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김상봉씨의 <나르시스의 꿈>과 관련된 기사를 옮겨온다.  얼마전 <서로주체성의 이념> 이라는 신간을 출간한 것으로 보아 김상봉씨는 <나르시스의 꿈>에서 제기했던 서양철학비판작업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토론회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비판을 얼마나 잘 수용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관련기사를 읽어보면 김상봉씨의 '서로주체성'에서 제기되는 타자가 지나치게 두루뭉실?하고 세밀하게 구별되어있지 못하다는 내용의 비판이 나온다. 또 오늘날 현대서양철학에서 제기되고있는 타자성의 철학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아직은 불분명해 보인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 비판도 아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그가 제기하는 '서로주체성'이라는 개념이 독창적  측면 예컨대

"김선욱 : 김상봉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과연 새로운 거냐 하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저는 사실은 (김상봉 선생님의 작업이) 대단히 새롭다고 봅니다. ‘서로주체성’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공감이 가요. 예를 들어서 ‘커뮤니케이션’이 하버마스가 얘기하는 거랑, 아렌트가 얘기하는 거랑, 테일러가 얘기하는 게 다 다르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것과 또 다른 ‘만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정말 자기상실을 경험하지 않고, 정말 처절한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만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드러내는 데, 그 방식이 장은주 선생님이 지적하셨던 것처럼 서양적이지만, 지금 이 이상의 도구가 어떤 것이 있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배우고 있습니다."

와 같은 장점들이 있는 반면 김상봉씨 스스로가 인정하는 문제점..

"김상봉 : 예. (청중, 웃음) 박구용 선생의 비판을 받으면서... 제가 자백을 하고 싶은... 저는 피해자 입장에서 존재를 사유하려 하고 했습니다. 피해자는 어디서도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피해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철학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잘못된 피해자 의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로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의 타자’를 제대로 볼 수 없겠냐는 질책을 잊지 않겠습니다."

"김상봉 : 가장 어려운 지점인데요. 인식은 자동적으로 사물화시킵니다. 사물화시키지 않는 인식이 가능한가? 그러니까 인식 그 자체가 관찰이 아니라 ‘만남’으로 발전할 수가 있는 건가? 하는 게 저 물음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고민하고 있는 게 그겁니다. 논리적인 사유, 사물에 대한 인식, 이것이 전부 사물적인 인식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 져 있습니다. 서구의 인식이. 인격적인 ‘만남’을 모델로 해서 발생하는 지식이 과연 가능한가, 인식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김선욱 선생님이 지적해주시기 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문제인데, 부끄럽게도 아직은 아무 것도 내놓을 게 없습니다."



다시말하면.."사물화시키지 않는 인식이 그 자체로 "관찰"이 아닌 "만남"으로서의 인식으로 발전할수있는가 하는 물음 그리고 "인격적인 만남"을 모델로한 지식이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지는 의문은 칸트의 철학에서 제기되는 초월성과 그로부터 제기되는 윤리는 어딘지 김상봉씨의 주체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르시스적인 주체의 내성으로부터 초월해서 존재하는 타자를 칸트는 그의 초월철학에서 제기하는데 결국 그것은 인식의 수동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의 수동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주체는 김상봉씨의 서로주체성 개념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내가 아직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와 같은 이전저서에서 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의 칸트철학비판을 독해하기 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보아서는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하기 힘들다.   또한 데리다의 "환대"개념속에서 발견되는 타자와 라캉이나 지젝의 저작속에서 발견되는"텅빈 주체"개념 등과의 비교작업도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정신, 나르시스의 꿈에 질식당하다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 토론회
텍스트만보기   서상일(dnflwlq) 기자   
▲ 김상봉 교수의 문제적 저서 <나르시스의 꿈>을 두고 교수신문에서 벌어진 김상봉 교수와 장은주 교수의 '1차전' 논쟁에 이어 '2차전'이 벌어졌다.
ⓒ2005 서상일
수준 높은 토론이 벌어졌다.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와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 지난 1월 2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열린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 - 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이하 나르시스의 꿈)' 토론회가 그것이다.

'나르시스의 꿈' 토론회는 학문의 주체성과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민적 주체성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토론회였다. 그 의미만큼이나 이날 토론자들은 서로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그럼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은 자세로 수준 있는 토론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수준과 의미만큼이나 이날 토론회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청중들이 몰려 주최측을 당황케 했다. 120여명의 청중이 몰리는 바람에 좁은 장소에 급하게 의자를 마련하느라 진땀을 뺐기 때문이다. 결국 토론회는 예정 시각인 3시를 10분 넘겨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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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주체성의 정신적 지향은 제국주의라는 현실적 결과 낳아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나르시스의 꿈>의 저자 김상봉 교수는 이날의 토론을 위해 원고지 600매 정도 분량의 발제를 새로 준비했다. 이전의 <나르시스의 꿈>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들이 꽤 있었으며, 더 진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김상봉 교수는 "서양철학은 아직도 서양철학의 지역성을 명확히 자각하지 못한 철학"이라고 비판하며 발제를 시작했다. 서양철학은 "철학이 시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기는 했으나, 자기들의 철학이 어쩔 수 없이 자기들의 역사와 언어에 의해 제약된 철학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는 비판이었다.

이어서 김 교수는 서양정신 전체를 "이제나 저제나 자기만을 욕구하는 아집, 아무리 형태가 바뀌어도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집요한 홀로주체성, 그것이 서양 정신의 본질"이라고 규정한다.

김 교수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서양정신의 본질이 그런 한 타자를 배제할 수밖에 없고, 타자를 노예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정신적 지향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 결과를 낳게" 되는 바, 그 '현실태'가 바로 북미대륙에서의 원주민 집단 학살과 제국주의라고 말한다.

바로 "그리스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 온 제국주의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태동한 서구적 자유의 이념의 현실태"로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서양정신의 '홀로주체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은 서양정신의 역사적 발전 단계에 대한 은유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그 정당성은 인정하더라도 서양정신에 대한 '무모한 일반화'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김 교수는 서구 철학 전체를 '거시적인 시각에서 일관되게 꿰뚫는 통찰'(一以貫之)을 바탕으로 발제문 속에 '나르시즘의 역사'라는 원고를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서양정신에 대한 은유인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은 네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첫째, 나르시스가 타인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대상(세계) 인식에 탐닉하는 단계. 둘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자신의 모습에 매혹되는 단계, 즉 나르시즘의 내면화 단계. 셋째,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단계, 즉 나르시즘의 완성과 죽음 단계. 넷째, 지하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강물 위에 비추어 보는 단계이다.

김 교수는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의 네 단계에 대해 "서양 정신이 거쳐 온 역사적 발전 단계에 대한 은유"라고 말한다. 따라서 김 교수는 구체적으로 그리스 철학과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에 대해 분석하며 나르시스의 삶과 죽음의 네 단계와 결부시킨 해석을 보여주었다.

▲ (좌)김상봉 교수가 발제를 하는 동안, (우)한 청중이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다.
ⓒ2005 서상일
몇몇 서양철학자들의 초보적인 시도가 서양철학의 물길 바꾸지 않아

김 교수가 '타자와 만날 수 없는 정신'이라고 규정한 서양이 최근 타자와의 만남을 위한 철학적 시도를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철학자 레비나스와 데리다를 들 수 있다. 그래서 그간 논쟁에서 이 두 서양 철학자는 서양정신이 김 교수가 지적한 것만큼 '지독하게' 자기동일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사례로 거론되곤 했다.

김 교수도 이 두 철학자의 사례에 대해 "오늘날 서양 철학은 아주 조금씩 만남에 대해 말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만남에 관해서 볼 때 서양철학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라며, "몇몇 철학자들의 초보적인 시도가 서양철학의 물길을 하루 아침에 만남의 철학으로 바꿀 수 있다는 듯이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철학이 역사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며 "서양 철학이 만남에 대해 사유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서양 철학이 타자적 정신과 실제로 만날 수 있어야만 한다"고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서로주체성의 변증법은 자기의 확대가 아닌 만남의 확장

김 교수는 이렇게 서양정신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시민적 주체성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김 교수가 제시하는 '서로주체성'인데, 이는 자기동일성을 고집하며 끊임없는 자기확대의 과정을 밟는 '홀로주체성'과 달리, 자기 상실로 인한 아픔과 부끄러움으로 타자를 '잉태'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이러한 서로주체성이야말로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김 교수는 '서로주체성의 변증법'은 서양정신처럼 자기의 확대가 아닌 만남의 확장을 지향하며, 이때 주체성은 만남을 통해 자기를 버릴 줄 알고 더 넓은 주체성으로 발돔움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로서 우리는 새로운 시민적 주체성으로 새로운 개념의 자유로 진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선욱, 박구용, 김상봉, 장은주, 정세근, 김세서리아 교수.
ⓒ2005 서상일
토론자들, 김 교수의 성과 인정하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해

김상봉 교수의 1시간에 가까운 발제가 끝나고, 토론자로 참석한 정세근(충북대) 교수는 "그리스 정신이 유일신을 받아들이는 데, 단절감이 없었다는 (김상봉 교수의) 해석에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며 서양 중세철학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우리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출발점이 아니라 충분하지 않은 성과"라며 '우리의 철학'을 하자는 형식은 마련한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나 아직 구체적 내용은 부족하다며 더 분발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1차전의 주인공'인 장은주(영산대) 교수는 김상봉 교수의 작업에 대해 우리가 역사를 통해 시도해 왔던 '동도서기'와 달리 "서도(西道, 서양정신)를 통한 서도의 극복"으로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조심스런 평가를 시도했다.

즉 "서도 그 자체의 관점에서 서도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서도의 내재적 초월을 위한 시도", 또는 "서도의 가장 훌륭한 아우라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아니 그 아우라의 광채에 감탄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한계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으로 평가를 시도했다.

그러나 김 교수의 서양정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 대해서는 "사회가 변했다"며 다른 견해를 보여주었다. 즉, 김 교수가 통렬하게 비판하는 서양정신은 "서양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버린 낡은 유산"이라는 것이다. 이날 사회자인 홍윤기(동국대) 교수의 말대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이었다.

적절한 첫걸음 딛었으나, 개념을 가다듬고 그 안의 인식 더 치밀히 해야

이어 "유교적" 여성주의를 말하는 김세서리아(성균관대) 교수는 김 교수가 제시한 서로주체성에 알찬 내용을 채우기 위해 '차이-사이의 철학'을 검토해 볼 것을 제안했다. 즉,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가 아닌 '너' 또는 '그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면서 너와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방법"이라며, "이것을 터득하는 것이 나르시스의 꿈을 넘는 요령"이 될 것이라고 발전적인 제안을 했다.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김상봉 교수의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으로 자부한다"는 박구용(전남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박 교수는 김 교수가 제시하는 서로주체성이 담아야 할 내용에 대해 "'우리'라는 이름으로 동화되기를 강요하는 억압에 부단히 저항하고 '우리'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사회적 연대성의 원천인 '우리 안에서 타자'의 자리를 지키는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발전적인 제안을 했다.

박 교수는 이미 <우리 안의 타자>(철학과 현실사, 2003년 12월 출간)라는 책에서 김 교수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비판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김선욱(숭실대) 교수는 김상봉 교수의 작업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억압적 구조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낸다"며 그 중요성을 평가했다. 나아가 "여기에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부버의 사상을 더하고 또 한국인으로서의 경험이 융해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주체성과 자유의 개념에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열어 놓은데, 이 부분에 있어서 적어도 적절한 첫걸음을 옮겨 놓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김상봉 교수의 서양정신에 대한 비판이 매력적인 설명 방식이기는 하지만 다소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즉 "김상봉 교수가 수행하는 반성은 서양의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라며, "김상봉 교수의 작업은 서양 대 한국의 지역적 구도가 아니라, 근대성 대 근대성의 반성의 구도"라고 김상봉 교수가 비판하는 서구가 과연 서구 전체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서 김선욱 교수는 만남의 논리, 서로주체성의 논리, 다른 자유의 논리를 말할 때 "논의가 더욱 정치하게 전개되지 않으면 정치철학적 입장에서는 계속 의심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더 분발할 것을 요구했다.

열정 어린 청중들과 함께 5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회는 사회자인 홍윤기 교수가 "우리를 이렇게 장시간 앉아 있게 할 만큼 문제 자체를 만드는 데 굉장히 성공적이었다"면서도 "그럼에도 개념을 가다듬고 그 안의 인식을 더 치밀히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난 것 같다"고 토론회의 전체적인 평가를 하며 마무리되었다.

이날 토론회는 '한참 물오른' 소장학자들의 열정와 패기, 자신감을 읽을 수 있는 토론회였으며, 자생철학에 목마른 청중들의 열기와 '우리의 철학'에 대한 소중한 첫걸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사회자의 수준높은 유머와 청중의 폭소가 함께한 이례적인 토론회

▲ 통로까지 의자를 놓았고 최대한 밀착해서 앉았음에도 자리가 모자라 끝까지 서서 자리를 지킨 청중들도 있었다.

이번 토론회는 기존 학술토론회의 다양한 관례를 깬 이례적인 토론회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철학자들이 항상 우려먹었던 하이데거나 하버마스가 아닌 이례적으로 한국의 철학자를 대상으로 토론회를 열었다는 점이다(이 점에서 발제자 김상봉 교수는 대단히 행복한 철학자라 할 수 있겠다).

둘째, 학술토론회에 이례적으로 많은 청중이 몰려 열의를 보여준 점이다. 많은 학술토론회가 한 10명, 많아야 20명의 청중을 앞에 놓고 진행한다. 더구나 쉬는 시간이 지나면, 벌써 그 중 몇 명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토론회는 120여명이 넘는 청중이 몰렸다. 더구나 앉을 자리가 부족해 많은 이들이 불편한 자세로 있거나 또는 서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셋째, 톡톡 '튀는' 사회자의 진행이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자는 논점을 정확하게 집어 주며 토론자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명확하게 요약하고 정리해주어 청중의 이해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시종 재치 있는 진행과 청중의 폭소를 끌어내는 유머로 '철학토크게임'을 이끌었다. 사회자의 이러한 여유는 논점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 서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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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의 꿈을 넘어-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
29일 장은주 교수, 김상봉 교장 등 치열한 논쟁
텍스트만보기   김재호(yital) 기자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학문의 주체성은 가능한가? 이런 물음에서 논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탈식민주의와 시민적 주체성의 진보’토론회에 말이다. 1월 29일,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와 참여사회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 장장 5시간에 걸친 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장은주 영산대 교수와 철학자 김상봉(민예총 문예아카데이 교장) 간의 그간 논쟁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자 마련된 것이다.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의 <나르시스의 꿈 :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한길사, 2002)에 대한 서평(교수신문328호)을 썼고, 김상봉 교장은 반론(교수신문329호)을 제기했다. 이후 논쟁은 다섯 차례에 걸쳐 거듭 진행됐다.

논쟁의 핵심은 이렇다. 김상봉 교장은 <나르시스의 꿈>에서 서양정신이 나르시시즘적이기 때문에 한계를 갖는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상실의 경험을 한 슬픔의 해석학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우리’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은주 교수는 그러한 ‘우리’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오히려 김상봉 교장의 시도는 이미 서양철학에 있었다고 비판한다.(교수신문에서 진행된 논쟁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맨 아래 정리된 것을 참조하시길.)

▲ 토론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는 김상봉 교장(왼쪽)
ⓒ2005 김재호
김상봉 교장은 이번 토론회를 위해서 62쪽 분량의 새로운 글을 선보였다. 제1부-서양적 주체성의 탐구, 제2부-서로주체성의 이념으로 구성된 글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좀 더 발전시켰다. 제1부에서 김상봉 교장은 나르시시즘의 역사에 대해서 꼼꼼히 정리한다. 제2부에서는 서양정신 극복을 위해서 다른 주체성, 다른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양에서 자행된 자기 복제로서의 타자인식과 만남이 아니라, 다른 정신세계의 주체와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제3세계의 만남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의 ‘meeting'이나 독일어의 ‘Begegnung’은 말자체가 건조하지만, 우리말의 ‘만남’은 풍부한 울림이 있다는 것이다.

김상봉 교장의 시도에 대해 여러 논평이 오고 갔다. 충북대 정세근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의 지적은 한국철학에 대한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좀 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은주 교수는 철학 자체에 대한 재정의를 요구한다. 탈오리엔탈리즘도 극복하는 ‘우리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상봉 교장의 서양정신 분석은 오히려 서양적이라고 일갈한다.

성균관대학교 김세서리아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이 대안으로 내놓은 서로주체성을 이루기 위한 전제로서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자고 한다. 그녀는 차이와 차이-사이의 철학을 강조하면서 한국사회의 여성에 대해서 주목한다. 유교적 여성주의가 아닌, “유교적” 여성주의를 내세우면서 우리를 먼저 확실히 알자고 했다. 전남대학교 박구용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의 시도는 ‘우리의 철학’이고, 장은주 교수의 지향점은 ‘모두의 철학자’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이 둘의 화해가능성으로서 ‘우리 안의 타자’철학을 제시한다. ‘우리 밖의 타자’는 투쟁의 상대로 인정되기 때문에 타자로서의 존재 자체를 의심받지 못한다. 따라서 타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진정한 타자를 주목하기 위해서 ‘우리 안의 타자’를 내세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숭실대 김선욱 논평자는 김상봉 교장의 작업이 “주체성과 자유의 개념에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열어 놓았다.”면서 앞으로 더 정밀한 작업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서로주체성이라는 발견이 과연 한국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고, 타자가 진정으로 타자성을 발현한다면, 즉 낯선 타자가 식인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적절한 대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자인 홍윤기 교수(동국대 철학과)는 자칫 어려울 수 있었던 토론회를 잘 정리해주었고 특유의 입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너무 많은 논평자들로 인해서 김상봉 교장과 장은주 교수의 논쟁이 더욱 진전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청중들의 생각을 들어볼 여유가 없었던 점도 옥의 티였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학문을 해야 할 것인가?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서양정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현시점에서 제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상봉 교장의 노력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고 있는 ‘서로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서양철학의 개념들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 지는 앞으로 계속 연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해서 제시한 제3세계의 ‘만남’이라는 것은 오히려 서양으로부터 가능한지도 모른다. 김상봉 교장이 교수신문 333호에서 지적했듯이. “타자와의 만남에 서툰 것은 서양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금은 서툴지만 앞으로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가? 그가 경도되었던 것처럼 서양정신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더욱 좇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본다.

서양정신은 과연 나르시시즘에 빠졌는가?
교수신문에서 진행된 장은주 교수와 김상봉 교수간의 논쟁

장은주 교수 : ‘우리’도 ‘서양’도 초월해야

장은주 교수는 서평에서 <나르시스의 꿈>에 대해 세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나르시스의 꿈>이 서양 철학의 근본을 통쾌하게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열광을 볼 때 김상봉 교장이 제시하는 ‘우리’ 철학의 가능성이 도리어 우리를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한 것은 아니냐는 문제를 던진다. 둘째, 김상봉 교장의 서양 주체 철학 비판이 “나름의 탁월한 통찰”이긴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헤겔이나 칸트 또한 김상봉 교장이 제시하는 서로주체성을 각각 ‘총체적 인륜성’과 ‘도덕적 보편주의’에 담아내려 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셋째, 중요한 문제는 “서로주체성의 올바른 방식”과 “자유의 올바른 실현”인데, 그것이 “왜 꼭 서양이 아닌 ‘우리’의 성취로만 완수될 수 있느냐”며 “그 과제의 완수를 위해서는 우리는 ‘서양’도 ‘우리’도 진정으로 초월할 수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김상봉 교장 : 우리는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없어

장은주 교수의 물음에 대해 김상봉 교장이 답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김상봉 교장은 반론을 통해 우선 장은주 교수가 “우리의 나르시시즘”이라고 지적한 것에 동의하긴 하지만, 자신의 저서에서 쓰인 ‘나르시시즘’은 “오직 서양 정신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며 개념 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어서 김상봉 교장은, 자기 상실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서양인처럼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없으며 따라서 “나르시스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김상봉 교장은 장은주 교수가 제기한 두 번째 문제에 대해 “헤겔에겐 그가 사유했던 고유한 역사가 있었다.”며 자신의 서로주체성은 헤겔이 말하고자 했던 것과 같을 수 없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김상봉 교장은 이번 반론을 통해 장은주 교수의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교수신문 330호)을 통해 세 번째 물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묻는다.

장은주 교수 : 우리는 미래를 위한 설계이자 세계 시민이어야

장은주 교수의 물음은 김상봉 교장이 이야기하는 ‘우리’란 무엇이며, 그 ‘우리’가 서양 정신에서의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로 압축된다. 장은주 교수는 여기에서 김상봉 교장의 ‘우리’는 자기 상실의 역사를 경험한 ‘우리’로 제한되면서, “그 자체로 역동화되고 주체화될 수 있는 실체”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가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냐고 간접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은주 교수는 “우리는 어떤 규정된 과거의 산물이거나 현재의 진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설계”이며 “세계 시민”이어야 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김상봉 교장 : 서양 정신은 정신의 타자는 알아도 타자적 정신은 몰라

이어진 반론(교수신문 331호)에서 김상봉 교장은 새로운 논쟁점을 던진다. 김상봉 교장은 “민족이 서로주체성의 최종적 완성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민족 역시 “타민족과의 만남 속에서 편협한 자기동일성을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힌다. 김상봉 교장은 곧이어 서양 정신이 “정신의 타자는 알아도 타자적 정신은 알지 못한다”며 서양 정신의 한계를 다시금 지적한다.

즉, 헤겔에서 레비나스까지 서양철학자들이 서양 정신 또는 서구 사회 내에 존재하는 타자의 문제는 고민했지만, 서양 정신 밖에 존재하는 다른 정신세계와 충돌해 빚어지는 문제에는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장은주 교수 : 서양 정신도 편협함을 인정하고 반성과 성찰의 노력 기울이고 있어

장은주 교수는 다시 반론(교수신문 332호)을 펼친다. 장은주 교수는 ‘우리’에 대한 김상봉 교장의 주장에 상당한 공감을 표현하면서, 또한 동시에 ‘우리’만 ‘우리의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김상봉 교장의 주장에는 다시금 물음표를 던진다. 이어서 장은주 교수는 김상봉 교장이 주장하는, 우리가 자기 상실의 역사를 경험한 덕택(?)에 “세계사적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대면하고 먼저 사유할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을 누린 위치에 있다”는 문제 설정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또한 장은주 교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예로 들며, 서양 정신의 편협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반성적으로 성찰하려는 노력들이 “‘새로운 유럽’에 대한 철저히 서양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장은주 교수는 중요한 것은 “서양이냐 우리냐”가 아니라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옳은지, 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김상봉 교장 : 서양 철학은 주체성의 역설을 감당할 수 없어

이에 대해 김상봉 교장은 논쟁의 계기가 된 자신의 저서 <나르시스의 꿈>에서 “서양 철학의 유산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다.”며, 자신은 “서양적 주체성과 자유의 이념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김상봉 교장은, 데리다 역시 열린 유럽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은 다시 서양 정신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고 강조한다.

덧붙여,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주체성을 타자에게 양도할 수 있어야”하는데 “주체성을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주체성을 지양해야”하는 역설을 서양 철학은 스스로 풀어낼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역설을 몸으로 살아온” 우리야말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김상봉 교장은 주장한다.(교수신문 333호)

장은주 교수 : '문제 해결적 합리성' 필요해

두 철학자의 논쟁은 교수신문 334호까지도 계속된다. 장은주 교수는 앞서의 반론으로 김상봉 교장이 지나친 방식으로 데리다를 비판하고 있다며, “기대하지도 초대하지도 않은 완전히 낯선 방문자에게도 스스로를 열어젖히자는 데리다의 ‘환대’ 개념”은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장은주 교수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우리’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것”인지 다시 묻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철학의 출발점을 새로 설정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한다. 더 나아가 장은주 교수는, ‘우리’라는 것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체’인 만큼 우리와 서양을 구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 해결에 제대로 기여하는 학문만이 좋은 학문이고 진짜 가치 있는 ‘우리’의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문제 해결적 합리성”이란 개념으로 압축해 제시한다.

이로써 신문 지면을 빌린 두 철학자의 대화는 끝이 났다. 서평을 통한 문제 제기에서 마지막 반론까지 일곱 편의 글이 교수 신문에 게재됐다. 일곱 편의 글 속에서 ‘우리’와 ‘서양 정신의 극복’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두 철학자의 대화는 주위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지면 바깥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토론회가 기획됐고, 두 철학자는 이 자리를 통해 지면으로 미처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눌 기회를 얻었다. / 이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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