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의 댓글들 때문에 참 여러가지 말들이 많다.  특히 네이버와 같은 포털싸이트들에 올라오는 악성댓글들은 그 관련자들에게 막대한 심적 물적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의 댓글들에 대해서 더이상 가치를 두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예컨대 글 잘쓰기로 소문난 좌파논객?인 김규항씨 같은 경우 인터넷댓글들은 좌파적 경향성을 표현해 내기에는 부족한 그릇이고 우파적인 폭력적 언어로 쉽사리 오용된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곳 알라딘의 어느 유저분은 이런 편견(나는 편견이라고 생각한다.)때문에 아예 서재에서의 댓글기능을 차단하기도 했고.

김규항씨 관련글: http://blog.aladin.co.kr/mramor/1120409

댓글기능을 차단한 알라딘의 어느 서재와 그 블로거의 변: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CNO=763772143&PCID=749138&CType=1&PaperId=1260711&IsListView=true

반대로 댓글기능을 통한 서로간의 소통을 즐기시는 분의 글: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CNO=780166123&PCID=3163520&CType=1&PaperId=1261019

 

그런데 소위 온라인에서의 댓글 혹은 꼬릿말이라는 것이 그렇게 부정적인 성격만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댓글로 달린 글을  애써 무시하고 댓글 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하는게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 김규항씨는 문제를 전도시키는 전형적인 예로 보인다. 그는 우파들의 폭력적이고 무개념적인 온라인 공간상에서의 언어들의 문제를 갑자기 온라인 공간자체의 문제점으로 확대 혹은 전도시킨다. 그래서 결국 그는 댓글을 보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아래 링크한 나귀님의 경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댓글을 무가치한 헛소리쯤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은 하고싶은 일을 할뿐이니 댓글기능을 차단하건 말건 온라인에 글을 올리건 말건 신경끄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태도들이 보여주는 윤리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댓글 혹은 온라인 글쓰기의 부정적 오용의 예는 주변에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사용의 경우가 다수를 차지한다고 해서 댓글자체를 아예 무시하고 답변하지 않거나 온라인에서의 소통자체를 의문시하는 태도가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라인 공간에서의 댓글들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그 익명성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실제 공간에서 와는 달리 온라인 공간속에서는 자신의 실제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말할수있게 됨으로써 다시 말해 익명성을 보장받을수있게 됨으로써 평소에는 남에게 쉽사리 할수 없는 표현들도 너무나 쉽게 사용한다. 이런 익명성을 이용해 사람들은 부주의한 댓글들과 말장난 그리고 언어폭력으로 쉽사리 유인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온라인 공간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쉽사리 오염될 수있는 댓글같은 공간속에서도 모범적인 글쓰기를 하기도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소통을 오용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문제는 댓글등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의사소통의 잘못된 사용이 문제인 것이시 댓글 자체가 문제가 아니란 이야기다.

설령 댓글등의 사용을 바람직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용인하고 관용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성향과 놀이 스타일 그리고 취향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 혹은 다원주의사회는 이러한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라면  아무리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댓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방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권리를 특정인이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것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파시즘로 가는 길일 따름이다.  비록 자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유치해보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타인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권리가 없다. 타인의 그런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길이 된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내가 곧 타인이 되므로.

물론 나도 이곳 알라딘 서재가 네이버와 같은 포털싸이트처럼 악성댓글이 난무하는 곳으로 방치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이곳에 와서 지금과 같은 서재질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악성 댓글을 지양하고 바람직? 한 것으로 보이는 생산적? 대화가 좀더 활성화 되길 희망하긴 한다. 특히 이곳처럼 책과 관련된 싸이트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책과 지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좀더 많이 소통되는 그런 곳으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이지 내 선택의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시킬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알라딘이 네이버화 되면 나는 이곳을 자주 찾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나의 선택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할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댓글이라는 것이 그렇잖은가. 비록 악성댓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게시물에 대한 의식/무의식적인 관심의 표명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다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대꾸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어렸을때부터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예의없는 혹은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아주 좋은 하나의 관습니다. 상대방의 말 건냄에 대해서 대답함을 의무로 함으로 해서 서로간에 있을 불일치와 오해를 최소화 할수있고 또 서로간의 이해를 최대화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론 저마다가 때로는 '섬'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바다 위에 띄엄 띄엄 보이는 고독한 무인도 같은 섬. 하지만 사실은 그 섬들은 표면적으로는 바다로 인해 서로 구분되어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바다 밑으로 들어가보면 똑같은 지각으로 서로간에 연결되어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각자는 혼자있을 때에는 매우 독립적으로 보이는 존재이다. 하지만 사람은 로빈슨크루소처럼 혼자서 살아갈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건냄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방의 자율성 혹은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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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0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6-1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과 관련한 각자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귀님의 댓글 차단 같은 것도 마찬가지인데, '손님'은 집안으로는 들여놓지 않겠다는 원칙은 가타부타할 것 없이 '주인'이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죠. 그 경우에 더 일관적인 건 모든 글을 비공개로 하는 것이겠지만, 역시나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겠습니다. 나귀님의 경우에도 '주마'관'산'이나 요코 이야기 건 등을 제외하면 특별히 댓글이 문제됐던 것 같지 않고 일반적인 댓글에 무반응이셨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가 필요했던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알라딘에서는 많은 경우에 댓글은 사교적/친교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지라 좀 '수다스럽긴' 하지만 '악플'의 문제와 동일선상에서 얘기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싶네요. 다만 우리에겐 이러저런 참견들에 대꾸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는 것뿐이지요...

yoonta 2007-06-1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님/ 네. 사실은 저도 말씀하신 그분에 대해서 비슷한 느낌을 자기고 있었답니다. 저 사람은 왜 불러도 대답이 없을까? 결국 이유는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려면 입닥치고 조용히 있어라. 내 독서에 방해된다. 씨잘때기없는 댓글달려면 그시간에 책이라도 한줄, 글이라도 한줄 더 써라라는 훈계였다는. 그제서야 비밀이 풀리더군요.

로쟈님/ 맞습니다. 나귀님의 경우 댓글을 차단하는 것은 그분의 자유이자 권리이죠. 제가 위에서 이야기하고 싶은것도 결국은 다양성의 존중이기 때문에 그분처럼 하신다고 그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좀 독특한 취향을 가지신 분이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단거죠. 특히 이곳은 체셔고양2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플레전트빌"같은 커뮤니티임에도 말이죠.

2007-06-10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06-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님/ 아 그러셨군요..^^ 사람들은 다 각자의 스타일들이 있는 법이지요. 똑같은 일을 가지고도 대응하는 방식이 다 틀리니 무엇이 꼭 최선이다라고 말하기도 어렵죠. 그래서 님 말씀처럼 예의라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선별적으로 행해 질때 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었을 때에만 의미있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결국 위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도 내가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는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예의를 지켜줄것을 요구하는 말이기도 하구요.

paviana 2007-06-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yoonta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나귀님도 처음에는 다른 분들 서재에 댓글 남기시고 했는데 일련의 사건들때문에 상처받으셨나봅니다. 저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로쟈님이나 yoonta님 ,바람구두님 같은 서재를 기웃거리며 좋은 말들에 도움 많이 받지만 댓글 남기기는 좀 어려워요. 그러다 가끔 댓글 남겼을때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면 속으로 얼마나 좋은지..그런 맘을 나귀님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yoonta 2007-06-1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paviana님^^ 나귀님같으신 분들도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 의견이 그렇다면 그것도 존중해야겠죠. 다만 저는 그런 태도가 꼭 바람직한가라는데 의문을 제기한것일 뿐입니다. 아 그리고 저도 님처럼 평범한 사람입니다. 가끔씩 책들여다보면서 몇마디 수다떠는 사람일 뿐이에요. 서재도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글들도 썰렁하고..-_- 앞으로 자주 뵙고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

EroticTerraN 2007-06-28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yoonta 님께서 펑크로커님이신가요? 소개받고 좋은글읽고가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자주들리겠습니다. 근데 이곳에오니 그곳에 올리신글보다 너무 어려운거같아 ㅠㅠ

yoonta 2007-06-29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테란님 방가^^ 이곳에서 불펜분을 뵈니 느낌이 색다르네요 ^^ 아무래도 블로그라 좀더 개인적 관심영역에 국한되서 글을 올리게 되네요. 테란님도 어서 블로그하나 만드세요^^
 

라캉은 무의식을 의식의 배후에 자리잡은 실체적 근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에게 무의식은 의식에 선행하는 것이라가기보다는 의식과 같은 차원에서 나란히 그리고 상호자율적으로 존재한다. '순환적'인 동시에 '비대칭적'인 형태로. 또한 무의식은 현실 속에서 지식이 가진 균열 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지식과 행위사이의 균열을 지시한다. 불가능한 지식, 불쾌한 체험 등으로 그것은 주체의 내부적 균열을 '은유'하는 것이다.  때문에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사후적으로만 재구성될 수 있는 '의식의 선험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보기엔 칸트의 초월철학의 구도와 비교적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헤겔철학에서 라캉과의 동형성을 발견하지만 나는 그것을 칸트에게서 보고자 한다.  

칸트에게서 의식의 선험적 가능 조건은 의식의 초월적transzendental인 구조와 형식을 가진다. 그것은 감각의 내용이나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형식들 예컨대 시간, 공간, 양, 질, 과 같은 선험적 범주들을 통해 자신은 경험의 질료가 아님에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칸트적 의미의 '의식의 선험적 가능조건'도 라캉이 무의식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의식의 근원에 자리잡고 그것을 배후에서 가능하게 하는 숨겨진 차원의 실체적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험'과 그 질료들과 항상 '나란히' 있으면서 그것들과 상관적으로 상호제약하면서 기능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만 승인되고 재구성되는 의식의 선험적 가능조건인 것이다. 하이데거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의식의 초월적 가능조건은 '존재자의 존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칸트에게서의 초월이 하이데거식의 존재와 다른 점은 존재자의 배후에 존재하는 근원적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즉 그것은 라캉이 그의 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지식에 항상 나란히 붙어다니면서 그것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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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은 <탐구 1>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말하다-듣다>의 관계가 아니라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의 핵심적 내용으로 설명한다.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는 <말하다-듣다>의 관계와는 달리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의 공통된 언어규칙이 전제되지 않는다.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공통된 언어규칙을 공유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의 이러한 불확정성을 기준으로 자신의 가르치는 방법을 교정해야 한다. 그 결과 이 관계에서 결과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된다. 

고진에 의하면 칸트에게서 공공적인 것은 세계시민적 공공성이다. 그에게 사적인 것은 오히려 기존의 국가적, 사회적 위치에서 행동하는 개인의 행위이다. 따라서 칸트적 의미의 공공성이라는 것은  기존의 통상적 의미로서의 국가적 공공성내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고 자기자신을 기존의 공공성 내에 마주세움으로써 단독적인 개인으로, 도덕적으로 행위함으로써 존재하는 공공성이다. 다시말해 세계시민적 공공성은 개인의 단독성을 전제하고 있고,  그것은 개별적인 것을 취합하는 일반성으로서의 공공성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이 '단독자'로 도덕적 결단을 함에 의해 성립하는 '보편성'으로서의 공공성이며 시간적으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적 혹은 잠재적인 공공성이라는 것.

들뢰즈에 의하면  헤겔에게서의 공공성은 이와는 다르게 개별-일반이라는 대립항을 통해 성립하는데 이 대립항은 직접적으로 마주서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라는 매개를 통해 '종합'된다. 이 회로속에서 개별의 잔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개별성은 특수성을 통하여 일반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 속에 어떠한 잔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개별적인 것을 즉 감성적인 것을 오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상상적 도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속에서 개별적인 것 혹은 단독적인 것은 일반으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물을 가진다. 때문에 그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초월적transzendental인 과정이다. 때문에 개별자 혹은 단독자는 그자체로 보편이 된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언명령인 것이다.

다시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가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는 언어의 단일한 논리적 구조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가 초기에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도 일종의 '경계체험'이다. 그는 세계의 경계 혹은 사유와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말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할수 있는 명제로 이야기했던 것은 논리적 형식을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논리적 형식'자체는 논리적으로 묘사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수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하였던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논리의 경계가 자리잡는 곳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명제 즉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런 난점 때문에 후기에 가서 그는 언어의 의미를 '언어의 사용' 혹은 '언어놀이' '삶의 양식'등과 결부시키게 된다.

이런 문제점은 프로이트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과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모든 과학은 우리의 심리 장치를 통해 매개된 관찰과 경험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정신분석학)은 이 장치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유비는 끝난다. " (<라캉과 현대철학:홍준기> 에서 재인용)

여기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과 과학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기존의 과학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왜냐하면 과학은 이미 그자체에 심리적 매개를 경유하고 있으므로. 그런데 정신분석학은 이런 심리적 매개과정 자체를 탐구하는 것. 때문에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존재증명은 무의식 스스로가 대상이자 동시에 관찰주체가 되는 역설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설도 마찬가지로 이와같은 난점을 <시간의식>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한편 크립키는 그의 언어이론에서 고유명사를 개체의 여러 성질을 기술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단적으로 개체를 '지시'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한다. 고유명사를 이렇게 규정하게 되면 언어는 개별-일반성의 회로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물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잔여물들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칸트로 돌아가면 이런 사회적인 것이 바로 칸트적 공공성으로 연결된다. 고유명사로 표현되는 국가로 표현되는 일반성으로서의 공공성이 아니라 이러한 일반성으로서의 공공성이 아닌 자신의 단독성을 보유한채 자시 자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보편성을 도출해 내는 그런 의미의 공공성. 이것이 칸트가 이야기하는 공공성이라는 것이다. 반면 헤겔적 공공성은 그의 인륜 혹은 국가에 대한 설명을 비추어 보면 단독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공공성이라기보다는 특수를 매개로 한 과정의 결과로서의 공공성이다. 이것이 칸트와 헤겔의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들뢰즈는 이와같은 헤겔철학의 환원적 특성 때문에 스스로를 반헤겔주의자로 규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칸트의 공공성은 자연스럽게 그의 '윤리'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서 도덕은  "공동체의 규칙이나 개인의 감정, 이해를 괄호에 넣어서 생각하"는 것(고진)이다. 때문에 그것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의 문제라는 것. 그런데 이 자유 혹은 자유의지는 여러 인과성을 쫓아가는 과정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인과성들은 서로가 무한히 연결되어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다만 뒤쫓아만 갈 뿐 "모든 사건의 이런 무제한적 계열은 자연에서의 끝없는 연쇄이므로 나의 원인성 역시 결코 자유는 아니다."(<실천이성비판>트랜스크리틱에서 재인용) 스피노자는 이런 인과성의 무한계열은 오직 원인의 원인에 의해서만 즉 신에 의해서만 온전히 파악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칸트는 위의 설명에서  이를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현실에서는 자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자유였던 것처럼 간주 할 때 즉 인과성의 무한계열을 괄호에 넣고 그것을 알고있는 것으로 가정할때 우리는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때의 자유는 자기 의지에 의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그런 자유이다. 우리는 우리 행위의 인과성을 괄호에 넣고 자유가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성립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결과가 어떠한 것이든 항상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 자유는 이처럼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논리적 인과성에 의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윤리와 공공성을 이처럼 규정하게 되면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타자'이다. 타자는 우리와 공동의 규칙과 규범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들은 우리의 공동체 밖의 존재들이며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이다. 그들은 비록 우리와 공동의 규범과 규칙을 공유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을 승인해야 한다. 비록 그들의 인과성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칸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오히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를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와 공공성은 이처럼 인과성의 경계에서 성립한다. 우리는 인과성으로만 즉 이론적으로만 자유와 윤리를 논해서도 안되고 인과성의 외부에서만 자유를 볼수도 없다.  인과성 자체는 바로 그 스스로의 경계에서 성립한다. 공공성과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그 사이 혹은 경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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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스 페이퍼- 예수문서
마이클 베이전트 지음, 박철현 옮김 / 이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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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박스의 정식 번역본이 나오기 전의 책이다. 책 표지도 그렇고 번역의 상태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영지주의와 신약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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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김상봉씨의 <나르시스의 꿈>과 관련된 기사를 옮겨온다.  얼마전 <서로주체성의 이념> 이라는 신간을 출간한 것으로 보아 김상봉씨는 <나르시스의 꿈>에서 제기했던 서양철학비판작업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토론회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비판을 얼마나 잘 수용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관련기사를 읽어보면 김상봉씨의 '서로주체성'에서 제기되는 타자가 지나치게 두루뭉실?하고 세밀하게 구별되어있지 못하다는 내용의 비판이 나온다. 또 오늘날 현대서양철학에서 제기되고있는 타자성의 철학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아직은 불분명해 보인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 비판도 아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그가 제기하는 '서로주체성'이라는 개념이 독창적  측면 예컨대

"김선욱 : 김상봉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과연 새로운 거냐 하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저는 사실은 (김상봉 선생님의 작업이) 대단히 새롭다고 봅니다. ‘서로주체성’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공감이 가요. 예를 들어서 ‘커뮤니케이션’이 하버마스가 얘기하는 거랑, 아렌트가 얘기하는 거랑, 테일러가 얘기하는 게 다 다르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과 또 다른 ‘만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정말 자기상실을 경험하지 않고, 정말 처절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만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드러내는 데, 그 방식이 장은주 선생님이 지적하셨던 것처럼 서양적이지만, 지금 이 이상의 도구가 어떤 것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배우고 있습니다."

와 같은 장점들이 있는 반면 김상봉씨 스스로가 인정하는 문제점..

"김상봉 : 예. (청중, 웃음) 박구용 선생의 비판을 받으면서... 제가 자백을 하고 싶은... 저는 피해자 입장에서 존재를 사유하려 하고 했습니다. 피해자는 어디서도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피해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철학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잘못된 피해자 의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로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의 타자’를 제대로 볼 수 없겠냐는 질책을 잊지 않겠습니다."

"김상봉 : 가장 어려운 지점인데요. 인식은 자동적으로 사물화시킵니다. 사물화시키지 않는 인식이 가능한가? 그러니까 인식 그 자체가 관찰이 아니라 ‘만남’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건가? 하는 게 저 물음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고민하고 있는 게 그겁니다. 논리적인 사유, 사물에 대한 인식, 이것이 전부 사물적인 인식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 져 있습니다. 서구의 인식이. 인격적인 ‘만남’을 모델로 해서 발생하는 지식이 과연 가능한가, 인식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김선욱 선생님이 지적해주시기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문제인데, 부끄럽게도 아직은 아무 것도 내놓을 게 없습니다."



다시말하면.."사물화시키지 않는 인식이 그 자체로 "관찰"이 아닌 "만남"으로서의 인식으로 발전할수있는가 하는 물음 그리고 "인격적인 만남"을 모델로한 지식이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지는 의문은 칸트의 철학에서 제기되는 초월성과 그로부터 제기되는 윤리는 어딘지 김상봉씨의 주체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르시스적인 주체의 내성으로부터 초월해서 존재하는 타자를 칸트는 그의 초월철학에서 제기하는데 결국 그것은 인식의 수동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의 수동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주체는 김상봉씨의 서로주체성 개념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내가 아직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와 같은 이전저서에서 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칸트철학비판을 독해하기 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보아서는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하기 힘들다.   또한 데리다의 "환대"개념속에서 발견되는 타자와 라캉이나 지젝의 저작속에서 발견되는"텅빈 주체"개념 등과의 비교작업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정신, 나르시스의 꿈에 질식당하다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 토론회
텍스트만보기   서상일(dnflwlq) 기자   
▲ 김상봉 교수의 문제적 저서 <나르시스의 꿈>을 두고 교수신문에서 벌어진 김상봉 교수와 장은주 교수의 '1차전' 논쟁에 이어 '2차전'이 벌어졌다.
ⓒ2005 서상일
수준 높은 토론이 벌어졌다.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와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 지난 1월 2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 - 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이하 나르시스의 꿈)' 토론회가 그것이다.

'나르시스의 꿈' 토론회는 학문의 주체성과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민적 주체성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토론회였다. 그 의미만큼이나 이날 토론자들은 서로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그럼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은 자세로 수준 있는 토론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수준과 의미만큼이나 이날 토론회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청중들이 몰려 주최측을 당황케 했다. 120여명의 청중이 몰리는 바람에 좁은 장소에 급하게 의자를 마련하느라 진땀을 뺐기 때문이다. 결국 토론회는 예정 시각인 3시를 10분 넘겨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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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주체성의 정신적 지향은 제국주의라는 현실적 결과 낳아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나르시스의 꿈>의 저자 김상봉 교수는 이날의 토론을 위해 원고지 600매 정도 분량의 발제를 새로 준비했다. 이전의 <나르시스의 꿈>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들이 꽤 있었으며, 더 진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김상봉 교수는 "서양철학은 아직도 서양철학의 지역성을 명확히 자각하지 못한 철학"이라고 비판하며 발제를 시작했다. 서양철학은 "철학이 시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기는 했으나, 자기들의 철학이 어쩔 수 없이 자기들의 역사와 언어에 의해 제약된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는 비판이었다.

이어서 김 교수는 서양정신 전체를 "이제나 저제나 자기만을 욕구하는 아집, 아무리 형태가 바뀌어도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집요한 홀로주체성, 그것이 서양 정신의 본질"이라고 규정한다.

김 교수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서양정신의 본질이 그런 한 타자를 배제할 수밖에 없고, 타자를 노예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정신적 지향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 결과를 낳게" 되는 바, 그 '현실태'가 바로 북미대륙에서의 원주민 집단 학살과 제국주의라고 말한다.

바로 "그리스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 온 제국주의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태동한 서구적 자유의 이념의 현실태"로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서양정신의 '홀로주체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은 서양정신의 역사적 발전 단계에 대한 은유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그 정당성은 인정하더라도 서양정신에 대한 '무모한 일반화'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김 교수는 서구 철학 전체를 '거시적인 시각에서 일관되게 꿰뚫는 통찰'(一以貫之)을 바탕으로 발제문 속에 '나르시즘의 역사'라는 원고를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서양정신에 대한 은유인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은 네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나르시스가 타인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대상(세계) 인식에 탐닉하는 단계. 둘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는 단계, 즉 나르시즘의 내면화 단계. 셋째,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단계, 즉 나르시즘의 완성과 죽음 단계. 넷째, 지하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강물 위에 비추어 보는 단계이다.

김 교수는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의 네 단계에 대해 "서양 정신이 거쳐 온 역사적 발전 단계에 대한 은유"라고 말한다. 따라서 김 교수는 구체적으로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에 대해 분석하며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의 네 단계와 결부시킨 해석을 보여주었다.

▲ (좌)김상봉 교수가 발제를 하는 동안, (우)한 청중이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다.
ⓒ2005 서상일
몇몇 서양철학자들의 초보적인 시도가 서양철학의 물길 바꾸지 않아

김 교수가 '타자와 만날 수 없는 정신'이라고 규정한 서양이 최근 타자와의 만남을 위한 철학적 시도를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철학자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들 수 있다. 그래서 그간 논쟁에서 이 두 서양 철학자는 서양정신이 김 교수가 지적한 것만큼 '지독하게' 자기동일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사례로 거론되곤 했다.

김 교수도 이 두 철학자의 사례에 대해 "오늘날 서양 철학은 아주 조금씩 만남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만남에 관해서 볼 때 서양철학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라며, "몇몇 철학자들의 초보적인 시도가 서양철학의 물길을 하루 아침에 만남의 철학으로 바꿀 수 있다는 듯이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철학이 역사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며 "서양 철학이 만남에 대해 사유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서양 철학이 타자적 정신과 실제로 만날 수 있어야만 한다"고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서로주체성의 변증법은 자기의 확대가 아닌 만남의 확장

김 교수는 이렇게 서양정신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시민적 주체성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김 교수가 제시하는 '서로주체성'인데, 이는 자기동일성을 고집하며 끊임없는 자기확대의 과정을 밟는 '홀로주체성'과 달리, 자기 상실로 인한 아픔과 부끄러움으로 타자를 '잉태'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이러한 서로주체성이야말로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김 교수는 '서로주체성의 변증법'은 서양정신처럼 자기의 확대가 아닌 만남의 확장을 지향하며, 이때 주체성은 만남을 통해 자기를 버릴 줄 알고 더 넓은 주체성으로 발돔움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로서 우리는 새로운 시민적 주체성으로 새로운 개념의 자유로 진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선욱, 박구용, 김상봉, 장은주, 정세근, 김세서리아 교수.
ⓒ2005 서상일
토론자들, 김 교수의 성과 인정하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해

김상봉 교수의 1시간에 가까운 발제가 끝나고, 토론자로 참석한 정세근(충북대) 교수는 "그리스 정신이 유일신을 받아들이는 데, 단절감이 없었다는 (김상봉 교수의) 해석에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며 서양 중세철학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우리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출발점이 아니라 충분하지 않은 성과"라며 '우리의 철학'을 하자는 형식은 마련한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나 아직 구체적 내용은 부족하다며 더 분발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1차전의 주인공'인 장은주(영산대) 교수는 김상봉 교수의 작업에 대해 우리가 역사를 통해 시도해 왔던 '동도서기'와 달리 "서도(西道, 서양정신)를 통한 서도의 극복"으로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런 평가를 시도했다.

즉 "서도 그 자체의 관점에서 서도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서도의 내재적 초월을 위한 시도", 또는 "서도의 가장 훌륭한 아우라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아니 그 아우라의 광채에 감탄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한계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으로 평가를 시도했다.

그러나 김 교수의 서양정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 대해서는 "사회가 변했다"며 다른 견해를 보여주었다. 즉, 김 교수가 통렬하게 비판하는 서양정신은 "서양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버린 낡은 유산"이라는 것이다. 이날 사회자인 홍윤기(동국대) 교수의 말대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이었다.

적절한 첫걸음 딛었으나, 개념을 가다듬고 그 안의 인식 더 치밀히 해야

이어 "유교적" 여성주의를 말하는 김세서리아(성균관대) 교수는 김 교수가 제시한 서로주체성에 알찬 내용을 채우기 위해 '차이-사이의 철학'을 검토해 볼 것을 제안했다. 즉,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가 아닌 '너' 또는 '그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면서 너와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방법"이라며, "이것을 터득하는 것이 나르시스의 꿈을 넘는 요령"이 될 것이라고 발전적인 제안을 했다.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김상봉 교수의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으로 자부한다"는 박구용(전남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박 교수는 김 교수가 제시하는 서로주체성이 담아야 할 내용에 대해 "'우리'라는 이름으로 동화되기를 강요하는 억압에 부단히 저항하고 '우리'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사회적 연대성의 원천인 '우리 안에서 타자'의 자리를 지키는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발전적인 제안을 했다.

박 교수는 이미 <우리 안의 타자>(철학과 현실사, 2003년 12월 출간)라는 책에서 김 교수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비판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김선욱(숭실대) 교수는 김상봉 교수의 작업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억압적 구조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낸다"며 그 중요성을 평가했다. 나아가 "여기에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부버의 사상을 더하고 또 한국인으로서의 경험이 융해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주체성과 자유의 개념에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열어 놓은데, 이 부분에 있어서 적어도 적절한 첫걸음을 옮겨 놓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김상봉 교수의 서양정신에 대한 비판이 매력적인 설명 방식이기는 하지만 다소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즉 "김상봉 교수가 수행하는 반성은 서양의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라며, "김상봉 교수의 작업은 서양 대 한국의 지역적 구도가 아니라, 근대성 대 근대성의 반성의 구도"라고 김상봉 교수가 비판하는 서구가 과연 서구 전체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서 김선욱 교수는 만남의 논리, 서로주체성의 논리, 다른 자유의 논리를 말할 때 "논의가 더욱 정치하게 전개되지 않으면 정치철학적 입장에서는 계속 의심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더 분발할 것을 요구했다.

열정 어린 청중들과 함께 5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회는 사회자인 홍윤기 교수가 "우리를 이렇게 장시간 앉아 있게 할 만큼 문제 자체를 만드는 데 굉장히 성공적이었다"면서도 "그럼에도 개념을 가다듬고 그 안의 인식을 더 치밀히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난 것 같다"고 토론회의 전체적인 평가를 하며 마무리되었다.

이날 토론회는 '한참 물오른' 소장학자들의 열정와 패기, 자신감을 읽을 수 있는 토론회였으며, 자생철학에 목마른 청중들의 열기와 '우리의 철학'에 대한 소중한 첫걸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사회자의 수준높은 유머와 청중의 폭소가 함께한 이례적인 토론회

▲ 통로까지 의자를 놓았고 최대한 밀착해서 앉았음에도 자리가 모자라 끝까지 서서 자리를 지킨 청중들도 있었다.

이번 토론회는 기존 학술토론회의 다양한 관례를 깬 이례적인 토론회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철학자들이 항상 우려먹었던 하이데거나 하버마스가 아닌 이례적으로 한국의 철학자를 대상으로 토론회를 열었다는 점이다(이 점에서 발제자 김상봉 교수는 대단히 행복한 철학자라 할 수 있겠다).

둘째, 학술토론회에 이례적으로 많은 청중이 몰려 열의를 보여준 점이다. 많은 학술토론회가 한 10명, 많아야 20명의 청중을 앞에 놓고 진행한다. 더구나 쉬는 시간이 지나면, 벌써 그 중 몇 명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토론회는 120여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다. 더구나 앉을 자리가 부족해 많은 이들이 불편한 자세로 있거나 또는 서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셋째, 톡톡 '튀는' 사회자의 진행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자는 논점을 정확하게 집어 주며 토론자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명확하게 요약하고 정리해주어 청중의 이해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시종 재치 있는 진행과 청중의 폭소를 끌어내는 유머로 '철학토크게임'을 이끌었다. 사회자의 이러한 여유는 논점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 서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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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의 꿈을 넘어-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
29일 장은주 교수, 김상봉 교장 등 치열한 논쟁
텍스트만보기   김재호(yital) 기자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학문의 주체성은 가능한가? 이런 물음에서 논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토론회에 말이다. 1월 29일,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와 참여사회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 장장 5시간에 걸친 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장은주 영산대 교수와 철학자 김상봉(민예총 문예아카데이 교장) 간의 그간 논쟁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자 마련된 것이다.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의 <나르시스의 꿈 :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한길사, 2002)에 대한 서평(교수신문328호)을 썼고, 김상봉 교장은 반론(교수신문329호)을 제기했다. 이후 논쟁은 다섯 차례에 걸쳐 거듭 진행됐다.

논쟁의 핵심은 이렇다. 김상봉 교장은 <나르시스의 꿈>에서 서양정신이 나르시시즘적이기 때문에 한계를 갖는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상실의 경험을 한 슬픔의 해석학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우리’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은주 교수는 그러한 ‘우리’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오히려 김상봉 교장의 시도는 이미 서양철학에 있었다고 비판한다.(교수신문에서 진행된 논쟁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맨 아래 정리된 것을 참조하시길.)

▲ 토론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는 김상봉 교장(왼쪽)
ⓒ2005 김재호
김상봉 교장은 이번 토론회를 위해서 62쪽 분량의 새로운 글을 선보였다. 제1부-서양적 주체성의 탐구, 제2부-서로주체성의 이념으로 구성된 글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좀 더 발전시켰다. 제1부에서 김상봉 교장은 나르시시즘의 역사에 대해서 꼼꼼히 정리한다. 제2부에서는 서양정신 극복을 위해서 다른 주체성, 다른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양에서 자행된 자기 복제로서의 타자인식과 만남이 아니라, 다른 정신세계의 주체와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제3세계의 만남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의 ‘meeting'이나 독일어의 ‘Begegnung’은 말자체가 건조하지만, 우리말의 ‘만남’은 풍부한 울림이 있다는 것이다.

김상봉 교장의 시도에 대해 여러 논평이 오고 갔다. 충북대 정세근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의 지적은 한국철학에 대한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좀 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은주 교수는 철학 자체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탈오리엔탈리즘도 극복하는 ‘우리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상봉 교장의 서양정신 분석은 오히려 서양적이라고 일갈한다.

성균관대학교 김세서리아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이 대안으로 내놓은 서로주체성을 이루기 위한 전제로서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자고 한다. 그녀는 차이와 차이-사이의 철학을 강조하면서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해서 주목한다. 유교적 여성주의가 아닌, “유교적” 여성주의를 내세우면서 우리를 먼저 확실히 알자고 했다. 전남대학교 박구용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의 시도는 ‘우리의 철학’이고, 장은주 교수의 지향점은 ‘모두의 철학자’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이 둘의 화해가능성으로서 ‘우리 안의 타자’철학을 제시한다. ‘우리 밖의 타자’는 투쟁의 상대로 인정되기 때문에 타자로서의 존재 자체를 의심받지 못한다. 따라서 타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진정한 타자를 주목하기 위해서 ‘우리 안의 타자’를 내세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숭실대 김선욱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의 작업이 “주체성과 자유의 개념에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열어 놓았다.”면서 앞으로 더 정밀한 작업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서로주체성이라는 발견이 과연 한국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고, 타자가 진정으로 타자성을 발현한다면, 즉 낯선 타자가 식인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적절한 대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자인 홍윤기 교수(동국대 철학과)는 자칫 어려울 수 있었던 토론회를 잘 정리해주었고 특유의 입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너무 많은 논평자들로 인해서 김상봉 교장과 장은주 교수의 논쟁이 더욱 진전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청중들의 생각을 들어볼 여유가 없었던 점도 옥의 티였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서양정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현시점에서 제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상봉 교장의 노력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고 있는 ‘서로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서양철학의 개념들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 지는 앞으로 계속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해서 제시한 제3세계의 ‘만남’이라는 것은 오히려 서양으로부터 가능한지도 모른다. 김상봉 교장이 교수신문 333호에서 지적했듯이. “타자와의 만남에 서툰 것은 서양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은 서툴지만 앞으로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가? 그가 경도되었던 것처럼 서양정신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더욱 좇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본다.

서양정신은 과연 나르시시즘에 빠졌는가?
교수신문에서 진행된 장은주 교수와 김상봉 교수간의 논쟁

장은주 교수 : ‘우리’도 ‘서양’도 초월해야

장은주 교수는 서평에서 <나르시스의 꿈>에 대해 세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나르시스의 꿈>이 서양 철학의 근본을 통쾌하게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열광을 볼 때 김상봉 교장이 제시하는 ‘우리’ 철학의 가능성이 도리어 우리를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한 것은 아니냐는 문제를 던진다. 둘째, 김상봉 교장의 서양 주체 철학 비판이 “나름의 탁월한 통찰”이긴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헤겔이나 칸트 또한 김상봉 교장이 제시하는 서로주체성을 각각 ‘총체적 인륜성’과 ‘도덕적 보편주의’에 담아내려 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셋째, 중요한 문제는 “서로주체성의 올바른 방식”과 “자유의 올바른 실현”인데, 그것이 “왜 꼭 서양이 아닌 ‘우리’의 성취로만 완수될 수 있느냐”며 “그 과제의 완수를 위해서는 우리는 ‘서양’도 ‘우리’도 진정으로 초월할 수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김상봉 교장 : 우리는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없어

장은주 교수의 물음에 대해 김상봉 교장이 답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김상봉 교장은 반론을 통해 우선 장은주 교수가 “우리의 나르시시즘”이라고 지적한 것에 동의하긴 하지만, 자신의 저서에서 쓰인 ‘나르시시즘’은 “오직 서양 정신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며 개념 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어서 김상봉 교장은, 자기 상실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서양인처럼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없으며 따라서 “나르시스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김상봉 교장은 장은주 교수가 제기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헤겔에겐 그가 사유했던 고유한 역사가 있었다.”며 자신의 서로주체성은 헤겔이 말하고자 했던 것과 같을 수 없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김상봉 교장은 이번 반론을 통해 장은주 교수의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교수신문 330호)을 통해 세 번째 물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묻는다.

장은주 교수 : 우리는 미래를 위한 설계이자 세계 시민이어야

장은주 교수의 물음은 김상봉 교장이 이야기하는 ‘우리’란 무엇이며, 그 ‘우리’가 서양 정신에서의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로 압축된다. 장은주 교수는 여기에서 김상봉 교장의 ‘우리’는 자기 상실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로 제한되면서, “그 자체로 역동화되고 주체화될 수 있는 실체”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냐고 간접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은주 교수는 “우리는 어떤 규정된 과거의 산물이거나 현재의 진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설계”이며 “세계 시민”이어야 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김상봉 교장 : 서양 정신은 정신의 타자는 알아도 타자적 정신은 몰라

이어진 반론(교수신문 331호)에서 김상봉 교장은 새로운 논쟁점을 던진다. 김상봉 교장은 “민족이 서로주체성의 최종적 완성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민족 역시 “타민족과의 만남 속에서 편협한 자기동일성을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힌다. 김상봉 교장은 곧이어 서양 정신이 “정신의 타자는 알아도 타자적 정신은 알지 못한다”며 서양 정신의 한계를 다시금 지적한다.

즉, 헤겔에서 레비나스까지 서양철학자들이 서양 정신 또는 서구 사회 내에 존재하는 타자의 문제는 고민했지만, 서양 정신 밖에 존재하는 다른 정신세계와 충돌해 빚어지는 문제에는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은주 교수 : 서양 정신도 편협함을 인정하고 반성과 성찰의 노력 기울이고 있어

장은주 교수는 다시 반론(교수신문 332호)을 펼친다. 장은주 교수는 ‘우리’에 대한 김상봉 교장의 주장에 상당한 공감을 표현하면서, 또한 동시에 ‘우리’만 ‘우리의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김상봉 교장의 주장에는 다시금 물음표를 던진다. 이어서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이 주장하는, 우리가 자기 상실의 역사를 경험한 덕택(?)에 “세계사적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대면하고 먼저 사유할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을 누린 위치에 있다”는 문제 설정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또한 장은주 교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예로 들며, 서양 정신의 편협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반성적으로 성찰하려는 노력들이 “‘새로운 유럽’에 대한 철저히 서양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장은주 교수는 중요한 것은 “서양이냐 우리냐”가 아니라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옳은지, 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김상봉 교장 : 서양 철학은 주체성의 역설을 감당할 수 없어

이에 대해 김상봉 교장은 논쟁의 계기가 된 자신의 저서 <나르시스의 꿈>에서 “서양 철학의 유산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다.”며, 자신은 “서양적 주체성과 자유의 이념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김상봉 교장은, 데리다 역시 열린 유럽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은 다시 서양 정신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고 강조한다.

덧붙여,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주체성을 타자에게 양도할 수 있어야”하는데 “주체성을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주체성을 지양해야”하는 역설을 서양 철학은 스스로 풀어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역설을 몸으로 살아온” 우리야말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김상봉 교장은 주장한다.(교수신문 333호)

장은주 교수 : '문제 해결적 합리성' 필요해

두 철학자의 논쟁은 교수신문 334호까지도 계속된다. 장은주 교수는 앞서의 반론으로 김상봉 교장이 지나친 방식으로 데리다를 비판하고 있다며, “기대하지도 초대하지도 않은 완전히 낯선 방문자에게도 스스로를 열어젖히자는 데리다의 ‘환대’ 개념”은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장은주 교수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우리’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것”인지 다시 묻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철학의 출발점을 새로 설정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한다. 더 나아가 장은주 교수는, ‘우리’라는 것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체’인 만큼 우리와 서양을 구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 해결에 제대로 기여하는 학문만이 좋은 학문이고 진짜 가치 있는 ‘우리’의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문제 해결적 합리성”이란 개념으로 압축해 제시한다.

이로써 신문 지면을 빌린 두 철학자의 대화는 끝이 났다. 서평을 통한 문제 제기에서 마지막 반론까지 일곱 편의 글이 교수 신문에 게재됐다. 일곱 편의 글 속에서 ‘우리’와 ‘서양 정신의 극복’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두 철학자의 대화는 주위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지면 바깥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토론회가 기획됐고, 두 철학자는 이 자리를 통해 지면으로 미처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눌 기회를 얻었다. / 이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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