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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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른 살과는 먼 나이 즈음 신문 지면을 꽉 채운 그녀와 그녀의 시집을 보았다. 왠지 내 나이와 맞지 않는 것 같아 새 시인이 등단했나 보군, 하고 지나쳤다가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 그 시집을 읽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에 동요하고 아파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책 속의 많은 시들이 마음을 끌었다. 이후에 그녀와 관련된 기사 및 평론들까지 찾아 읽게 되었는데 베스트셀러가 된 첫 시집 한권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그때의 유감을 뒤늦게 고백하고 있다.

  당시 평론가들과 최영미 시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말이 오갔든, 나는 그녀의 시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은 독자였다. 굳이 혁명이니, 80년대니, 이데올로기니, 그런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날카로운 감수성을 읽었다. 우연히 동승한 타인의 차/안전벨트로 조여오는 침묵의 힘/다리를 꼰 채 유리 속에 갇힌 相思/밀고 밀리며/스스로를 묶어내는, 살떨리는 집중이여 -‘짝사랑’ 전문. 갖가지 육중한 용어를 써가며 숨은 뜻을 찾아내려는 몇몇 평론가들도 있는 듯 했지만 나는 그녀의 시를 아주 단순하게, 청춘을 보내는 고통의 연가쯤으로 읽었다.

  그 후로 그녀는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간간히 산문집도 내곤 했다. 첫 시집만큼 이렇다할만한 책이 없었던 것은 독자로서의 내 취향이 변한 탓인지, 그녀도 장정일이나 이문재처럼 처녀작이 워낙에 대단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는데 오랜만에 읽는 맛이 나는 산문을 접한 기분이다. 나도 그녀처럼 오프사이드를 겨우 이해한 축구광이고, 이종욱과 고영민이 있는 두산베어스의 팬인데다, 덩치 큰 화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런 공통분모 덕도 있겠지만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행간마다 묻어나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인 것 같다. 시인 김용택이 최영미를 가리켜 ‘응큼떨지 않는 서울내기 시인’이라고 했는데 아주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까탈스럽기는 해도 인정이 있어서 함께 있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친해지는 사람이 있는데 최영미 시인도 그런 타입의 사람이지 싶다.

  지금은 아마 속초에 살고 있나보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속초로 옮겨가니 집도 마련하고, 차도 생기고, 악다구니 같은 서울살이도 면하고. 자족하고 있는 듯 했다. 비좁고 말도 많은 동네이다 보니 나이 먹어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읊어주고 있다. 서른아홉의 그녀는 강둑에 앉아 남은 청춘을 방생하리라 다짐하며 서른인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른은 결코 한 해가 아니다. 언제든 자기 인생을 철저하게 뒤돌아 볼 때 우리는 영원히 서른 살이고, 부러진 뼈들을 추슬러 새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 가차 없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p.149 철저하게, 가차 없이. 오랜만에 듣는 말들이다.

  서른 살의 고통스러웠던 잔치는 마흔 살의 보다 여유로운 고백으로 나아가면서도 철저하고 가차 없는 자기성찰 만큼은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그런 점이 믿을만하다. 치열했던 서른 살, 어쩌면 아직도 서른 살 같은 그녀와 달리, 나는 고작 서른임에도 듬성듬성 느슨해지는 사고를 온 심신으로 느끼는 중이다. 타인에게 관대해졌다기보다는 무심해진 것이 맞고, 스스로에게 가차 없기는커녕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대충 눈감아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잘난 희망이 아니라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오기가 무섭고도 부럽다. 어느 시점에는 이렇듯 잘 변하지 않는 사람과 재회하는 일이 반가울 때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강단 있고, 외로워도 구차하지 않은, 그녀의 싱글라이프가 내내 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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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관심이 가는 산문집이네요.
나도 그녀를 좋아하거든요.^^

깐따삐야 2009-11-27 21:25   좋아요 0 | URL
첫 시집 이후 조금 실망하기도 했는데 이번 산문집은 잘 읽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