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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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부에는 선악이 공존하고 있다. 공존하는 선, 악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상황에 따라 선이 앞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악이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전면에 보이는 것뿐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선, 악 중에 어떤 것이 전면에 있을 때 보았느냐하는 것이다.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에게도  어제까지의 다정한 이웃이 생명을 위협하는 완전한 적으로 돌변한 이야기를 <내 이름은 임마꿀레>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남에 어느 날 갑자기라는 것은 없다. 대기 중에서 작은 물 분자들이 뭉치고 뭉쳐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주변의 환경에 의하여 비로든, 우박으로든, 눈으로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듯 르완다의 문제 또한 많은 문제점들을 이미 갖고 있었기에 다정했던 이웃이 적으로 돌변한 사건은 하루아침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일은 당연한 수순을 밟은 것뿐, 별반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수순을 밟는 것이지만 개인사에는 느닷없는 일, 뜬금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더 혹독하게 느껴질 수 있다.

르완다의 문제는 이미 벨기에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안고 있었다. 르완다는 과반수의수를 훨씬 넘기는 후투족과 투치족 및 기타 민족으로 구성이 된 나라다. 외부의 물리적인 힘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힘의 균형 내지는 질서를 지키면 그다지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르완다는 벨기에 식민지를 거치면서 벨기에식민정책 일환으로 일방적으로 투치족을 우대하다가 투치족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다시 후티족을 지원하는 식의 식민정책은 두 종족간의 갈등의 골을 심화시킨다. 그 갈등들이 불거져 나온 것이 바로 르완다 내전이다. 한 마을에서 사이좋은 이웃으로 , 학교에서는 동기 선후배로 살아온 이들이 어떻게 집단 학살이라는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 짓는다. 마찬가지로 집단에 있어서도 ‘우리’라는 집단과 ‘다른 집단’을 편을 갈라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 거기에 이권이 개입이 되어 있다면 충분히 있을 법 한 이야기다.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정말 없었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싶어 하는 본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혼자는 본성에 따라 살 가능성이 많지만 일단 집단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혼자 있는 것을 겁내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집단을 이룬다. 단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체가 요구하는 요구사항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르완다 후투족들도 그랬을 것이다. 선동자가 선동하는 대로 쉽게 사람들은 흔들린다. 집단 안에서 생각은 필요가 없다. 누군가 선동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어 집단으로부터 영원히 제거 시킨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랬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동물이나 바퀴벌레쯤으로 인간을 생각한다.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 일뿐 그들이 죽이는 것이 인간이라는 개념은 없다. 집단의 광기 속에 있는 자들에게 인간의 자애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들은 이미 생각하는 힘을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인간이라는 생각이 없다. 내가 없고, 내 생각이 없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집단. 집단의 명령, 규율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다다수가 집단의 광기에 휩싸여 무자비한 살육의 잔치를 벌이는 중에도 아주 극히 일부의 인간의 이성이 남아 있는 자들은 비밀리에 투치족을 돕는다. 광기에 휩싸인 자들에게 알려지면 그들의 목숨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그 속에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많은 투치족은 은둔의 생활에 들어 간다. 은둔 생활 중에 임마꿀레 일리바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 살육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대한 분노와 절망만이 임마꿀레의 것이었다.  왜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하느냐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하느님에게 항의도 해봤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임마꿀레는 기도하고 기도했다. 기도를 하면서 임마꿀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느님의 보호 하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살아남은 임마꿀레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생각한다.

원제<Left to tell>가 의미하듯 르완다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세상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왜 임마꿀레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임마꿀레가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하여 원망과 분노만을 터트리지 않는다. 그녀는 보복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평화'였다. 보복은 또 다른 피를 부른 다는 것을 아는 임마꿀레는 용서의 신성함을 믿고 따르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서가 세상에서 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자고 임마꿀레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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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 정치지리의 세계사 책과함께 아틀라스 1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김희균 옮김 / 책과함께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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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이원복 선생님의 <가로세로 세계사>를 읽고 있었다. 종전의 <먼 나라 이웃나라>가 나라별 세계사라면 <가로세로 세계사>는 문명별 세계사다. 오늘 내가 보게 된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은 정치 지리의 세계사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존재하는 사물은 하나일지라도 어느 쪽에서 보느냐, 누가 보느냐, 무엇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의 감사의 글을 보면 '<지도의 이면>이라는 아르테의 다큐멘터리를  에 옮겼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도의 이면>은 역사와 지리라는 무기를 들고 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TV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가 물으며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 세상을 이해하는데 TV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래도 이 책이 TV의 한 프로그램이었다니까 영상으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또 내가 그렇게 바쁘게 책을 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방송에는 아무래도 시간차가 있을 테니까 생각 할 여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좀 더 여유 있게 세계지도를 찾아보면서 내 안에서 삭이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니, 방송은 흘러가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책은 되돌아보고 곱씹어 볼 충분한 가능성이 있으니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상반된 생각을 갖게 된다.

<아틀라스 세게는 지금>은 지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는 말이다.

'지리는 굴곡이 있다. 지형은 변화하고 진화한다. 그러면서 인간과 인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인간들이 지형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다. 발생한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지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9쪽 '역사도 마찬가지다. 사건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고, 지금의 사건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 역사다. 우리는 어디에 살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믿음과 해석의 산물이고 반대로 우리들의 의사의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9쪽

여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시간과 공간의 연결을 어떻게 연결하고 어떻게 분석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 책은 지리와 역사를 이용했다. 또 지리와 역사를 이용하는 방법론에 있어 과학을 빌려왔다고 한다. 주어진 자료를 비교하고, 겹쳐보고, 변형시키는 노력을 할 때만이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와 무슨 관계라고 내가 이런 것을 알아야 할까? 나는 이곳에서 이주 작은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얼핏 보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비교하고 겹쳐보고, 변형 시켜보면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고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1부는 '지정학적 지도', 2부는 '다가올  세계'로 나뉘어 져 있는데 1부에서는 단순하게 종이에 그려진 국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경이 어떻게 형성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정치, 경제, 종교와 어떤 고리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2부는 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가장 남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 나라가 어떤 나라, 어떤 지역에 대한 지원책을 펼 때는 정치, 경제, 군사의 우의를 생각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지원국은 그 나라, 그 국민들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사실은 그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일뿐이다. 어떤 나라, 어떤 지역의 문제는 온전히 그 지역에 속한 사람들의 몫일뿐이다.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는 나라(사람)는 주변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이 들어와도 그 부당함까지도 수용 할 수밖에 없는 힘의 논리, 자본의 논리를 또  한번 깨닫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환경문제의 중심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환경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게 되고 환경으로부터 어떻게 보호될 것인가가 달렸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벅차게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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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우한테 미안합니다 높새바람 15
이경화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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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때로는 예상했던 결과와는 정 반대의 결과 앞에서 우리는 당황 할 때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 김 진숙 선생님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교사인 김 진숙 선생님은 교사로서 조금은 모자라고, 주변으로부터 소외된 아이들에게 먼저 말 걸어주기를 시도한다. 이제까지는 늘 못한다고 꾸지람을 들었고, 놀림을 받았던 아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김 진숙 선생님 교사 생활의 원칙 이었다.

김진숙 선생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잘하는 놈들은 그냥 놔둬도 잘 하니까 믿거니 하고 조금은 모자라고 소외된 아이들 먼저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 선생님이 생각 했던 대로 그동안 위축이 되었던 아이들은 서서히 자신감이 붙었고 보통의 아이들처럼 웃었고 학급 내에서 학급 구성원으로 지내기에 무리가 없었다.

얼마 전에 신여랑씨가 쓴 <몽구스 크루>를 읽었다. 뭐하나 제대로 똑 부러지게 하는 게 없어 늘 엄마를 애달프게 하는 형 진구와 자기 몫은 확실하게 하는 동생 몽구. 엄마가 진구를 바라보는 눈은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 랭이 같은 놈이며 몽구는 똑 부러져 그냥 놔둬도 잘 클 놈처럼 보였다. 그래서 진구에게 좀 더 관심을 쏟았다.  몽구는 엄마는 진구의 엄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몽구를 믿었다. 그러나 몽구는 외로웠다. 자기 몫을 하고 못하고를 떠나 사랑 받기를 원하는 그냥 평범한 아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김 진숙 선생님이 소외된 소수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던 그때 그 학급에는 평범한 아이들 다수가 있었다. 김 진숙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는 다수의 아이들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 자신들에게는 엄격하면서 일부의 아이들에게는 너그러운 선생님의 태도는 차별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선생님이 왜 그렇게 행동을 하는지 안다고 하더라도 다수의 아이들도 선생님의 손길이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손길을 특정의 몇몇에게 행하여졌고 다수의 아이들의 부러운 눈길은 알아채지 못했다. '장건우'는 선생님의 손길을 바라고 바라는 다수의 아이들이다. 선생님은 잘 한다고 한 것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 결과를 빚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기르는데도 그런 부분이 많다. 자기도 예뻐해 달라는 아이들. 한 아이를 예뻐하다가 보면 다른 놈이 샘을 낸다. 어른들에게 둘 중에 누가 더 예쁜지 말하라고 한다.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더 좋아?"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관심의 대상이고 싶어 한다는 것. 그 관심의 중심에서 빗겨나가고 싶지 않은 존재라는 것. 김 진숙 선생님이 자신의 원칙을 지키면서 다수의 장건우를 어떻게 달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하는 질문에  엄마와 함께 있을 땐 엄마가, 아빠와 함께 있을 땐 아빠가 더 좋다고 하고 엄마, 아빠 둘 다 있을 땐 어떻게 대답을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장건우한테 미안합니다' 한 것을 보니 김진숙 선생님은 이미 아이들에게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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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와 함께한 날들 - 미국문학 다림세계문학 14
토니 애보트 지음, 강수정 옮김, 숀 코스텔로 그림 / 다림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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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벤더나 그의 친구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아이들이다.

호기심 많고, 장난치기 좋아하고, 잘 웃고..... 평범한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 그러나 제시카가 세인트 캐서린 학교에 전학을 오고 톰이 있는 반에 배정이 되면서 그 평범함 속의 편안함은 지속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톰 이 장애를 가진 제시카를 만나면서 톰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야기다.

톰은 담임선생님으로 부터 새로운 전학생이 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제시카며 아주 심한 화상을 입어 치료 차 뉴헤븐에서 왔다. 제시카가 치료를 받는 동안  우리와 같이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제시카가 처음에 나타났을 때 제시카의 얼굴은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피부는 너무나 거칠고 울퉁불퉁했으며 온갖 종류의 분홍색과 흰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 물들인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살아 있을 수 있는지, 아직도 아픈지 톰은 궁금했다. 톰만이 그렇게 느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을 비롯하여 톰의 반 아이들 전체가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보통의 아이들과는 많이 다른 외모를 가진 케시카를 바라보는 톰네 반 아이들은 다르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들도 장애인에 대한 교육은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매체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직접 대면하는 문제와는 사뭇 다르다. 매체 속에 있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화상을 입은 제시카의 등장은 현실이다. 매체에 보도 되는 것은 외면 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현실은 외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는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는 상이군인들이 생필품 몇 가지를 가지고 가가호호 방문판매를 했었다. 지금이야 팔, 다리 없으면 의족, 의수를 하겠지만 30~40년 전에는 잘린 팔 끝에 의수 대신 갈고리를 달았었다. 난 그 사람들이 정말 무서웠다. 좀 더 커서는 재활원 근처에 회사가 있었는데 매일 만나게 되는 사지가 비틀린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게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난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아마도 나와 다르다는데서 오지 않았을까 싶다.  나와 다르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막연한 두려움이 날 불편하게 했던 기억이 있기에 제시카의 등장에 톰의 반 아이들이 보였던 반응이 공감이 갔다.

지금 톰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제시카가 학교에 오는 한은 나와 달리 장애를 가진 제시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시카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톰과 반 아이들은 학교가 즐겁지만은 않다. 톰도 제시카를 보는 일이 다른 급우들을 바라보는 것과처럼 편안하지 않다. 왜 무엇 때문에?  나와 다르다는 것이 것은 상상 이상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보통의 친구들처럼 대할 수 없는 제시카를 바라보면서 톰은 내적 갈등을 겪는다. 때마침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제시카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톰은 제시카에게 있었던 일을 듣게 된다. 제시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것이 없니 아이들은 함부로 추측을하고 노골적으로 제시카를 거부한다. 제시카를 거부하면서 톰 주변의 다른 아이들은 맘이 편했을까? 그들도 톰에 못지않게 제시카를 바라보기가 편치만은 않았음을 커트니의 향동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는 잠재적인 장애인"이라는 문구를 떠올린다.

태어 날 때부터 어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후천적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 나도 장애인이 될수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장애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은 하고 있는데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는 일이다. 나도 예외일수 없다는 것은 인정을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하지 않았는데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설혹 상상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상상은 지속 할 수 없는 상상 일뿐이다.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만이 보다 현실성을 띤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그냥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봐 주고 장애 그 차제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로 봐주면 안 되느냐고 말을 한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힘들지 자신들이 가진  장애 그 자체는 단지 불편함뿐이라는 말을 한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떤 한 부분으로 규정을 당하기보다는 인간 그 자체로 존중을 받기를 원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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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의 선물
윌슨 롤스 지음, 김율희 옮김, 노현주 그림 / 다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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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라호마의 체로키 오자크 산골에 제이베리는 아빠와 엄마, 쌍동이 여동생 데이지와 살고 있다.  성실한 아버지, 다정한 어머니, 비록 다리는 절지만 언제나 명랑한 여동생, 제이 베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사냥개 로디.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 비록 가난한 삶이지만 제이 베리 네 집은 평안했다.

열 살 소년 제이 베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틈틈이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을 즐긴다. 언젠가 22구경 해밀턴 소총과 자신만의 조랑말을 가지길 원하지만 제이 베리 집 사정으로 보아 그 꿈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할아버지에게 갔던 어느 날 제이 베리는 할아버지로 부터 서커스단 차량의 사고로 원숭이 30마리가 탈출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작은 원숭이 한마리당 2$, 큰 원숭이 한 마리에 100$의 현상금이 붙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이 베리는 이 원숭이들을 잡으면 자신이 원하던 조랑말과 소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어떻게든 잡고 싶었다. 원숭이를 잡아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제이 베리에게 할아버지는 든든한 후원자다.

할아버지는 원숭이를 잡을 수 있도록 덫을 만들어 주고 그물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덫과 그물을 사용하여 원숭이를 잡으려던 제이 베리의 계획은 참담한 실패를 했다. 단순하게 원숭이를 잡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게 물리고, 속고, 비웃음을 당했다. 큰 원숭이의 보호 아래 작은 원숭이들은 제이 베리와 사냥개 로디를 조롱했다.

할아버지는 "잡히지 않는 사냥감은 없다"라며 제이 베리를 격려했다. 원숭이와 신경전이 계속 되면 될 수록 제이 베리는 조랑말과 소총이 더 간절했다. 조랑말과 소총= 원숭이들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반드시 사로잡아야만 했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주신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는 조랑말과 소총이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원숭이들은 너무나 영리했다. 그 동안 할아버지는 서커스단과 연락을 하여 원숭이들에게는 이름이 있으며 큰 원숭이는 짐보라고 불리며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준다. 원숭이들과 친해 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동안 원숭이들에게 당한 비웃음과 위협을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묘안은 없지만 원숭이들이 아직도 자기의 눈앞에 있는지 보러 갔다가 술도가 증류장에 있는 원숭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던 제이 베리는 짐보에게 말을 건다. 짐보가 친구라는 의미로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시게 되고 술에 취하게 된 제이 베리의 바지와 물품을 가지고 원숭이들은 사라진다. 원숭이들이 마치 제이베리를 가지고 노는 듯한 행동에  원숭이들을 그렇게 영악하게 만든 것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에 씁쓸하다.

천둥번개가 사납게 몰아친 다음 날 제이 베리는 여동생 데이지는 자신의 장난감 집 가까이에서 요정의 버섯을 발견한다. 요정의 버섯은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전설이 있다. 제이 베리의 가족은 여동생을 시작으로 각기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빈다.

간 밤,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있었다. 야생에 길들여 지지 않은 원숭이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원숭이들을 찾아 나섰던  제이 베리는 위험에 처한 짐보와 원숭이를 만나게 된다. 인간들에게 사육되던 원숭이들에게 간밤의 무시무시한 폭풍우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는지 원숭이들은 마치 나를 제발 데려가 달라. 제발 이 위기에서 구해 달라는 듯 그들의 운명을 제이 베리에게 맡긴다. 제이 베리는 원숭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 한편 할아버지는 서커스단에게 원숭이들의 생포 소식을 전한다. 드디어 제이 베리는 원숭이들을 서커스 단원에게 넘기고 그토록 원했던 포상금을 받게 된다.

할아버지는 제이 베리가 그토록 원했던 조랑말을 두 마리 골라다 놓고 제이 베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숫 조랑말은 누구나 탐낼 만큼 건강했고 멋있었다. 그러나 제이 베리가 원했던 말은 암말이었다. 암 조랑말은 발목에 부상을 입어 다리를 전다. 건강한 숫말과 다리 저는 암말. 제이 베리는 고민 끝에 암말을 골랐다. 암말을 끌고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제이 베리는  자신이 그 말을 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절름거리는 말, 절름거리는 여동생. 할아버지도 자신의 꿈에 거의 가까이 갔을 때 자신의 소망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했는데 이제 할아버지의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제이 베리는 발길을 돌려 할아버지 댁으로 간다. 그리고 자신은 말을 살 수 없음을 말한다. 자신의 말보다는 여동생의 절름대는 다리를 고치는 것이 먼저임을 알게 되었다며 눈물로서 말을 포기한다. 할아버지와 부모님, 그리고 제이베리가 모은 전 재산을 걸고 데이지는 수술을 받기로 한다.

동생이 수술하기 위하여 엄마와 도시로 떠나고 남아있는 제이베리와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병이 될 지경이다. 결국 동생이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제이베리는 자신이 요정의 버섯에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 졌노라고 한다. 그토록 조랑말과 소총을 갖기를 원했지만 제이 베리가 요정의 버섯에게 빌었던 것은 데이지의 건강한 다리였다.

건강해 진 데이지와 집으로 돌아 와보니 집에는 할아버지가 먼저 와 있었고 눈물을 삼키며 포기 해야만 했던 조랑말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조랑말을 제이 베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데이지는 제이베리에게 22구경 해밀턴 소총을 선물한다. 그리고 데이지는 자신의 소원도 이루어 졌음을 이야기 한다. 데이지의 소원은 조랑말과 22구경 해밀턴 소총을 오빠가 갖는 것이었다.

누구나 소망은 있다. 그 소망은 자신에게는 절실하다. 누구나 절실한 소망을 접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제이 베리와 데이지는 자신을 위하여 소원을 빌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소망을 빌지 않았다. 오빠를 위하여, 동생을 위하여 단 한번뿐인 기회를 사용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 나의 소망을 접는 다는 것의 이면에는 깊은 이해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당장의 욕망에 들뜨기보다는 가치 있는 것을 볼 줄 알고 선택할 줄 아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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