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잤다. 오늘은 남편이 동료 선생님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는 날이다. 알람을 맞춰 놓았지만 둘 중 누구도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남편 말로는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꺼버린 것 같다고. 급기야 전화벨 소리조차 알람인 줄 알고 꺼버리더니 갑자기 허둥지둥. 시계를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얼른 세수만 해요, 세수만. 어, 난 머리 꼭 감아야 하는데. 그나마 어젯밤에 미리 짐을 싸놓은 게 다행이었다. 뭐 빠뜨린 것 없어요? 아아, 다 챙겼어요. 하지만 그가 나가고 난 후 면도기를 빠뜨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대략 난감. 새벽에 잠깐 깼을 때 시계를 보니 4시여서 아직 잘 시간이 많이 남았음을 흡족해 했는데 그냥 내리 자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평소에 늑장 부리는 일 없이 잘 일어나는 남편을 마냥 믿은 것도 잘못이었다. 내 딴엔 아침에 누룽지라도 끓여 먹이면서 몇 가지 잔소리를 할 계획이었는데 뛰지 말고 걸어가요, 라는 말 밖에는 못했다.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두고 보시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궤변을 듣느라고 늦게 잠자리에 든 것이 문제였다. 남편은 재미없다, 지루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보기 시작한 거 끝까지 봐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결국 들으나마나한 내용이었는데. 오랜만에 동료들과 놀러가는 아침에 지각이나 하게 만들고. 후회막급이다.

  오늘은 친정에 가서 자야겠다. 가깝게 살지만 결혼 한 후로 자고 온 적은 별로 없는데 오랜만에 예전 내방에서 자게 생겼다. 요즘 엄마가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다. 엄마는 다른 복은 없는데 일복만 타고난 사람 같다. 장성한 자식들도 엄마 곁에만 가면 아기가 되어버리고 아빠 역시 엄마를 무슨 로봇인간 쯤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결혼한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엄마한테 잘못했던 것만 새록새록 생각난다.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면 안 그럴 텐데. 꼭 지나봐야만 알고, 알았을 땐 늦어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야지.

  그러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란 해주시는 음식, 꼬박꼬박 받아먹는 일 뿐. 나중에는 육아까지 부탁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가장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은 엄마다보니 나 마음 편하자고 마냥 이기적으로 군다. 전에 엄마가 뿔났다, 라는 드라마에서 김혜자가 독립선언을 했을 때 그나마 대신할 사람이 있으니 저럴 수도 있는 거지, 씁쓸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할 일을 할 만큼 하고도, 어쩌면 다른 사람 몫까지 더 하고도, 여전히 빼도 박도 못하는 삶도 있다.

  돌이켜보니 엄마 인생에 한 번도 지각이란 없었다. 나처럼 늦잠 자느라 가족들 아침을 굶겨 보내거나, 챙겨 보낼 것을 못 챙기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엄마도 잠을 자기는 자는 걸까, 싶을 정도로 바지런하셨다. 결혼을 해보니 남편 말로는 부지런하시다는 시어머니도 내가 보기에는 그런가, 하는 정도였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빈틈없이 살림 솜씨를 발휘하는 엄마와 비교하면 나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수준. 엄마는 타고난 체력은 빈약한데 오로지 기로 움직이는 사람 같다.

  엄마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남편도 놀러가서 재미있을 테니 우리도 재미있게 지내야지. 집에서 뭘 해먹으면 엄마가 또 움직이셔야 하니까 외식을 할까. 아기 가졌을 땐 사 먹는 음식 조심해야 한다고 안 된다고 하시겠지. 뭐든지 됐다고 하시는 엄마와 할 수 있는 일도 참 없다. 결혼 전에 엄마와 단 둘이 여행 가는 것도 생각만 하다하다 실천을 못한 것이 지금 와서 아쉽다.   

  평소처럼 수다 떨면서 뭘 할지, 생각해 봐야겠다. 내가 뭘 하자고 하거나, 어딜 가자고 하면 엄마가 한번이라도 그래! 하고 따라나서 보셨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나와의 1박 2일이 휴식이 필요한 엄마를 더 피곤하게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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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9-11-2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야간자율을 하고 와보니 3개 공중파 방송국이 다 똑같은 프로그램을 내보내서 질려버렸는데, 댁에서는 끝까지 다 보셨군요.
엄마는 타고난 체력은 빈약한데 오로지 기로 움직이는 사람 같다. -> 절절하게 공감하네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기로 약해지시더라구요. 걱정을 사서 한다, 펀하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어렵게 산다고 가끔 화도 내보지만..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깐따삐야 2009-11-30 15:44   좋아요 0 | URL
왜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ㅠ

맞아요. 이제는 엄마도 나이를 생각해! 얘기도 하는데 그 동안 살아오던 것이 있으니 안 바뀌죠. 저는 결혼하고 나서 더 짐이 된 것 같아요. 남편까지 하나 더 붙어온 셈이죠. 저 역시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레와 2009-11-3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하고 불러만 봐도 울컥해요..


깐따삐야 2009-11-30 15:45   좋아요 0 | URL
에궁~ 착하신 레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