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많은 수가 잉크를 찍어쓰는 펜을 사용했었다.  물론, 볼펜도 사용을하기는 했지만 펜을 사용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 당시에는 펜글씨 자격증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펜글시 교본도 있었다. 숫하게 펜촉을 갈아대던 기억, 걸핏하면 깨트리는 잉크병...... 그것이 아스라한 추억이 됐다.

유독 펜글씨 쓰기를 고집했던 우리의 국사 선생님. 펜으로 공책에 필기를 하지 않으면 평소점수를 형편 없게 주시곤 했었다. 선생님 말씀은 펜으로 글씨를 써야 좀 더 정성껏 쓸 수 있고 예쁘게 쓸 수 있다는 것. 잘 쓴 글씨를 원하는게 아니라 정성껏 쓴 노트 필기를 원한다는 말씀.

일전 나는 딸 아이에게 잉크와 펜을 선물했다. 딸 아이는 그 용도를 만화가들이 만화를 그릴 때 세밓란 펜터치를 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고 했다.  (잉,우리때와는 용도가 다르네....)  딸 아이 앞에서 오랫만에 펜에 잉크를 듬뿍 찍어 펜으로 글씨를 썼다. 그리고 오랜 추억들을 꺼내들었다. 엤날의 실력은 안 나오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딸아이가 매일 A4 한쪽의 분량의 글을 옮겨 적는다.  연필로, 샤프로, 볼펜으로 쓸 때와는 느김이 많이 다르단다. 전에는 필적 감정이란걸 별반 믿지 않았는데 이젠 믿을 수 있다고 한다. 펜으로 쓰다가 보니  글씨를 쓸 때의 습관들을 볼수 있다고 한다. 힘의 강약에 따라 너무도 분명하게 글씨의 선의 굵기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도 즐겁다고 한다. 아주 작은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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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족의 숲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6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비룡소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소인족의 숲>은 이사벨 아옌데가 자신의 손자들을 위하여 쓴 이야기기의 3부작 중 맨 나중의 작품이다.

1편 <야수의 도시>는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한 안개족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이 부리는 욕심과 환경, 자연보호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2편 <황금용 왕국>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한 황금용 왕국은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존중하며 각별히 자연을 보호하기 때문에 천혜의 자연의 보고로 평가 받는 나라며 가급적 외지인들의 방문을 여간해서는 허락하지 않기에 '금지 된 왕국'으로 불리는 나라다.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황금용 왕국의 국보인 황금용 상을 둘러싼 사건을 중심으로 이미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많은 것을 갖질 못해 불행한 인간들이 벌이는 사건을 해결하면서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 준다.


황금용 왕국에서의 일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어 갈 즈음 케이트는 인터내셔널 지오그래픽사에서 전화를 받게 된다. 아프리카 취재에 대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전화 한통으로 황금용 왕국에 있던 일행은 아프리카 케냐로 날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시장에 도착하여 시장을 둘러볼 때 시장에서 마방헤세라는 예언가를 만나게 된다.

마방헤세는 라디아와 알렉스의 운명을 보여주면서 알렉스와 라디아는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들은 마방헤세의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알렉스는 아프리카여행에서 야생 동물들과 아프리카의 자연스러움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케냐의 잘 다듬어진 모습과 안전과 편안함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보호구역내의 동물들의 모습에 알렉스는 실망을 한다. 케냐를 떠날 준비를 하던 알렉스 일행 앞에 나타난 선교사와 알렉스 일행은  행방불명된 동료선교사들을 찾아 소인족인 피그미 족이 사는 원시림으로 향한다. 그 숲에서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막강한 힘을 가진 반투족의 왕 코송고와  엠벰벨레 사령관, 그리고 주술사 솜베는 피그미족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살인과 약탈, 밀엽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알렉스 일행은 피그미족의 자유를 찾아준다.

작가 이사벨 아옌데는

백인들이 자기네 신앙은 '종교'라 부르고 다른 사람의 신앙은 '미신'이라고 부르며 백인들이 만든 것은 '예술'이고 다른 인종이 만든 것은 '수공예품'이라고 한다며 케이트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이는 백인 우월 중심의 문화 인식을 비판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편견을 이야기 한 것일 수도 있다.

언젠가 인류학을 공부한 사람에게서 "문명은 선진과 후진이 있을 수 있지만 문화는 선진과 후진이 있을 수 없다. 문화는 그 문화의 주인들의 삶 그 자체로 인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아프리카의 소인족인 피그미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지에서 들어 온 사람들로부터 문제는 생겼다. 그들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문명이 들어 왔고, 새로운 가치관을 강요했다.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가치관에 자신들의 욕심을 교묘히 포장했다. 원주민들은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었고 새로운 가치관은 자신들의 문화를 부끄럽게 여겼다. 피그미족이 누렸던 자유와 평화는 이제 없다. 자신들의 문화는 낡은 구시대의 유물이며 버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물질문명만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증명해준다. 외지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라도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 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피그미족들이 원하는 것을 처음에는 거저 주었지만 나중에는 구걸을 했고 그다음에는 사정을 했고 절대 복종을 해야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조금 얻을 수 있다고 이사벨 아옌데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가 피그미족 스스로 엠벰벨레와 맞상대를 하게 한 것은 생각 해 볼 여지가 많다.

공으로 얻은 것은 절대 자기 것이 되지 않더라는 말이 있듯 자유도 외부에서 주어졌을 때 그 자유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그 자유를 유지하기도 힘들다고 본다. 피그미족은 그간의 고통으로 자유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억압했던 자들과 맞상대를 하면서 스스로의 자유와 자존심을 되찾았다.

자유인이 된 피그미족은 깊은 숲으로 들어 가 평화롭게 살고 저 했다. 그러나 알렉스 일행은 이미맛본 문명의 세계가 피그미족에게는 달콤하지만은 않았지만 원하던 원치 않았던 생활 속으로 들어 와있는데 그것을 쳐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았다. 들어 온 것을 내치기보다는 수용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와 자신들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현명하다고 보았다.

새로운 문화와 문명은 바람처럼 우리 주변에 다가 온다. 그 변화의 바람을 내 것과 얼마나 잘 조화시킬 수 있느냐가 문화 수용의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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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봄나무 사람책 1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봄나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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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를 읽기 전까지 내가 장기려라는 사람에 대하여 아는 것은 그가 아주 훌륭한 의사라는 것이 전부였다.

'훌륭한 의사?'

과연 어떤 것이 훌륭한 의사인가는 미쳐 따져 묻지를 않았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나 보다' 하는 정도.

책을 덮으면서 나는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 장기려라는 사람을 만나 본적이 없지만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를 읽고 나니 장기려라는 사람에게 '성자'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는 '위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많은 인물전을 보아왔다.

요즈음에 나오는 인물전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어린이 들이 볼 인물전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점보다 그 사람의 업적을 더 중시한 인물전이 많다.

"어떻게 살았는가?

그 분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았는가? "를 생각하며 나와 다른 점을 깨닫고 닮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할 것인데 업적 중심의 인물전을 아이들에게 읽히면 자칫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르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었다.

그런 의미에서 봄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는 반가웠다.


장기려는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과 의사로서 평양의과대학(김일성 대학 의대) 외과 의사로 일을 했었고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자식 넷을 북에 두고 둘째 아들 가용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을 했다.

한국전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장기려는 자신이 의사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육군 병원을 찾아갔고 환자들을 돌보던 중 그가 북한 출신이고, 김일성대학 의대에 근무를 했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전쟁, 거리에도 환자는 넘쳐났다. 의사가 절실히 필요했다. 다행히도 장기려 자신은 의사였다. 필요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운명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부귀를 누릴 수 있었지만 장기려는 자신의 달란트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쓰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 했다.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는 바로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사람이 일을 하다가 보면 처음엔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바르게 행동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만해지거나 유혹에 빠져 처음 맘먹은 대로 평생을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장기려는 한결 같았다. 무소유의 철학과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의 벗으로 사는 장기려의 삶은 영악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잇속이 빠른 사람들의 눈에는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할지라도 그것은 소수의 손가락이고 가난하고 헐벗은 더 많은 사람들의 벗으로 장기려는 기억된다.

장기려는 월남할 때 병원 버스를 타고 월남을 했다. 그때 자신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피난민의 눈길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북쪽에 있는 가족들을 상봉할 기회를 주고자 했지만 특권은 싫다며 거절을 한다.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모진 사람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가 45년을 독신으로 살아 온 것이나 만년에 동독에 들렀을 때 그가 한 행동을 보면 그가 모질어서는 아닌듯하다.

장기려가 언제나 훌륭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건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건강 때문에 하던 일을 중단하지도 않았다. 돈이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궁핍함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안락보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생각했다. 생각한 바를 평생 실천 할 수 있는 장기려는 진정 자신의 달란트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 달란트를 가장 잘 쓴 사람이다.

그의 죽음이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달란트를 쓰고 간 장기려는 행복한 사람이며 장기려라는 사람이 이 땅에 있었다는 자체만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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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가지마, 절대로 내친구 작은거인 15
이오인 콜퍼 지음, 토니 로스 그림, 이윤선 옮김 / 국민서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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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장이 5형제. 웃음, 비명, 울음, 난장판...... 아이들에겐 즐거운 나의 집이다. 그러나 어른들에겐 정신 사나운 집이다. 제발 어떻게든 조용히, 말 그대로 평화로운 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는 결단을 내린다. 거룩하게 교육이란 이름을 붙여 여름방학 동안 마틴과 윌을 도서관에보내기로.

도서관, 아이들은 질겁을 한다. 왜? 위험하단다.  도서관이 위험한 이유? 감자총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이란다. 감자총 선생님은 아이들을 너무 싫어해서 군대있을 때는 아이들을 잡으러 다녔고 지금 도서관에서는 통감자를  총안에 집어 넣어 가스로 도서관에서 떠드는 아이들에게 쏘기 때문이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틴과 윌 의사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도서관으로 보내진다. 으, 불쌍한 마틴과 윌.

짐을 뚝 떨구듯 마틴과 윌만을 도서관에 두고 엄마는 다른 볼일을 보러간다. 사무적으로 마틴과 윌을 대하는 머피 사서. 아이들은 주눅이든다. 주늑이 든 것도 잠시. 마틴과 윌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감자총 선생님이 알아챌수 있을까 궁금하다. 몰래 살짝하면 절대로 모를듯하다. 마틴과 윌의 공범이 되어 살짝~ 이 긴장감, 이 스릴. 그러나, 딱 걸렸어. 감자총 선생은 한수위! 몸을 비비꼬다가 억지로 책을 몇줄보다가 그만 책속에 풍덩! 더 이상 어린이 열람실의책은 읽을 것이 없다. 벌써 두번이나 읽었는데...... 저쪽, 어른들은 무슨 책을 읽을까? 저기 있는 책은 어떤 내용일까?  몰래 살짝?

마틴은 윌을 살살 꾀어 어린이 열람실 건너편에 어른들 책을 가져 오게 한다.  살금살금, 몰래..... 성공! 그러나 딱걸렸어. 감자총 선생님은 역시 강했다. 윽 죽었다. 쿵닥쿵닥. 난 이제 감자총에 맞아 죽을거야. 그러나 감자총 선생님은 윌에게 어른 열람실 출입증을 만들어 주었다.

기본 스토리는 우리가 예상하는대로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심리를 따다가면 재미가 무궁무궁하다. 아이들은 이제 도서관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지루한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동안 사서 선생님이 감자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도서관에 와 보지도 않은 아이들이 대체 왜  도서관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일까? 이 부분은 각 도서관에 있는 사서와 어른들이 잘못한 부분이다. 도서관의 사서는 책을 읽는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권위를 지키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의 도서고나의 사서들도 이용자들 편에서 생각을 해 주었으면 바래본다.

보탬말:

 "내겐 형제가 네명이나 있다. 상상 해 보라. 한집에 열한살도 안 된 남자 애가 다섯명이나 살고 있다는 걸." 글쎄, 텟스트에 충실하게 번역을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저학년들이 보기엔 좀 난해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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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슨 선생님 구하기 내인생의책 책가방 문고 6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김지윤 그림, 강유하 옮김 / 내인생의책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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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클레멘츠는 <프린들 주세요>로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다. <프린들 주세요>는 언어의 생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랄슨 선생님 구하기>는  언론의 본질과 언론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랄슨 선생님은 

"학생은 자신에게서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학생들 또한 서로에게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는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랄슨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많은 사람들들로 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랄슨 선생님의 교육 방법은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맡겨두는 것처럼 보여진다. 

"선생님은 존재하는데 선생님으로부터의 가르침은 없다. 가르치지도 않는데 급료는 받아간다."  고 카라는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애들이 도대체 나에 대하여 뭘 알까? ' 랄슨 선생님은 당황했다.  

'랜드리에게 선생님을 평가 할 권리를 누가 준 것일까? ' 랄슨 선생님은 화가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15년 전엔 올해의 선생님으로  연속 3년이나 뽑혔었는데 좋은 선생님 되는 것을 포기 한 것은 언제일까?

'선생님들은 어느 날 갑자기 지치지 않고 차츰 지친다. 마치 가파른 길을 오르는 사람을 다라 잡는 피곤함처럼 시나브로 지쳐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랄슨 선생님은 자신이 교사로서 직무태만을 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들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회를 포착한 랄슨 선생님은 미국의 수정헌법을 가르쳤다. 카라의 엄마는 주변에 일어 나는 일을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말을한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진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독설이 되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카라가 단독으로 발행했던 신문은 아이들의 협조와 랄슨 선생님의 독려 속에 규모가 커져가고 평소 랄슨 선생님의 교육 철학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반즈 교장 선생님은 신문에 실린 기가 내용을 빌미로 랄슨 선생님을 함정에 빠뜨린다.

자신들의 기사로 인하여 랄슨 선생님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아이들은 그동안 랄슨 선생님이 가르쳤던  헌법과 권리장전과 언론의 자유를 생각했다.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배웠다.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배웠다. 자신들은 지금 언론의 자유를 침해 받고 있다는 생각을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 싶었다. 아니, 법이 정하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싶었다. 랄슨 선생님이 다칠수 있는 랜드리뉴스를 폐간하는 대신 가디언이란 이름으로 그들은 학교 밖에서 자신들의 신문을 만들어 냈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다른 언론과의 연계도 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들의 학급에서 발행한 신문의 내용이 빌미가 되어 위기에 처한 랄슨 선생님도 구해냈다.

 

이책을 보면서  언론이 권력으로부터 왜 자유로워야 한다는지 알게 되었다. 또 진실로 위장한 독설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건을 대하고 보도하는 태도에 따라서 같은 사안을 희망의 메시지로 전할 것인지 절망의 메시지로 표현되는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사물을 보는 태도를 다시 보게 되었다

 

ps: 오타가 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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