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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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출간된 다른 작품들을 읽었던 분들에게는 스포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스노우맨]과 [레오파드], [레드 브레스트]에 이번에 출간된 [네메시스]와 [박쥐]까지 국내에 총 5권이 출간되었다. 본래 작품의 진행과는 약간 순서를 달리해서 출간되었기 때문에 인물들의 등장이 다소 들쭉날쭉하고 주인공 해리의 연애전선에도 흐림과 맑음이 반복되지만 <해리 홀레 시리즈>는 매 작품, 늘 새로움과 깊이를 더해간다. 시리즈의 처음으로 접했던 [스노우맨]에도 분명 존재했을 해리 홀레의 사색적인 분위기와 작가의 철학적 사고는, 어째서인지 [스노우맨]보다 앞서 발표한 [레드 브레스트]와 [네메시스]에 더 깊게 녹아있는 것 같다. [스노우맨]과 [레오파드]에서는 끝없는 어둠의 기운만을 내뿜고 있던 해리가, [레드 브레스트]와 [네메시스]에서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 그를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영향이지 않을까. 

 

은행에 복면을 쓴 강도가 침입했다. 그는 은행에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자신의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은 채 한 명의 여직원-스티네 그레테-을 인질로 잡고 그녀를 통해 말을 전달하며 돈을 요구한다. 점장이 25초 내에 가방에 돈을 넣지 못하면 스티네는 죽는다. 긴박한 상황에서 점장은 강도의 가방에 돈을 집어넣지만 예정됐던 25초를 넘겨 결국 스티네는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연이어 벌어지는 은행 강도 사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팀이 구성되지만 해리는 새로 들어온 베아테 뢴과 따로 팀을 꾸려 독자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다.  

 

한편 [레드 브레스트]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한 라켈과 그녀의 아들 올레그가 양육권 문제로 러시아로 가 있는 사이, 해리는 예전 여자친구였던 안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라켈이 러시아에 가 있는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결국 정해진 식사약속. 그런데 어쩐 일인지 눈을 뜬 해리의 기억 속에는 간밤의 기억이 없다. 안나가 입었던 까만 드레스의 잔상만 남아있을 뿐.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보지만 그녀는 연락이 되지 않고, 안나는 그녀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총이 손에 쥐어져있어 단순 자살로 사건은 매듭지어지지만 해리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고 그녀가 살해당했다는 생각에 홀로 움직인다. 그리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엘렌 사건. 해리는 어서 이 모든 사건들을 해결하고 그녀의 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네메시스]는 굉장히 체계적이고 섬세한 작품이다. 작품 곳곳에 메시지를 암시하는 문장들이 적혀 있고, 작가가 독자와 함께 움직이고 싶어한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단서와 암시를 제공하면서 이 사건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동기가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보자고 손을 내밀고 있는 영상이 떠오른다고 할까. 하지만 그런 복선과 암시들에도 마지막까지 범인을 예측하기란 힘들었다. 계속 머리를 굴려봤지만 오히려 그런 복선과 암시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마치 그것이 함정인 양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는 ‘복수’이다. 이제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은 이 한 단어만 기억하시길. 그래도 문제를 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레드 브레스트]에서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잔혹사가 펼쳐졌다면 [네메시스]에도 역시 슬픈 가족사가 존재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더 잔인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는 복수극. 생각해본다. 만약 그런 일이 핏줄로 얽힌 가족이 아니라 생판 남인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그리 잔인할 수 있었는지를. 어쩌면 가족이기 때문에 향했던 믿음과 신뢰는 그것이 깨질 때 더 처참해질 수밖에 없었던 걸까. 그렇다해도 그들이 선택한 길은 너무 아프고 슬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처절한 길을 포기한 그 누군가의 또 다른 선택과 대비되어 결국 복수라는 것은 그 복수의 대상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작품에서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이나 [레오파드] 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비록 [레드 브레스트]에서 파트너였던 엘렌이 살해당하기는 했지만 그의 옆에는 그를 보스처럼 떠받들고 존경하는 잭 할보르센이 있으며 해리의 괴짜 성질에 고개를 흔들기는 하지만 그를 좋아하는 비아르네 묄레르 경정이 존재한다. 독특한 재능을 갖추고 있어 해리의 사건 해결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데다 이제 잭 할보르센과 사랑에 빠질 베아테 뢴도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 라켈과 올레그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이리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미 [스노우맨]을 통해 할보르센과 묄레르 경정이 죽거나 실종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끼는 사람들의 죽음과 실종, 라켈과의 관계 변화 등으로 해리가 품고 있는 어둠은 더 짙어져 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엘렌이 죽기는 했지만 지금 해리가 서 있는 곳은 따뜻하다. 어쩌면 [네메시스]에서 보여주고 있는 해리의 모습이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인간적이고 행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부디 실종으로 처리된 묄레르 경정이라도 [레오파드] 이후 작품에서 등장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매 작품, 분위기와 재미가 남다르다. 질리지 않고 계속 기다리게 된다. ‘더’ 요구하게 된다.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기쁘면서도 아쉽다. 이번 요 네스뵈 작가의 방한을 기념하여 특별히 출간된 [박쥐]와 [네메시스]. 일년에 한 권 꼴로 나오던 작품들이 연달아 두 권 출간되는 것을 보면 작가의 방한에 출판사와 독자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을 한 번에 두 권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앞으로도 결코 해리 홀레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을 부디 작가가 저버리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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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퀴어 주겠어! 세트 - 전3권 블랙 라벨 클럽 8
박희영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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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리뷰만 보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듯 하여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설레임 가득한 장면, 둘 앞에 닥친 위기를 극적으로 뛰어넘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로맨스 소설은, 그 작품 수도 많고 종류도 다양해서 이미 <로맨스 소설의 법칙>같은 것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새롭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아이디어 연구가 필요한 장르이다. 게다가 진부한 장면을 진부하지 않게 표현하려면 글솜씨는 물론 장면을 구성하는 기술도 필요하니 작가에게 정말 고급 능력을 요하는 분야가 아닐까. 그래서 등장인물의 깊은 심리묘사는 약하고, 사건 위주의 전개만 보인 [할퀴어 주겠어]에 느낀 실망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것 같다. 평소 책에 대한 평가가 박하지 않은 나로서는 드물게 매긴 평점이다.   

 

[할퀴어 주겠어]는 신기하게도 주인공이 사고를 당해 고양이로 변신을 하게 되면서 얻게 되는 사랑이야기다. 오빠 친구 진혁에게 첫눈에 반한 청아는 진혁이 다닌다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교 내내 공부에만 빠져 지내다 마침내 진혁과 같은 학교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다이어트도 하고 예뻐져서 진혁과의 만남을 말 그대로 코앞에 둔 청아는 우연한 사고로 다른 세상에 떨어진다. 고양이의 외모로. 그 곳에서 만나게 된 황제의 동생이자 대공작인 류안. 겉모습만 고양이로 변했을 뿐 말도 생각도 인간 청아의 것 그대로인 그녀는, 처음에는 차갑고 냉정한 남자로 여겼던 류안과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의지도 하면서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된다.  

 

블랙 라벨 클럽에서 출간된 로맨스 소설에는 흥미로운 소재들이 많아 나도 그 동안 재미있게 읽은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쩌면 [할퀴어 주겠어]의 감각과 나의 감각이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여고생들은 열광하며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나는 청아와 류안같은 로맨스 라인에 꺅꺅 할만큼은 어리지 않다는 것. 청아와 류안 사이의 로맨스 기류는 다소 지루했고, 서로에게 빠져드는 아련함도 부족했던 듯 하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할퀴어 주겠어]의 작가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에서 연재될 때의 글의 느낌과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의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서 연재할 때는 그때마다 핵심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한회씩 읽는 독자들도 큰 불만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재된 내용이 그대로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 작품은 그저 사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창의력도 부족하고 글솜씨도 부족해서 작가들을 비평할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사건들의 연관성과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에 대한 깊은 탐구없이, 내면을 파고드는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 능력 없이 로맨스 소설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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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베이커리 2 - 새벽 1시의 사랑 도둑 한밤중의 베이커리 2
오누마 노리코 지음, 김윤수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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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중 블랑제리 구레바야시에 미모의 아가씨가 나타났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갑자기 등장한 그녀의 이름은 유이 요시노. 그녀가 품에서 꺼낸 것은 블랑제리 구레바야시에서 블랑제로 일하고 있는 야나기 히로키와의 혼인신고서! 중학교 2학년 때 잠깐 교제한 적이 있던 그들이 어렸을 때 작성한 혼인신고서를 들고 등장한 요시노는, 무슨 사정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혼인신고서를 들이밀며 잠시만 머물 수 있게 요청한다. 사람 좋은 구레바야시씨와 자신도 얹혀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괜찮다라고 생각한 노조미는 결국 요시노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노조미와 요시노는 블랑제리 구레바야시의 2층에서 함께 살게된다. 요시노는 그녀만의 매력으로 꼬맹이 고다마와 변태 각본가 마다라메 뿐만 아니라 블랑제리 구레바야시에 들르는 남자 손님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그런 그녀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노조미. 요시노에게는 뭔가 있다! 노조미의 여자로서의 촉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밤에 책을 읽게 된 것을 주린 배를 움켜쥐고 후회하게 만든 훈훈한 작품 [한밤중의 베이커리]가 2권으로 돌아왔다. 각본가 출신의 작가 오누마 노리코의 [한밤중의 베이커리]는 일본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었고, 신인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시리즈로 출간되어 현재 3권까지 합계 90만 부 판매를 돌파했다고 한다. 2권도 1권만큼 굉장히 재밌어서 무엇보다 3권까지 출간되었다는 게 굉장히 기뻤다. 이런 달콤하고 따뜻한 책을 아직 한 권은 더 읽을 수 있다는, 순수한 기쁨이라고 할까. 1권을 읽을 때 한 번 경험했던지라 이번에는 책을 읽기 전에 미리 빵을 한가득 사다놓았다. 그럼에도 코끝에서 감도는 빵냄새며 히로키가 만들어내는 크루아상을 먹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어쩌지 못해서, 오늘도 빵이 가득 찬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중이다.  

 

1권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한 편씩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소개되는 느낌이었다면, 2권에서는 사건다운(?) 사건이 벌어진다. 히로키와 인연이 있는 아야노가 등장하면서 블랑제리 구레바야시 식구들 주변이 시끌시끌해지는 것이다. 아야노의 행실이 약간 여우같은 면이 있어서 처음에는 노조미의 시각으로 나 역시 그녀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만, 역시 이 작품, 정말 따뜻하다. 아야노가 숨기고 있는 상처, 그녀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과제들을 제시하며 사람을 대할 때 한 쪽 눈으로만 쳐다보지 말라는 교훈을 새삼 일러준다. 약간 미스터리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흥미진진하면서도 마음 깊이 번져가는 이 느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의 따스함이 넘쳐난다. 사랑스럽고, 맛있는(?) 책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원한다는 건 구원받는 것과 통하니까. -p18

속죄도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문장도 가슴 깊이 박혔다.  

 

시즌 1에서 소개했듯 구레바야시와 노조미는 진짜 형부-처제 사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점점 진짜 가족이 되어간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구레바야시의 부인이었던 미와코로부터 구원받았고 미와코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우산이 되기를 자청한 히로키, 변태 각본가이지만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이든 다 바칠 수 있는 순수한 마다라메, 꼬맹이 고다마도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블랑제리 구레바야시 속에서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란,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서로를 생각하느냐, 사랑하느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런 가족이라면, 세상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가 사는 시간들은 더 아늑하고 따스해질텐데. 가슴 속이 뭔가 몽실몽실한 것이 즐거운 것도 같고 안타까운 것도 같은, 아주 복잡한 마음이다.  

 

미와코를 잃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 구레바야시씨도 노조미와 히로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변해 간다. 미래를 생각한다. 3권에서는 어떤 에피소드들이 등장할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 때는 꼭 잊지 말고 크루아상을 준비해야겠다. 히로키가 블랑제가 되어 제일 먼저 레시피를 익힌 크루아상. 언젠가 나도 빵을 만드는 블랑제가 되고 싶다. 꼭 빵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통해 누군가에게 따스함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우산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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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밤에 본 것들
재클린 미처드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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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P라는 색소성 건피증을 앓고 있는 앨리와 줄리엣, 로브. XP는 햇빛에 치명적인 알레르기 반응으로 햇빛에 노출되면 화상, 염증 등의 증상을 유발하는 병이다. 평생 햇빛을 쬘 수 없기 때문에 비타민D는 약으로 복용하고 낮에는 단 한 걸음도 밖에 나갈 수 없다. 해가 지는 석양 무렵에라도 나가기 위해서는 선글라스와 모자, 긴 팔 옷은 물론 몇 겹의 천으로 꽁꽁 싸매는 수밖에. 필연적으로 낮에는 자고 밤에는 활동하는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주 친한 친구지만, 주인공 앨리는 로브에게 친구 이상의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아름답고 당당하며 활동적인 줄리엣은 앨리와 로브에게 파쿠르라는 운동을 선보이고, 그들은 밤마다 이 건물, 저 건물에 뛰어오르고 점프하고 착지하는 연습을 시작한다. 파쿠르를 실행하던 어느 밤, 앨리는 한 건물에서 수상한 남자와 시체같은 형상의 여자를 발견하지만, 친구들은 그녀가 잘못 본 것이라며 앨리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 후로 앨리의 주변에 섬뜩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한다.

 

자유를 향한, 혹은 낮을 향한 그들의 바람은 간절하다. 병에 걸리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수명이 짧은 그들에게는 이미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결정되어 있다. 이미 XP로 인해 마음의 한 구석은 죽어가고 있었기에 그들은 파쿠르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자유를 향한 도약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알기에 그들의 부모 또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하는 로브의 아버지는 햇빛 차단을 위해 각종 메이커의 점퍼를 로브에게 선물하고, 경찰서장인 줄리엣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밤에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하면 조용히 순찰차를 돌려 멀어져간다. 앨리가 XP라는 것을 알고 떠나버린 아버지와 달리 그녀의 엄마는 간호사로서 딸의 곁을 지키며 앨리의 의견을 존중하고 마치 친구처럼, 앨리가 원한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강한 마음의 소유자다.

 

꿈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던 미래를, 줄리엣과 앨리는 각자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에 커다란 갈림길을 만들어 놓는다. 수상한 남자를 목격한 밤 이후, 앨리는 로브와 줄리엣과 멀어진다. 예전부터 줄리엣을 선망하던 로브를 사랑하는 앨리. 그녀의 마음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친구들에 대한 원망과 로브를 향한 사랑으로 빚어진 줄리엣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해 괴롭다. 하지만 앨리는 질투와 원망으로 슬퍼할지언정 망가지지는 않는다. 줄리엣과 로브가 없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완벽한 개인으로 독립하는 힘을 그 어느 때보다 갈망하게 된 앨리는, 줄리엣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으며 수상한 남자와 줄리엣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친구 줄리엣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그녀는 내가 알던 친구가 맞나.

 

수상한 남자의 등장과 여러 가지 사건들로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는 이 작품은, 그러나 스릴러 이상의 그 무엇이다. 스릴러 같은 분위기는 앨리와 줄리엣, 로브의 인생을 조망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 이 작품은 오히려 이 세 명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듯 하다. 앨리가 아니었다면 줄리엣은 가장 소중한 친구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간단히 그들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줄리엣이 아니었다면 앨리는 자신의 꿈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로브가 아니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로브 또한 앨리가 없었다면 체념한 채 그저 그런 현실을 살아냈을 뿐, 미래를 꿈꾸는 앨리 곁에서 자신 또한 진심으로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는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미래’로 향하는 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스릴러와는 다르기에 작가가 결말을 맺은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들은 더 강해질 수 있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들이 가는 길이 곧 자신들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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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케이스 속의 소년 니나보르 케이스 (NINA BORG Case) 1
레네 코베르뵐.아그네테 프리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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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관해서는 작품 결말 부분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로 인해 온전한 가정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니나 보르. 깡마른 몸매에 짧은 머리, 약간 소년같은 외모를 한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한 남자의 아내이고 난민을 위한 적십자캠프에서 일하면서 불법체류자들을 위한 의료봉사에까지 뛰어들고 있다. 어느 날 친구 카린의 부탁으로 기차역 보관함에서 슈트케이스 하나를 찾아오며 사건은 시작된다. 열어본 슈트케이스 안에는 어린 아이가 마취되어 죽은 듯이 누워있다. 이 아이는 누구이며 어째서 카린이 자신에게 맡긴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니나는 누군가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이미 피와 폭력으로 물든 잔인한 남자로부터 아이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니나.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제 발로 뛰기 시작한 시기타의 이야기가 불행한 개인사와 얽혀 함께 펼쳐지고, 결국 니나와 시기타의 만남으로 인해 어두운 진실이 밝혀진다.

 

작가가 여성 두 명인 것과 크게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슈트케이스 속의 소년]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니나 보르와 아이의 엄마 시기타이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 남자친구와의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된 시기타는 차마 그 사실을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못한 채 떨어져 사는 이모를 찾아가 아이를 낳고, 낳은 아이를 입양보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얻게 된 아이가 바로 슈트케이스 속에 있던 아이 미카스다. 이미 미카스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남편과는 별거 상태였고, 그렇게 단 둘이 지내는 생활에 외로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시기타는 무엇보다 아이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시기타와 미카스가 공원에서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을 때 미카스에게 초콜릿을 건네는 수상한 여자. 그 이후로 시기타는 기억을 잃은 채 병원에서 눈을 뜨고 미카스 또한 자취를 감춘다. 수사에 진전이 없고 기다릴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시기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미카스를 찾아나선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니나 보르 시리즈를 계속하기 위해 중심적인 인물로 니나 보르를 내세웠을 뿐 실제적인 주인공은 시기타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모성으로 가득차 아이를 찾아나선 시기타라는 인물이 인상적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뚜렷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목적을 이루려는 남자와 역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폭력과 살인도 불사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전자의 남자는 돈이 많고 후자의 남자는 돈이 없다. 이 둘의 차이는 그것 뿐이다. 만약 전자의 남자가 돈이 없었다면, 하지만 문제는 동일하게 발생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 살아온 환경에 따라 취한 행동이 달라졌을 수는 있겠지만 후자의 남자와 같은 선택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결국 이 둘에게 결여된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다. 남이야 어떻든 자신의 문제만 해결하면 되고 자신만 많은 돈을 챙겨 오직 눈앞의 여인과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상들에게 설명할 것이다. 사랑하는 너를 위해 그랬노라고,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시기타를 응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기타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므로.

 

주인공인 니나 보르는 슈트케이스 속에 있던 아이를 피신시키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한다. 이 아이가 고아원에 있던 아이였는지, 아니면 납치당한 아이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동유럽 여자를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니나 보르의 가족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그녀에게 가족은 오히려 벗어나고 싶은 대상처럼 보인다. 그리고 과연 니나처럼 다른 사람 일에 이리 목숨 걸고 홀로 대항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싶다. 지켜야 할 대상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말이다. 형사도 아닌 가녀린 여자 간호사가 이런 시련들을 모두 감당해내다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중심인물인 니나의 캐릭터가 조금 빈약하기는 하지만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 여성 콤비의 작품이라 그런지 어쩐지 더 섬세한 것 같기도 하고 차분한 가운데 긴장을 조율할 줄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시기타가 미카스에 대해 느끼는 감정, 아이를 찾기 위한 눈물겨운 여정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시리즈인만큼 첫 작품만 읽고서는 완전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책날개에 예고된 다른 작품들을 통해 여성 콤비의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스릴러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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