심한 우리 개 두식이, 의기소침해지고 무서워서 그녀를 피하는데, 그레이의 숨은 사연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떤 일을 계기로 두식이와 그레이의 사이가 살짝 좁혀지는 듯 한데요, 과연 이 둘의 사이가 어떻게 발전할지 다음권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강아지와 냥이들이 있는 집은 따뜻하고 정겹겠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면. 그리고 저는 일단 주부니까요. 결벽녀는 아니더라도 발바닥에 흙이나 여러 가지를 뭍힌 채 집에 들어온다거나 침대 위에 올라간다는 상상만 해도,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럽기도 해요. 짝꿍은 아기가 좀 크면 강아지를 키우자는데, 그러면 일단 큰 집으로 이사가자고 했습니다, 후훗. 하지만 전 큰 집으로 이사간다고 해도 강아지보다는 냥이를 더 키우고 싶어요. 강아지도 좋지만 저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냥이들. 과연 실현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그날이 오면 꼭 냥이를 선택하리라 결심해봅니다. 그 때까지는 이 [콩고양이] 속 콩알, 팥알, 두식이와 가족들로 마음을 다독여보려 해요.

 

그나저나 8권 언제 나오나요. 번역자님, 힘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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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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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으로 인해 고립된 마사 판즈워스 여자 신학교-. 교사도, 학생도 모두 여자인 이곳에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정확히는 부상당한 채 학생 중 하나인 어밀리아 대브니의 도움으로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죠. 고독하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각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던 학생들은 물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학교의 교장 마사 판즈워스와 그녀의 동생이자 교사인 해리엇 판즈워스까지 처음의 경계심을 내려놓고 이 낯선 남자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남자의 이름은 존 맥버니, 상병이고 스무 살입니다. 학교의 그 누구보다 고독하고 남들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독선적인 에드위나 모로, 규율에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에밀리 스티븐슨,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고 그 외모를 이용할 줄 아는 얼리샤 심스, 자연과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소녀 어밀리아 대브니, 나이는 제일 어린 열 살이지만 그 나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게 조숙하고 약삭빠른 메리까지, 남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이제 막 청년의 길로 들어선 이 소년에게 대책없이 빠져들어가요.

 

독선적이고, 순수하고, 아름답고, 규율에 엄격하고. 각자가 가진 조건은 다 다르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 그들은 고독합니다. 제가 그녀들에게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었어요. 학교에 남은, 단 다섯 뿐인 학생이고 친구들이지만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진심으로 털어놓을 수 없죠. 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을 지켜야 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의무를 해내야 하는 마사 판즈워스도, 언니보다 정은 많아 보이지만 다소 무절제한 사람으로 보이고 우유부단한 해리엇 판즈워스도, 그녀들은 자신이 혼자라고 느낍니다. 오죽했으면 판즈워스 집안의 흑인노예, 마틸다 판즈워스만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처럼 느낀, 가장 중심을 잘 잡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여겨졌어요. 그런 그녀들의 마음 어느 한 곳을, 뱀의 혀를 가진 소년 맥버니 상병의 달콤한 말들이 쿡쿡 찌르기 시작합니다. -달링, 당신이 가장 아름다워요, 나는 이 학교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해요, 오 달링.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어요.- 시대의 간극이 있겠지만 이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소년, 이 남자는 저런 말과 기교를 대체 어디서 배웠던 것일까요. 그 달콤한 말들에, 그를 그저 친구라 생각했던 어밀리아 대브니를 제외하고, 소녀들은 그에게 생물학적인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앞다투어 경쟁하는 구도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뱀의 혀를 가진 소년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어요. 고독하고 외로운, 순수한 영혼에게 한 맹세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영혼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자신이 한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결말은 독자라면 누구나 바랐을 결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지만 그 시대에,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복수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필사의 생존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들에게 상처는 곧 죽음과 같았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 간교한 소년도 어떤 여자에게는 단 하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가 초래한 그 결과가 그도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도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 흐름에 몸을 맡겼던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가제본으로 만난 토마스 컬리넌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한 남자의 등장으로 균열이 생긴 학교 안 여성들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각자의 시각에서 매우 심도있게 펼쳐보입니다. 호의로 시작되었던 일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고, 독자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들에 너무나 순진하게 속아넘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자칫 지루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점차 자신이 놓여진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소녀들을 조종하려하는 맥버니 상병의 모습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한 편의 스릴러를 방불케 했습니다. 마치 제가 그 판즈워스 학교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고, 그들에게 닥친 위험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게 되고, 하루라도 빨리 그를 학교에서 어서 내보내버리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맥버니 상병을 제외한 모두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작품 전체가 무척 생생한 현장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득, 왜 작가는 맥버니 상병의 시점에서는 서술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궁금해지네요.

 

[매혹당한 사람들]은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감독 : 소피아 코폴라)을 수상한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의 원작입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고전적인 맛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영화에서는 니콜 키드먼, 커스틴 던스트, 엘르 패닝, 콜린 파렐(그런데 콜린 파렐이 스무 살의 맥버니 상병을 연기하기엔 조금 나이 차이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작품 안에서 맥버니 상병이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한 남자로 느껴지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주연을 맡아 열연한다고 하니, 원작을 어떻게 표현해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원작소설이 따로 있는 경우에는 영화를 먼저 보지 않는 편인데, 다행히 [매혹당한 사람들] 소설을 먼저 읽을 수 있었어요. 기회가 되신다면 영화보다는 먼저 소설을 읽어보시는 편이,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영화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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