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써놓고 보니 뭐 요리랄 것까지야... 하는 생각. 예전에 레토르트 식품 광고를 보며 달랑 3분 요리 해주고 요리사 소리 듣는 엄마가 참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결혼 이후의 내 식생활을 보면 엄마가 만드신 완제품을 가스 불에 데우는 정도이니 광고 속 주부와 다를 것이 없다. 요즘은 임신을 핑계로 만둣국에 얹을 파와 계란 지단까지 엄마가 썰어다 주시니 참 한가한 손모가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남편도 엄마 손맛에 길이 들어서인지 늘 소식을 주장해오던 사람인데 먹는 양이 많이 늘었다. 결혼 전에 자취를 하면서는 주로 밖에서 먹고 들어오거나 혼자 먹을 분량만큼만 만들어서 먹곤 했다고 한다. 그는 마음먹으면 음식을 잘하는 편이다. 내가 입덧이 심해 주방 근처에도 못 갈 때는 손수 볶음밥도 해주고, 김밥도 싸주고, 특히 김치나 부추를 넣고 만드는 부침개는 나보다 보기 좋게 잘 부친다. 언제 김치 한 번 담가보시지, 했더니 장모님이 하시는 거 옆에서 한번 보면 담글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신만만하다. 엄마도 이제는 음식을 건네시면서 남편한테 당부를 한다. 이거는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고, 생선 구울 때는 얘가 둔해져서 혹시 모르니까 자네가 하고... 가스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프라이팬 손잡이를 건드려서 몇 번 뒤집은 적이 있는 나를 못 미더워하시는 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장을 봐서 뭘 좀 해볼까 싶다가도 왠지 재료만 낭비하는 것 같아서 관둘 때가 많다. 엄마는 알뜰하게 장을 봐서 혹시 부족한 재료가 있어도 맛있게 만드는데 나는 그럴 자신이 없는데다 혹시 실패하면? 남는 재료들은? 괜히 쓰레기만 만드는 거 아냐? 그러저러한 노파심에 에잇, 그냥 얻어다 먹자, 마음을 접는다. 엄마는 먹어본 게 있으면 나중에 다 잘할 수 있다고, 자꾸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솜씨는 는다고, 걱정 말라고 하시는데 나는 이러다 3분 요리 광고 속 그 엄마가 될까봐 좀 불안하다.

  그래도 남편은 내가 뭔가를 만들면 항상 맛있다고 한다. 김치는 물론이고 매일 먹는 국과 밑반찬까지 몽땅 얻어다 먹고는 있지만 그래도 나도 음식을 하기는 한다. 엄마가 소고기로 육수를 내주시면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그것으로 미역국도 끓이고 무국도 끓인다. 사골 육수로는 만둣국이나 떡국을 끓인다. 어설프긴 하지만 본 건 있어가지고 김 가루도 고명으로 올리고 지단도 부쳐 올린다. 혹시 사골 육수가 남으면 김치찌개 끓일 때 사용한다. 돼지고기, 적당히 시금시금해진 김치, 사골 육수, 세 가지면 다른 것을 넣지 않아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멸치 육수로는 된장찌개나 청국장을 끓인다. 된장찌개에는 주로 두부, 버섯, 감자 등을 넣고 청국장에는 두부하고 김치만 넣는다. 여름에는 호박 넣고 끓여야 맛있던데 요즘은 감자가 별미더라. 특히 나는 청양고추를 꼭 썰어 넣어서 약간 칼칼한 맛을 즐긴다. 그런데 다른 재료 다 좋아도 된장이 맛없으면 된장요리는 말짱 맹탕. 반드시 집된장이거나 시판되는 된장 중에서도 집된장 맛이 나는 된장이어야 한다. 어쨌든 몇 가지 국물 요리를 해본 결과 육수가 맛있으면 절반의 성공은 장담할 수 있다.  

  그밖에도 가끔 카레도 끓이고, 불고기도 하고, 기본적인 것들은 어느 정도 하는데 자신이 없는 것은 밑반찬과 나물 종류다. 우리 집에 꾸준히 있는 반찬이 멸치, 새우, 오징어채 볶음인데 내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음식들이다. 엄마가 하시는 것을 구경은 많이 했는데 빛깔 내는 것도 그렇고, 보아하니 마늘, 대추 같은 것도 저며 넣어야 하고, 의외로 귀찮더라는. 시금치나 고사리 같은 나물류도 그렇다. 얼마나 데쳐야 하는지, 들기름과 마늘 다진 것은 언제,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 쉽다는 콩나물 무침도 아직 안 해봤다. 레시피만 알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 

  상태가 이런데도 생각은 야무지다. 앞으로 시어머니 생신이 한 달 남짓 남았는데 이번에 생신 상을 한번 차려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작년에 아버님 생신상은 어머님이 차리셨고 어머님 생신상은 시누이가 대접했다. 그때 나는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 생신 때는 제가... -_-;; 나는 빈말을 하거나 공수표 날리는 일을 스스로 금하는 편인데 그만큼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거나 잊어버리는 일에도 능숙하지를 못하다. 아직 만삭인 것도 아닌데 결혼해서 처음 생신상 한번 차려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엄마처럼 입맛 까다로운 분은 자신이 없지만 다행히 시부모님들은 내가 미역국에 계란을 풀어도 아마 잘했다고 하실 거다.

  엄마한테 이 사태를 고했더니 도와주시겠단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다 하는 게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는데 이번에 불고기와 잡채 정도는 완전히 마스터 해야지. 굴비나 조기 같은 생선을 굽는 것만 하지 찌는 것은 잘 못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배워야겠다. 아, 나는 음식을 정말 잘하고 싶다. 입덧할 때 밥맛이 없어서 외식을 연달아 한 적이 있는데 계속 그렇게는 못 살겠더라는. 나처럼 집밥에 인이 박힌 사람은 시대가 변해도 어쩔 수가 없다.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내 입의 즐거움, 내 몸의 건강을 위해 기본 음식들을 배워놓아야만 한다. 친구들이 온다고 해도 겁내지 않고, 친척들이 온다고 해도 두렵지 않고, 엄마한테 전화하지 않고도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음식을 그 날로 바로 해먹을 수 있는!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음식을 잘하는 것도 자신감, 또는 행복의 한 요소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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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0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님 역시 음식엔 거의 문외한 잼뱅이 수준이었는데...
이젠 무침류나 밑반찬류는 꽤 완성도가 높게 결과물이 나온다죠.
특히 윤기 좔좔 흐르는 연근 조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만....
아직도 국물내는 요리는 제가 한 수 위........에요..호호

깐따삐야 2009-12-02 12:25   좋아요 0 | URL
아, 저 연근조림도 좋아하고 우엉조림도 좋아하고 장조림도 좋아하는데! 만들지는 못한다는.-_-
메피님은 역시 마당쇠다운 실력을 뽐내시는군요. 이제 냄비요리의 계절이 왔으니 마님을 위한 밥상을 준비해 보시와요.^^

레와 2009-12-0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나물 무침,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 (^^;;)

독립을 하고 내 손으로 매끼를 챙기다 보니, 한그릇 음식이 편해졌어요.
뭐든 30분이내에 만들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입맛 없을때는 무조건 상추쌈! ㅎ

언제였는지.. 제가 꿈이 현모양처였는데 말입니다.(풉~)
현실은.. (먼산____________________ ( ")

깐따삐야 2009-12-02 12:30   좋아요 0 | URL
험... 전 콩나물국도 어렵더라구요. 먹을만 하긴 한데 집에서 먹던 그 맛은 아니에요. 뚜껑을 계속 열거나 닫아놓고 끓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도 뭔가 미진한.ㅠ

저도 자취할 땐 빨리 해서 빨리 먹고 치우고 그랬던 것 같아요. 상추쌈도 편하고. 요즘엔 구운김에 달래간장이 맛나더라구요.

현모양처, 아예 꿈도 꾸지 않기를 잘한 것 같아요. 레와님은 결혼하면 아주 재미나게 사실 것 같은데.^^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신기해했던 점 중의 하나는 내가 씩씩거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잘 씩씩거린다. 밥을 먹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괘씸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쁜 X 같으니라구... 문득문득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이미 왜 내가 그토록 열이 심하게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남편한테 백만스물두번 쯤 이야기 한 다음이기에 그의 반응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그냥 웃거나, 한숨 한번 내쉬거나, 빨리 잊어버려야 할 텐데, 하는 정도이다.

  한창 까칠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다. 직장생활에 치이고 아내, 며느리, 시누이 등등 수식어가 붙으면서 순간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살기 어려워졌다. 물론 말로는 어려워졌다고 하면서도 지금도 그다지 참하거나 예의 바른 편은 못된다. 더욱이 나는 오래 참는 성격도 아니다. 꾹꾹 누르고 있다가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싶으면 용이 불을 뿜듯 담아두었던 것을 폭발해 낸다.

  작가 김홍신이 작품 구상을 위해 역술 공부를 좀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백이면 백, 다 적용되는 한 마디가 있다고 한다. 누군가 의논을 해올 때 “그 성질 좀 죽이고 살어.” 이 한 마디면 “어떻게 아셨어요?” 라는 대답이 되돌아온단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신동엽이 “어릴 때 크게 아팠던 적 있죠?” 이 말이면 다 통한다더니 그에 버금가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성질을 부려야 할 때, 부리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가릴 수만 있어도 삶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시비나 갈등을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시의 적절하게 성질부리는 일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배려 차원에서, 또는 체면을 생각해 무리하게 참다 보면 이기적이고 아둔한 상대의 발톱만 길러주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 미련한 상대가 뭉툭한 발톱을 세우고 미련을 떠는 꼴을 봐야 한다. 그 추악한 꼴을 보고 있자면 그 동안 마음을 갈무리하며 수양했던 시간들이 아깝고 억울해서 애초에 부릴 성질, 몇 배는 더 부리게 된다.

  반면에 한 성격 하는데, 의 그 성격이 아니라 어디서 감히 성질을 부리는 게야, 의 못난 성질도 있다. 보통 자기 분에 못 이겨 똥인지 된장인지 못 가리고 울고불고하는 상황에서의 성질을 가리킨다. 이것은 앞서 말한 미련한 발톱의 소유자와 중첩된다. 내가 하는 것에 비해서 상대가 더 배려를 해줄 때는 정신을 더더욱 바짝 차려야 하는데 그럴수록 곰처럼 게으르게 늘어지는 부류가 있다. 감수성이 부족하거나 매우 오만한 타입의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게으른데다 미련하기까지 하면 결국 주변에 아무도 안 남는다.

  한편, 위험한 성질의 성질도 있다. 잔인한 구석이 있거나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 중에 상대방의 성질을 돋우느라고 그의 아킬레스건을 부러 건드릴 때도 있다. 상대방을 완전히 다운시켜야 한다고 결심했거나, 아예 다시는 안 볼 것을 각오하고 부리는 성질이라고 볼 수 있다. 지능적이긴 하지만 저급하고, 막장이기는 하지만 효과 만점인 성질 돋우기인 셈. 이런 상황에서 당하는 사람은 짐짓 피해자인 것인 양 하지만 당해도 싸다 싶은 경우도 종종 있다. 변하지 않을 테지만 열이라도 받게 하자, 는 의지는 먼저 상처 입은 자의 절절한 포효일 수도 있다.

  Anger management라는 영화도 있지만 내 성질을 내가 살리고, 죽이고 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더군다나 사람 사이에서 갈등과 다툼은 피할 수 없다. 때로 관계의 성장을 위한 필요악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이니 포용이니 하는 말들은 얼마나 듣기 훈훈한가. 나를 낳아주신 엄마나 좋든 싫든 나를 인정해야 하는 남편에게서 그런 미덕을 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내 기대 이상으로 누군가 나를 용인하고 배려할 때는 잘난 척 하지 말고 더욱 긴장해야 할 것이다. 겉으로 아무리 점잖아 보여도 대한(大恨)민국 사람 중에 성질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말이다. 트러블이 잦을 수밖에 없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런 마음을 갖고 긴장한다면 미련하게 발톱 기를 틈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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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9-11-30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같이 다혈질인 인간한테는 요 성질 죽이는 일이 힘들때가 다반사입니다.
어떻게 수양해야 약발이 오래갈지..


어제 오늘 비가와서 기분이 다운되는걸 가까스로 잡고 있어요.
저녁에 맛있는 밥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업업 되겠죠?^^;
깐따삐야님 댁, 오늘 저녁 메뉴는 모예요?! (컨닝원츄!ㅎ)

깐따삐야 2009-12-01 09:39   좋아요 1 | URL
저 역시 그래요. 좀 참아보려고 해도 눈빛은 이글이글. ㅋㅋ

요즘 날씨가 그렇죠. 북반구에 사는 것 같아요. 어제 저녁엔 무 넣은 꽁치조림. 오늘 아침은 황태국 먹었습니다. 레와님은 맛난 거 드셨나요? 매일 뭘 먹나도 고민이에요.

Mephistopheles 2009-11-30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일 있었답니까..??
그나저나...어쩌면 전 막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호홋

깐따삐야 2009-12-01 09:44   좋아요 1 | URL
어쩌면 사람을 막장까지 몰아치는 상대방이 미련한 건지도 몰라요.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메피님은 성질 안 부려가면서 사람 약올리는 거 잘하실 것 같아요.^^

다락방 2009-12-0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대뜸 보면 성격 같은거 없게 생긴 저같은 인간에게도 성질이 있으니, 정말 대한민국에 성질 없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싶네요. 게다가 우리들은 홧병이란것도 있잖습니까..
삶이..쉽질 않아요.....

저 위에 댓글 보고나니 저도 묻고 싶네요.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은 맛있게 드셨어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12-01 14:4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은 순한 인상이신가 봐요.^^ 홧병, 무섭죠. 혈압 오르면 추운 줄도 모르잖아요.

밤사이 공복 때문인지 아침이 가장 맛있어요. 그나저나 별로 입맛은 없는데 몸무게는 자꾸 늘고. 그래도 먹기는 먹어야 하고. 임신부의 삶이 그렇답니다. 다락방님 페이퍼에서는 소주와 안주 냄새가 솔솔 나서 부럽기 그지없어요.ㅠ

레와 2009-12-01 16:00   좋아요 1 | URL
저는 입맛 없을때 풋고추와 상추쌈 먹어요!
( 아 생각만 해도 군침..;; )

그런데 입맛 없을때가 거의 없어요. ㅎㅎㅎㅎㅎㅎ

깐따삐야 2009-12-02 12:21   좋아요 1 | URL
레와님, 저도 풋고추하고 상추쌈 좋아해요. 맛난 고추장하고 쌈장만 있으면 웰빙 식탁으로 꾸밀 수 있죠!

저도 그랬었는데.ㅠ 입맛은 없는데 살은 찌니 이젠 억울하기까지 하다는.
 

  늦잠을 잤다. 오늘은 남편이 동료 선생님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는 날이다.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둘 중 누구도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남편 말로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꺼버린 것 같다고. 급기야 전화벨 소리조차 알람인 줄 알고 꺼버리더니 갑자기 허둥지둥. 시계를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얼른 세수만 해요, 세수만. 어, 난 머리 꼭 감아야 하는데. 그나마 어젯밤에 미리 짐을 싸놓은 게 다행이었다. 뭐 빠뜨린 것 없어요? 아아, 다 챙겼어요. 하지만 그가 나가고 난 후 면도기를 빠뜨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대략 난감. 새벽에 잠깐 깼을 때 시계를 보니 4시여서 아직 잘 시간이 많이 남았음을 흡족해 했는데 그냥 내리 자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평소에 늑장 부리는 일 없이 잘 일어나는 남편을 마냥 믿은 것도 잘못이었다. 내 딴엔 아침에 누룽지라도 끓여 먹이면서 몇 가지 잔소리를 할 계획이었는데 뛰지 말고 걸어가요, 라는 말 밖에는 못했다.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두고 보시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궤변을 듣느라고 늦게 잠자리에 든 것이 문제였다. 남편은 재미없다, 지루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보기 시작한 거 끝까지 봐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결국 들으나마나한 내용이었는데. 오랜만에 동료들과 놀러가는 아침에 지각이나 하게 만들고. 후회막급이다.

  오늘은 친정에 가서 자야겠다. 가깝게 살지만 결혼 한 후로 자고 온 적은 별로 없는데 오랜만에 예전 내방에서 자게 생겼다. 요즘 엄마가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다. 엄마는 다른 복은 없는데 일복만 타고난 사람 같다. 장성한 자식들도 엄마 곁에만 가면 아기가 되어버리고 아빠 역시 엄마를 무슨 로봇인간 쯤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결혼한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엄마한테 잘못했던 것만 새록새록 생각난다.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면 안 그럴 텐데. 꼭 지나봐야만 알고, 알았을 땐 늦어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야지.

  그러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란 해주시는 음식, 꼬박꼬박 받아먹는 일 뿐. 나중에는 육아까지 부탁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가장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은 엄마다보니 나 마음 편하자고 마냥 이기적으로 군다. 전에 엄마가 뿔났다, 라는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독립선언을 했을 때 그나마 대신할 사람이 있으니 저럴 수도 있는 거지, 씁쓸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할 일을 할 만큼 하고도, 어쩌면 다른 사람 몫까지 더 하고도, 여전히 빼도 박도 못하는 삶도 있다.

  돌이켜보니 엄마 인생에 한 번도 지각이란 없었다. 나처럼 늦잠 자느라 가족들 아침을 굶겨 보내거나, 챙겨 보낼 것을 못 챙기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엄마도 잠을 자기는 자는 걸까, 싶을 정도로 바지런하셨다. 결혼을 해보니 남편 말로는 부지런하시다는 시어머니도 내가 보기에는 그런가, 하는 정도였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빈틈없이 살림 솜씨를 발휘하는 엄마와 비교하면 나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 엄마는 타고난 체력은 빈약한데 오로지 기로 움직이는 사람 같다.

  엄마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남편도 놀러가서 재미있을 테니 우리도 재미있게 지내야지. 집에서 뭘 해먹으면 엄마가 또 움직이셔야 하니까 외식을 할까. 아기 가졌을 땐 사 먹는 음식 조심해야 한다고 안 된다고 하시겠지. 뭐든지 됐다고 하시는 엄마와 할 수 있는 일도 참 없다. 결혼 전에 엄마와 단 둘이 여행 가는 것도 생각만 하다하다 실천을 못한 것이 지금 와서 아쉽다.   

  평소처럼 수다 떨면서 뭘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내가 뭘 하자고 하거나, 어딜 가자고 하면 엄마가 한번이라도 그래! 하고 따라나서 보셨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나와의 1박 2일이 휴식이 필요한 엄마를 더 피곤하게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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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11-2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야간자율을 하고 와보니 3개 공중파 방송국이 다 똑같은 프로그램을 내보내서 질려버렸는데, 댁에서는 끝까지 다 보셨군요.
엄마는 타고난 체력은 빈약한데 오로지 기로 움직이는 사람 같다. -> 절절하게 공감하네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기로 약해지시더라구요. 걱정을 사서 한다, 펀하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어렵게 산다고 가끔 화도 내보지만..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깐따삐야 2009-11-30 15:44   좋아요 0 | URL
왜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ㅠ

맞아요. 이제는 엄마도 나이를 생각해! 얘기도 하는데 그 동안 살아오던 것이 있으니 안 바뀌죠. 저는 결혼하고 나서 더 짐이 된 것 같아요. 남편까지 하나 더 붙어온 셈이죠. 저 역시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레와 2009-11-3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하고 불러만 봐도 울컥해요..


깐따삐야 2009-11-30 15:45   좋아요 0 | URL
에궁~ 착하신 레와님.^^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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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른 살과는 먼 나이 즈음 신문 지면을 꽉 채운 그녀와 그녀의 시집을 보았다. 왠지 내 나이와 맞지 않는 것 같아 새 시인이 등단했나 보군, 하고 지나쳤다가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 그 시집을 읽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에 동요하고 아파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책 속의 많은 시들이 마음을 끌었다. 이후에 그녀와 관련된 기사 및 평론들까지 찾아 읽게 되었는데 베스트셀러가 된 첫 시집 한권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그때의 유감을 뒤늦게 고백하고 있다.

  당시 평론가들과 최영미 시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말이 오갔든, 나는 그녀의 시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은 독자였다. 굳이 혁명이니, 80년대니, 이데올로기니, 그런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날카로운 감수성을 읽었다. 우연히 동승한 타인의 차/안전벨트로 조여오는 침묵의 힘/다리를 꼰 채 유리 속에 갇힌 相思/밀고 밀리며/스스로를 묶어내는, 살떨리는 집중이여 -‘짝사랑’ 전문. 갖가지 육중한 용어를 써가며 숨은 뜻을 찾아내려는 몇몇 평론가들도 있는 듯 했지만 나는 그녀의 시를 아주 단순하게, 청춘을 보내는 고통의 연가쯤으로 읽었다.

  그 후로 그녀는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간간히 산문집도 내곤 했다. 첫 시집만큼 이렇다할만한 책이 없었던 것은 독자로서의 내 취향이 변한 탓인지, 그녀도 장정일이나 이문재처럼 처녀작이 워낙에 대단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는데 오랜만에 읽는 맛이 나는 산문을 접한 기분이다. 나도 그녀처럼 오프사이드를 겨우 이해한 축구광이고, 이종욱과 고영민이 있는 두산베어스의 팬인데다, 덩치 큰 화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런 공통분모 덕도 있겠지만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행간마다 묻어나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인 것 같다. 시인 김용택이 최영미를 가리켜 ‘응큼떨지 않는 서울내기 시인’이라고 했는데 아주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까탈스럽기는 해도 인정이 있어서 함께 있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친해지는 사람이 있는데 최영미 시인도 그런 타입의 사람이지 싶다.

  지금은 아마 속초에 살고 있나보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속초로 옮겨가니 집도 마련하고, 차도 생기고, 악다구니 같은 서울살이도 면하고. 자족하고 있는 듯 했다. 비좁고 말도 많은 동네이다 보니 나이 먹어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읊어주고 있다. 서른아홉의 그녀는 강둑에 앉아 남은 청춘을 방생하리라 다짐하며 서른인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른은 결코 한 해가 아니다. 언제든 자기 인생을 철저하게 뒤돌아 볼 때 우리는 영원히 서른 살이고, 부러진 뼈들을 추슬러 새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 가차 없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p.149 철저하게, 가차 없이. 오랜만에 듣는 말들이다.

  서른 살의 고통스러웠던 잔치는 마흔 살의 보다 여유로운 고백으로 나아가면서도 철저하고 가차 없는 자기성찰 만큼은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그런 점이 믿을만하다. 치열했던 서른 살, 어쩌면 아직도 서른 살 같은 그녀와 달리, 나는 고작 서른임에도 듬성듬성 느슨해지는 사고를 온 심신으로 느끼는 중이다. 타인에게 관대해졌다기보다는 무심해진 것이 맞고, 스스로에게 가차 없기는커녕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대충 눈감아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잘난 희망이 아니라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오기가 무섭고도 부럽다. 어느 시점에는 이렇듯 잘 변하지 않는 사람과 재회하는 일이 반가울 때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강단 있고, 외로워도 구차하지 않은, 그녀의 싱글라이프가 내내 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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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관심이 가는 산문집이네요.
나도 그녀를 좋아하거든요.^^

깐따삐야 2009-11-27 21:25   좋아요 0 | URL
첫 시집 이후 조금 실망하기도 했는데 이번 산문집은 잘 읽혀요.^^
 

  어제는 진천에 있는 ‘이원아트빌리지’에 다녀왔다. 건축가인 남편과 사진가인 아내가 ‘마을만들기’를 주제로 조성한 문화공간이라고. 날씨가 추워서인지 마을 안에는 주인 부부와 우리뿐인 듯했다. 아기자기한 공간을 둘러보면서 처음 이런 곳을 꿈꾸고, 설계하고, 하나씩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그림과 조형물을 배치하면서 행복해했을 부부의 모습이 그려졌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복 받은 일이기도 하고 많은 것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작가 김홍신이 그런 말을 했다. 글쓰기는 영혼을 출렁거리게 하는 일이라고, 써놓은 글을 읽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그 갈증 때문에 계속 쓰게 된다고. 그는『인간시장』을 썼고,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제는 환갑을 넘겼다. 그런데도 눈빛에서는 앞으로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반짝거렸다.

  전업주부 생활을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게을러지는 것도 싫고, 살찌는 것도 싫고, 별로 한 일도 없이 밥은 왜 먹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얘기가 달라지려나. 하지만 출퇴근이 없는 지금, 갑작스럽게 주어진 긴 여유에 점점 멍해지는 것 같다. 쇼핑과 취미생활로 소일하며 하늘하늘한 가운을 걸친 채 아파트 광고에나 나올법한 럭셔리 주부의 생활은 내 것은 아닌 듯하다. 나는 그저 내 밥은 내가 벌어먹어야 마음이 편하고 그밖에 다른 식의 주체적인 삶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어떤 면에서는 무지몽매한 사람인 것 같다.

  유시민의 신간을 읽다보니 책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했다는 말이 눈에 띈다. 그래서인가. 결혼하고 짐을 꾸리면서 세 개의 책장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그것도 선별한답시고 선별을 해서 가져왔는데 다시 손이 가는 일이 드물어졌다. 과거에 두근대는 감흥을 주었던 책들이 점점 죽은 장식물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다른 것, 새로운 것, 하면서 또 다시 책을 찾는다. 하지만 요즘은 참 잘 만났다, 싶은 책보다는 잘못 질렀구나, 싶은 책들이 더 많다. 책은 그대로인데 내 안목이 변한 것일까.

  고3 아이들 덕분에 반백수가 되어가는 남편이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다. 어제 미술관에 다녀오더니 필 받은 건지 미래의 우리 집이라고 그려놓았다. 나름 배산임수 지형이라고 설명하는데 내 눈엔 테니스코트만 보인다. 마치 미술치료를 하는 선생님처럼 그림 속에서 남편의 욕망을 엿본다. 한 가지 사실은, 사는 동안 우리는 참 유치해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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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0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9-11-1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요. 멋집니다..마치 이철수 판화를 연상하게 하네요.
이원아트빌리지 참 괜찮은데 찾는이가 별로 없는 듯하여 괜히 안쓰러워요.

깐따삐야 2009-11-20 09:28   좋아요 0 | URL
저렇게 혼자 붓 가지고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하더군요.^^
세실님도 가보셨군요. 규모는 크지 않지만 구조도 특이하고 관리도 잘 해놓았더라구요. 꽃피는 봄에 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순오기 2009-11-25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산임수의 풍수에 맞춘 멋진 집인데요. 테니스장 있으면 좋지요~ ^^
작년 가을, 동서식품 문학기행에 당첨돼 정지용, 오장환문학관에 갈때
기차에서 김홍신씨가 내 짝이었어요.^^
덕분에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많은 이야기도 나눴는데 포스팅은 여직 못했지요.

깐따삐야 2009-11-27 21:32   좋아요 0 | URL
저는 텃밭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지용, 오장환 문학관이면 충북에 오셨었군요! 저는 가까운 데 사는데도 아직 못 가봤네요. 김홍신씨와 짝이었다니 즐거우셨겠어요. 무릎팍도사에서 보니 은근히 재밌으시던데. 순오기님 눈에 비친 그분은 어땠을까,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