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법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만 사실 성철 스님이 최초로 한 말은 아니고 선가禪家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입니다. 이 말의 해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제 나름대로 이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일단 가장 단순하게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AA이다라는 동일률로 먼저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산은 산이기에 산이고 물은 물이기에 물이다라는 논리죠. A=A이므로 산을 단지 산으로 물을 단지 물로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으로부터 우리는 동일한 어구의 반복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저 말은 다음과 같은 좀더 긴 문장에서 따온 말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렇게 구성되는 전체 문장의 마지막 구절만 따온 것이죠. 먼저 처음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할 때의 그것은 동일률의 논리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동일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 객체가 항상 그러하다라는 사태를 전제합니다. , 객체와 그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의 동일성을 전제해야만 성립하는 것이죠. 대상을 분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은 처음 인식했을 때의 그 양태와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 그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의식도 항상 일정해야 하죠. 대상A가 갑자기 대상B로 바뀐다던가 하는 현상이 생긴다면 산은 산일수 없고 물도 물일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와 같은 동일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 대상과의 구별이 가능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와 객체간의 이원적 구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내 마음 속의 것인지 나와는 무관한 내 밖의 것인지 혼동되면 여기서 동일성에 기반한 동일률은 더 이상 가능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 기반한 세계가 바로 이런 세계입니다. 상식적이면서 일상적인 현상계 그리고 동일률, 모순률, 배중률과 같은 형식논리와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죠. 그리고 한번 이렇게 어떤 대상을 AB로 규정하게 되면 그 대상은 그 개념으로 고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체로서의 AB는 늘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만물은 늘 유동하는 것이죠. 그런데 AA라고 부르는 순간 AA(라는 개념)으로 고정됩니다. 말이나 개념에 의해 우리는 A를 분별할수있게 되었지만 그순간 실체로서의 A는 잊혀지게 되는 것이죠.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일상적 분별력으로서의 현상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이 현상계의 배후나 본질을 캐묻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죠.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 이런 본질인식의 추구를 한 것이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20세기물리학의 하나인 양자역학과 같은 경우죠. 양자단위의 극소세계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에서의 물리학 다시말해 고전물리학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양자의 세계는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측정대상과 측정행위간의 명백한 분리도 여기서는 불분명해집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대상에 영향을 줄수있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일상적 분별력에 기반한 의식을 표층의식이라고 한다면 일상적 분별이 불가능한 무분별의 세계를 바라보는 의식을 심층의식이라고 합니다.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하게는 대상의 분별가능성에 있습니다. 일상적 의식으로는 서로 다른 것으로 인지되는 AB는 심층의식의 관점에서는 무분별 혹은 무분절적인 일자나 전체로서의 실체일 수 있습니다. 현상적이거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AB는 다르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니 사실은 구분되지 않은 동일한 실체라는 시각이죠. 표층의식이 현상을 보는 의식의 상태 혹은 관점이라면 심층의식은 대상의 이면이나 본질을 들여다 보려는 의식입니다. 표층의식으로 봤을 때 산은 산일 뿐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산이 산이 아닐 가능성을 이 때 보게 됩니다. 산이 물일 수도 있고 물이 산일 수도 있을 가능성 혹은 잠재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지질학적 시간대로 보면 이 말은 액면 그대로 사실이죠. 산은 강이나 호수 혹은 바다였고 혹은 바다가 융기해서 산이되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이렇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로 이행하게 됩니다. 현상적 분절의 상태에서 본질적 무분절의 상태로 이행한 것이지요. 현상의 배후 혹은 기초적 본질로서의 무분절 혹은 상호관계성으로의 이행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분절의 상태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무분절만으로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죠. 현실화되지 않는 잠재성만으로는 현상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체로서의 일자만으로는 세계는 우리에게 인식될 수 없는 물자체일 뿐입니다. 흔히 불교를 모든 것을 공으로만 보는 허무적이며 명상적인 종교나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불교 특히 화엄종에서는 다즉일多則一과 동시에 일즉다一則多를 이야기합니다. 하나인 동시에 전체이고 전체인 동시에 하나인 상호연관으로서의 연기緣起를 말하는 것이죠. 때문에 불교를 정적이고 허무적으로 보는 관점은 편협한 관점일 수 있습니다. 일자에서 다자로의 이행 역시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불가분한 요소이기 때문이죠. 스피노자의 실체론도 이와 유사합니다. 전체로서의 자연을 자기원인으로서의 일자로 보고 세계의 다수성을 이 일자가 분화한 다양한 양태로 보는 관점 역시 전체로서의 무분절적 일자에서 분절적 다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논리입니다. 헤겔의 변증법도 이와 유사하죠. 즉자는 부정을 통해 대자화 되고 다시 이를 부정함을 통해 즉자대자가 됩니다. 일자로서의 즉자는 부정을 통해 분별적 대상이 됩니다만 이는 다시 부정,지양되어야만 비로소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절대지로 고양될 수 있는 것이죠. 주자의 성리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주자가 쓴 <태극도설>을 보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계의 참된 실재 혹은 본질로서의 무극은 현실적 다수성으로서의 태극과 같다라는 말이죠. 여기서도 전체로서의 하나에서 현실적 세계로서의 다수성으로의 이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정치이념으로서 보면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고려시대의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사상이긴 합니다만 사실은 철학적으로 보면 지극히 불교적인 이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성리학 다시말해 송대의 신유학의 성립배경자체가 고전의 자구해석에만 그쳤던 훈고학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의 존재론을 도입하면서 유교를 혁신했던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과 존재론을 수용했던 것이죠.

 

결국 정리해보면 성철스님이 말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치는 것과 같습니다. 1. 산은 산이고 물은 물(현상적 대상으로서의 산과 물)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산과 물의 본질로서의 보편성은 하나 혹은 전체로서의 일자에 있다) 3.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전체로서의 일자성을 깨달은 뒤에 다시 돌아온 세계) 이런 과정을 거친 뒤의 그 산과 물이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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