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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평점 :
남북전쟁으로 인해 고립된 –마사 판즈워스 여자 신학교-. 교사도, 학생도 모두 여자인 이곳에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정확히는 부상당한 채 학생 중 하나인 어밀리아 대브니의 도움으로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죠. 고독하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각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하던 학생들은 물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학교의 교장 마사 판즈워스와 그녀의 동생이자 교사인 해리엇 판즈워스까지 처음의 경계심을 내려놓고 이 낯선 남자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남자의 이름은 존 맥버니, 상병이고 스무 살입니다. 학교의 그 누구보다 고독하고 남들에게는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독선적인 에드위나 모로, 규율에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에밀리 스티븐슨,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고 그 외모를 이용할 줄 아는 얼리샤 심스, 자연과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소녀 어밀리아 대브니, 나이는 제일 어린 열 살이지만 그 나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게 조숙하고 약삭빠른 메리까지, 남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이제 막 청년의 길로 들어선 이 소년에게 대책없이 빠져들어가요.
독선적이고, 순수하고, 아름답고, 규율에 엄격하고. 각자가 가진 조건은 다 다르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 그들은 고독합니다. 제가 그녀들에게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었어요. 학교에 남은, 단 다섯 뿐인 학생이고 친구들이지만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진심으로 털어놓을 수 없죠. 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을 지켜야 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의무를 해내야 하는 마사 판즈워스도, 언니보다 정은 많아 보이지만 다소 무절제한 사람으로 보이고 우유부단한 해리엇 판즈워스도, 그녀들은 자신이 혼자라고 느낍니다. 오죽했으면 판즈워스 집안의 흑인노예, 마틸다 판즈워스만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처럼 느낀, 가장 중심을 잘 잡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여겨졌어요. 그런 그녀들의 마음 어느 한 곳을, 뱀의 혀를 가진 소년 맥버니 상병의 달콤한 말들이 쿡쿡 찌르기 시작합니다. -달링, 당신이 가장 아름다워요, 나는 이 학교에서 당신을 가장 사랑해요, 오 달링.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줄 수 있어요.- 시대의 간극이 있겠지만 이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소년, 이 남자는 저런 말과 기교를 대체 어디서 배웠던 것일까요. 그 달콤한 말들에, 그를 그저 친구라 생각했던 어밀리아 대브니를 제외하고, 소녀들은 그에게 생물학적인 장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앞다투어 경쟁하는 구도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뱀의 혀를 가진 소년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어요. 고독하고 외로운, 순수한 영혼에게 한 맹세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영혼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자신이 한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결말은 독자라면 누구나 바랐을 결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지만 그 시대에, 그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복수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필사의 생존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들에게 상처는 곧 죽음과 같았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 간교한 소년도 어떤 여자에게는 단 하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가 초래한 그 결과가 그도 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도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 흐름에 몸을 맡겼던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가제본으로 만난 토마스 컬리넌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한 남자의 등장으로 균열이 생긴 학교 안 여성들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각자의 시각에서 매우 심도있게 펼쳐보입니다. 호의로 시작되었던 일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고, 독자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들에 너무나 순진하게 속아넘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자칫 지루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점차 자신이 놓여진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소녀들을 조종하려하는 맥버니 상병의 모습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한 편의 스릴러를 방불케 했습니다. 마치 제가 그 판즈워스 학교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고, 그들에게 닥친 위험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게 되고, 하루라도 빨리 그를 학교에서 어서 내보내버리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맥버니 상병을 제외한 모두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작품 전체가 무척 생생한 현장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득, 왜 작가는 맥버니 상병의 시점에서는 서술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궁금해지네요.
[매혹당한 사람들]은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감독 : 소피아 코폴라)을 수상한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의 원작입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고전적인 맛도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영화에서는 니콜 키드먼, 커스틴 던스트, 엘르 패닝, 콜린 파렐(그런데 콜린 파렐이 스무 살의 맥버니 상병을 연기하기엔 조금 나이 차이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작품 안에서 맥버니 상병이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한 남자로 느껴지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주연을 맡아 열연한다고 하니, 원작을 어떻게 표현해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원작소설이 따로 있는 경우에는 영화를 먼저 보지 않는 편인데, 다행히 [매혹당한 사람들] 소설을 먼저 읽을 수 있었어요. 기회가 되신다면 영화보다는 먼저 소설을 읽어보시는 편이,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영화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