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라타니 고진은 <탐구 1>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말하다-듣다>의 관계가 아니라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의 핵심적 내용으로 설명한다.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는 <말하다-듣다>의 관계와는 달리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의 공통된 언어규칙이 전제되지 않는다.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공통된 언어규칙을 공유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의 이러한 불확정성을 기준으로 자신의 가르치는 방법을 교정해야 한다. 그 결과 이 관계에서 결과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된다.
고진에 의하면 칸트에게서 공공적인 것은 세계시민적 공공성이다. 그에게 사적인 것은 오히려 기존의 국가적, 사회적 위치에서 행동하는 개인의 행위이다. 따라서 칸트적 의미의 공공성이라는 것은 기존의 통상적 의미로서의 국가적 공공성내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고 자기자신을 기존의 공공성 내에 마주세움으로써 단독적인 개인으로, 도덕적으로 행위함으로써 존재하는 공공성이다. 다시말해 세계시민적 공공성은 개인의 단독성을 전제하고 있고, 그것은 개별적인 것을 취합하는 일반성으로서의 공공성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이 '단독자'로 도덕적 결단을 함에 의해 성립하는 '보편성'으로서의 공공성이며 시간적으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적 혹은 잠재적인 공공성이라는 것.
들뢰즈에 의하면 헤겔에게서의 공공성은 이와는 다르게 개별-일반이라는 대립항을 통해 성립하는데 이 대립항은 직접적으로 마주서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라는 매개를 통해 '종합'된다. 이 회로속에서 개별의 잔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개별성은 특수성을 통하여 일반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 속에 어떠한 잔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개별적인 것을 즉 감성적인 것을 오성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상상적 도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속에서 개별적인 것 혹은 단독적인 것은 일반으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물을 가진다. 때문에 그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초월적transzendental인 과정이다. 때문에 개별자 혹은 단독자는 그자체로 보편이 된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언명령인 것이다.
다시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가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는 언어의 단일한 논리적 구조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가 초기에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도 일종의 '경계체험'이다. 그는 세계의 경계 혹은 사유와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말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할수 있는 명제로 이야기했던 것은 논리적 형식을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논리적 형식'자체는 논리적으로 묘사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내포한다. 그것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수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하였던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이 논리의 경계가 자리잡는 곳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명제 즉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런 난점 때문에 후기에 가서 그는 언어의 의미를 '언어의 사용' 혹은 '언어놀이' '삶의 양식'등과 결부시키게 된다.
이런 문제점은 프로이트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과학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모든 과학은 우리의 심리 장치를 통해 매개된 관찰과 경험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정신분석학)은 이 장치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유비는 끝난다. " (<라캉과 현대철학:홍준기> 에서 재인용)
여기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과 과학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기존의 과학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 왜냐하면 과학은 이미 그자체에 심리적 매개를 경유하고 있으므로. 그런데 정신분석학은 이런 심리적 매개과정 자체를 탐구하는 것. 때문에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존재증명은 무의식 스스로가 대상이자 동시에 관찰주체가 되는 역설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설도 마찬가지로 이와같은 난점을 <시간의식>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한편 크립키는 그의 언어이론에서 고유명사를 개체의 여러 성질을 기술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단적으로 개체를 '지시'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한다. 고유명사를 이렇게 규정하게 되면 언어는 개별-일반성의 회로로 환원되지 않는 잔여물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잔여물들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칸트로 돌아가면 이런 사회적인 것이 바로 칸트적 공공성으로 연결된다. 고유명사로 표현되는 국가로 표현되는 일반성으로서의 공공성이 아니라 이러한 일반성으로서의 공공성이 아닌 자신의 단독성을 보유한채 자시 자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보편성을 도출해 내는 그런 의미의 공공성. 이것이 칸트가 이야기하는 공공성이라는 것이다. 반면 헤겔적 공공성은 그의 인륜 혹은 국가에 대한 설명을 비추어 보면 단독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공공성이라기보다는 특수를 매개로 한 과정의 결과로서의 공공성이다. 이것이 칸트와 헤겔의 차이가 아닐까? 그래서 들뢰즈는 이와같은 헤겔철학의 환원적 특성 때문에 스스로를 반헤겔주의자로 규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칸트의 공공성은 자연스럽게 그의 '윤리'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서 도덕은 "공동체의 규칙이나 개인의 감정, 이해를 괄호에 넣어서 생각하"는 것(고진)이다. 때문에 그것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유'의 문제라는 것. 그런데 이 자유 혹은 자유의지는 여러 인과성을 쫓아가는 과정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인과성들은 서로가 무한히 연결되어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다만 뒤쫓아만 갈 뿐 "모든 사건의 이런 무제한적 계열은 자연에서의 끝없는 연쇄이므로 나의 원인성 역시 결코 자유는 아니다."(<실천이성비판>트랜스크리틱에서 재인용) 스피노자는 이런 인과성의 무한계열은 오직 원인의 원인에 의해서만 즉 신에 의해서만 온전히 파악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칸트는 위의 설명에서 이를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현실에서는 자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자유였던 것처럼 간주 할 때 즉 인과성의 무한계열을 괄호에 넣고 그것을 알고있는 것으로 가정할때 우리는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때의 자유는 자기 의지에 의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그런 자유이다. 우리는 우리 행위의 인과성을 괄호에 넣고 자유가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성립한 자유를 누리는 존재이므로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결과가 어떠한 것이든 항상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 자유는 이처럼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논리적 인과성에 의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윤리와 공공성을 이처럼 규정하게 되면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타자'이다. 타자는 우리와 공동의 규칙과 규범을 공유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들은 우리의 공동체 밖의 존재들이며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이다. 그들은 비록 우리와 공동의 규범과 규칙을 공유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을 승인해야 한다. 비록 그들의 인과성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칸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오히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를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와 공공성은 이처럼 인과성의 경계에서 성립한다. 우리는 인과성으로만 즉 이론적으로만 자유와 윤리를 논해서도 안되고 인과성의 외부에서만 자유를 볼수도 없다. 인과성 자체는 바로 그 스스로의 경계에서 성립한다. 공공성과 윤리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그 사이 혹은 경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