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철도원>의 작가, 아사다 지로의 신간. 명석하고 능란한 이야기꾼인 그는 해묵거나 신파스런 소재를 쨍하고 묵지근한 감동으로 끌어올릴 줄 안다.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단편들. 이번 새 책이 궁금하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고이케 마사요의 소설집. 연합뉴스의 인터뷰를 보고 이달의 주목 신간으로 골라보았다. 형형한 눈빛과 더불어 '복잡한 사회에 시와 소설로 구멍을 뚫어 인간이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방바닥에 누워 일본 소설들을 읽고 싶어진다. 조용하고 투명한 인물들이 차고 적적한 마음을 달래준다. 
 

 

 

    

 조경란의 새 장편소설이 나왔다. 제목을 보니 죽음의 문제에 대해 다루었으리라는 추측. 그녀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보고 싶다. 

 나는 복어를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궁금했으나 시도하지 않았고 기회가 있을 땐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이 문장을 써놓고 보니 복어를 죽음 또는 자살로 맞바꾸어도 통하는 데가 있네. 복어의 맛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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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0-10-0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어탕이나 지리를 먹어본적은 저도 없고 그거, 복칼국수는 두 번인가 먹어봤어요.
생각보다 시원하더라구요. 해물칼국수랑 또 다르게 담백하고요. 해물칼국수보다 1천원 더 비싸요 ^^

(꽤 오랜만에 인사드리는거 같아 새삼 제대로 해보려구요. 잘 지내셨죠?)

깐따삐야 2010-10-05 10:23   좋아요 0 | URL
남편이 동료들과 복지리를 먹었다고 두어번 얘기했는데 그의 설명이 미흡해서 맛이 잘 연상되지 않았더랬어요. 그는 복어살이 부드럽다고 말했던 것 같아요. 무스탕님 말씀을 들으니 천원 비싸더라도 당장 먹고 싶네요!

그러게요,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저는 시끌벅적 영달이와 복작복작 잘 지내요.^^

레와 2010-10-0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장국으로 복어지리만한게 없어요. ㅎㅎ

깐따삐야 2010-10-05 16:11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일단 레와님과 술을 한잔? ㅎㅎ 술 마셔본지가 어언 백만년전이에요.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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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서 굴렌 굴드를 듣던 시크한 남자는 어디로 갔지? 책을 읽으며 아내의 퉁박에 꼼짝 못하는 퇴화한 중년 사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윤대녕을 읽지 않은 이들은 뭐 이 정도의 글을 가지고,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간 윤대녕을 읽어온 이들은 알듯말듯 모종의 미소를 지을 수도 있겠다. 아마도 이 산문집은 윤대녕 스스로 자신의 이력과 속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첫 책이 될 것이다. 어느덧 나이 먹은 그의 마음이 소박해져 독자들을 향해 나 실은 이런 사람이오, 반성과 고백을 하고 싶었는지도. 윤대녕식 은유와 비의에 길들어 있던 나는 대낮에 맨얼굴의 여인을 만난 것처럼 조금 실망했고 덕분에 그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책은 소제목을 달고 다섯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지만 분류에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모든 글이 언제나처럼 힘들이지 않고서도 유유히 읽히는데 특징적인 점이라면 마지막 장에 그간의 서평들을 실었다는 것. 그는 어떤 책을 읽어왔을까, 서평은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그에게 한 수 배워볼까, 기대했는데 다소 건조하다 싶은 인상에 창작과 비평은 역시 별개인가, 하는 아쉬움.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한 권의 산문집은 이 작은 아쉬움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고독했던 유년기, 수수께끼 같은 불교식 선문답, 신기루이자 구원의 존재인 여인들, 클래식에 대한 감식안, 유랑자들의 휴식처인 제주도, 시 또는 회화 같은 문체 등, 윤대녕 하면 떠오르거나 짐작할 수 있는 창작의 모티브들이 오랜 베일을 벗고 드러나 있다. 무심하던 그가 독자를 향해 쑥스럽게 내미는 선물 같은 책이다.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다."(p.18) 그는 첫사랑이 남기고 간 이 말을 간직하며 그 후 사랑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다. <데미안>의 에바 부인 같던 그의 여인들은 아마도 첫사랑의 환영들이었는가 보다.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우리는 김밥과 사이다를 먹고 호수에 떠다니는 오리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얼핏 돌아본 어머니의 얼굴엔 난 같은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행복했던 것일까? 부디 그랬더라면 좋으련만(p.40). 부모의 인생을 돌아보고 연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 자신 나이 먹어간다는 증거일 수도. 감히 말한다면 그도 철들기 시작했는가 보다.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 굶어죽지 않고 버티는 게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미덕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진해서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면 어쨌든 턱걸이를 계속해야 한다. 세상과 매끈하게 어울리는 재주는 없으나 땀을 흘리고 뛰어와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안다. 그러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p.161). 강직하고 경건한 문학 노동자를 보는 것 같다. 어딘가 생존본능이 결여되어 있는 듯 했던 윤대녕의 남자들은 이렇듯 남몰래 부단히 턱걸이 중이었던가.  

  문화는 진정제가 아니라 오히려 면역력을 기르는 비타민에 가깝다. 요컨대 문화라는 건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어느 정도의 능동적인 자기 투자와 이해의 노력이 필요한 품목이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삶의 깊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p.190). 문화에 대한 훌륭한 정의다. 시대 탓을 하며 시류에 휩쓸려 가는 도중에 이런 문장을 만나면 죽비소리처럼 환기가 된다.  

  아기 속에는 어른을 위한, 어른의 소란스러운 세계를 위한 그리고 나중을 위한 예비로서의 침묵이 수북이 쌓여 있다(p.251).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에 나오는 구절로 이 책의 마지막 장 서평에서 발췌했다. 아직 옹알이 뿐인 영달이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는데 현란한 바디랭귀지를 보고 있자면 아기는 결코 침묵한다 볼 수 없다. 어쩌면 내재된 언어의 전압을 몸짓으로 뿜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떠오르는 짤막한 인연 하나. 십년 전, 나는 아무개에게 <침묵의 세계>를 선물했고 그는 나를 멋진 사람으로 착각했고 그 착각 속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가 곧이어 정신을 차리곤 이상한 편지와 함께 떠났다. 그리고 나는 내내 침묵했다. 그 책을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무작위로 인용하고 보니 책에 비하여 너무 초라한 리뷰가 되어버렸다. 무릇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고 그는 조용한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그것은 그를 향한 나의 소란스런 애호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 독자인 것이 행복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번 산문집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의 아내의 면모에 일말의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사는 여인이 항상 궁금했는데 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는 것과 그 풍경 안에서 함께 지지고볶고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새삼 재확인하게 되었달까. 윤대녕을 계속 읽을 수 있는 것은 어느만치 그 여인 덕분이란 생각에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윤대녕은 그 자신의 말처럼 인복이 많고 그 속에는 분명 처복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이 궁금한 독자들은 어여 읽으라는 말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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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10-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깐따삐야님이 별을 다섯개나 준 책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

네. 시월이에요. :)

깐따삐야 2010-10-05 10:04   좋아요 0 | URL
윤대녕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페이지를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게 되실 거에요.^^
시월은 좀 울적한데 이 책으로 위안하며 시작했네요.

Alicia 2010-10-0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문에 인터뷰 글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지는 줄 알았더랬습니다..
조만간 읽어보려구요 :)

깐따삐야 2010-10-05 10:07   좋아요 0 | URL
아니 왜 이 냥반은 책을 안 내는 거냐고 새로 나온 책, 새로 나올 책을 클릭해가며 신경질을 부린 적도 있어요. 그 보답 같은 책이에요.^^

2010-10-04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5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이었다 

- 나희덕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에서 뱀이 울고 있었다. 방울소리 같기도 하고 새소리 같기도 한 울음소리. 아닐 거야. 뱀이 어떻게 울겠어. 뒤돌아서면 등 뒤에서 뱀이 울었다. 내가 덤불 속에 울고 있는 것인가. 뱀이 내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인가. 가을이었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에 가려 뱀은 보이지 않았다. 덤불은 말라가며 질겨지고 있었다. 그는 어쩌자고 내게 말을 거는 것일까. 산을 내려오는데 울음소리가 내내 나를 따라왔다. 뱀은 여전히 덤불 속에 있었다. 가을이었다. 아무하고도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가을이었다. 다음 날에도 산에 올랐다. 뱀이 울고 있었다. 덤불 속을 들여다보면 그쳤다 뒤돌아서면 다시 들리는 울음소리. 덤불이 앙상해질 무렵 뱀은 사라졌다. 낯선 산 아래서 지낸 첫 가을이었다.   

  긴 페이퍼를 쓰다가 이 시가 생각났다. 볕이 좋은 날이었다. 빨래는 바삭하게 말랐고 친정엄마는 뱅어포에 고추장을 발라 내어널었다. 영달이와 나는 그림자놀이를 하며 놀았다. 땅에 비친 두 사람의 크고 작은 실루엣, 손가락의 재미난 움직임들에 영달이는 좋아라 했다.   

  하늘은 곱고 일상은 변함없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 졸졸 따라다니는 듯한 가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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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9-27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은 곱고 일상은 변함없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 졸졸 따라다니는 듯한 가을날,

을 저도 살고 있어요, 지금. 내 마음같은 글이네요.

깐따삐야 2010-09-28 10:52   좋아요 0 | URL
이곳에 오면 묘하게 겹치는 날들이 있어요.
오늘도 볕이 좋을 모양이에요. 다락방님.^^

2010-09-27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오는 밤. 영달이가 잠들고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기 시작했다. 하루 중 내가 조용히 책읽기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어깨가 쑤신 날도, 눈이 뻑뻑한 날도, 이도저도 다 귀찮은 날도, 아주 잠깐일지언정 이 시간을 건너뛸 수 없다.  

  권여선이 낸 책은 다 읽었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특유의 소설스럽지(?) 않은 관념적 문장들 때문에 독서의 맥이 뚝, 뚝, 끊기곤 했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거칠게 밟히는 성찰과 진실 때문에, 이 작가를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윤기라곤 없이 시종일관 싸한 화법도 나를 닮지 않아 그런가. 괜히 매력적이란 말이지.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p.118). 이러한 아포리즘에 걸려들기 위해 그녀의 책을 읽고, 또 읽는다.    

  그런데 엊그제 밤은 주인공들도 심란하고 나도 좀 심란했던 모양이다. 오전, 오후로 친정과 우리집에 손님이 다녀간 날이라 좀 피곤했고 낮 동안의 회상들로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Y와의 오랜 통화가 귓가에 맴맴 돌고 책 속에는 왜 이렇게 맛나게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은지. 마음은 너울너울.    

  벌써 십년 전인데 가끔 우울할 때마다 Y가 창밖을 보라, 에 맞춰 춤추던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킥킥대곤 한다. 눈 오는 저녁, Y는 아침에 발표라도 있었는지 갈색 정장을 입고 동아리방에 출근을 했는데 장난기 심한 선배 하나가 날 좀 웃겨달라고 했고, 그건 그냥 장난 삼아 던진 말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았는데, 그 순간 Y가 그럼 제가 춤을 출테니 다 같이 노래를 불러주세요, 했다. 다들 이게 웬 떡이냐 싶은 표정들로 오냐오냐, 호응을 했고 박수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자 Y는 양손바닥으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시늉을 하며 정말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배꼽이 빠질 지경인데 Y의 그 하나하나의 동작에 몰입하는 표정이 하도 비장해서 소리도 못 내고 웃느라 눈물만 질질 흘렸던 추억이 있다.     

  언젠가 Y에 대해 긴 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난다. 연락도 안 되고 몹시 보고 싶을 때였다. 다짜고짜 춤을 추는 엉뚱함과 더불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기 일쑤인 신기루 같은 친구였는데 다시 만났을 땐 다른 도시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궁금증이 폭발해 입이 터질 것 같았지만 섣부른 노파심에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Y는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그간의 변화를 찬찬히 들려주었다. 나는 잘했다고 했고 걱정스럽다고도 했고 부럽다고도, 그러니까 더 잘하라고 했던 것 같다. 이후로 Y는 내 잔소리가 정겹다며 일부러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 잔소리를 경청하기도 했다.       

  내 출산 이후에는 좀처럼 타이밍이 안 맞아 연락을 자주 못했는데 엊그제, 무척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근황을 묻자 Y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는 말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주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전이 없고 정작 하고 싶었던 일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란다. 몇 해 전 가을, 상경했을 때만 해도 내 눈에 비친 Y는 꿈을 향해 꾸준히 내공을 쌓고 있었다. 대신,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나, 관둬야 하나, 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직장에서는 자리가 잡혀 가는 반면, 꿈으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책을 읽다 말고 Y의 목소리가 맴돌아 잠이 오지 않는데도 그냥 눈을 감았다. 너무 멀리 왔다는 것. 누구나 한번쯤 그런 아쉬움으로 한탄하는 일이 없겠냐만은 Y의 탄식에 나는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기라도 한 듯 허망했다. 생쥐처럼 작은 아이였지만 코끼리처럼 크고 묵묵한 행보에 나는 십년 전부터 지금껏 무언의 박수를 보내왔다. 오직 내 앞의 선배를 즐겁게 해주겠다는 일념 하에 주위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열렬한 율동을 보여주었던 Y. 어떤 면에서 Y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나는 그새 많은 부분, 세속적인 잣대와 때낀 시선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바라보게 되었지만 우정에 대해서는 그리 되지 않고 그 우정 가운데에서도 Y를 향한 그것은 마냥 스무살 무렵에 머물러 있다. 가까울수록 너절해지는 관계들 속에서 Y와의 우정은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과 같았다. 거기엔 나의 허영심도 한몫해서 Y의 속사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너만은 영원히 정글의 거대한 초식동물로 살아다오, 하는 바람이 있었다. 세월을 비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감수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않는데도 말이다.

  Y와는 술약속을 하고 통화를 맺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저 막연히, 늘 그렇듯, 올해가 가기 전. 홀짝홀짝 안색의 요동 없이 말끔히 잔을 비우는 Y의 술마시는 모습이 그립다. 밤이 길어지는 계절이 오면 마주 앉아, 혹은 아직도 방황 중인 S를 끼워, 두런두런 너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너무 멀리 온 뒤, 각자의 헛짚은 언저리에 대한 긴긴 사연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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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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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핍진한 소설을 찾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나목>이 떠올랐을까. 사춘기 무렵에 이미 읽었는데 문득 다시 읽고 싶어졌다. 박완서 할머니는 올해도 한권의 에세이집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책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나목>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25로 두 오빠를 잃은 뒤 성치 않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이경. 전쟁의 상흔과 청춘의 열망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녀 앞에 나타난 환쟁이 옥희도 씨. 외롭고 상처 받은 이경에겐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고 옥희도 씨에겐 자신이 예술가로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생생한 대상이 필요했다. 그렇듯 절묘하고도 절박한 지점에 만난 두 사람. 자연히 사랑을 하지만 옥희도 씨의 말처럼 그는 그저 질식할 것 같은 회색빛 생활에서 경아라는 신기루에 정신을 판 것이고, 경아는 옥희도 씨를 통해 아버지와 오빠를 환상하고 있었던 것 뿐. 헐벗은 나목의 계절, 시정의 논리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인연이었다.   

  마흔 살, 다소 늦은 나이의 등단이었지만 일명 '복수의 글쓰기'라 명명되는 리얼리스트적 사명으로 박완서 할머니는 그간 참으로 숱한 작품을 써왔다. 흔히 번복되는 소재인 6.25를 비롯하여 중산층의 삶과 속내,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세월 속에 드러나는 개인의 문제 등, 특유의 차지고 맛깔스런 글발로 남녀노소를 아울러 여러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천의무봉의 글솜씨라는 평이 있을만큼 매번 빈틈없는 글쓰기, 작품의 똑고른 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겐 처음이나 지금이나 이 작품이 가장 아름답다.  

  본격적인 생활인이 되기 전, 꾸밀래야 꾸밈없는 달뜬 목소리가 면면히 들려서일까. 옥희도 씨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물구나무 서기를 하며 온 화실을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이경을, 하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는 이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깨뜨리고 싶지만 끝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는 이경을, 청춘 언저리의 그 두 가지 얼굴을 나도 마주한 적이 있다. 어제의 망령과 내일의 희망 사이에서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를 되뇌이는 이경은 비단 50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라는 구원이자 절망의 감옥에서 나목의 계절을 견디고 있는 또 다른 옥희도 씨도 나는 알고 있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근원적 고독은 때때로 스스로를 잠식해가지만 그 끝없는 부침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대결 속에서 <나무와 여인> 같은 불멸의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잔혹한 시대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존재 조건, 그들 자신이고 그래서 이 오래된 소설은 세월을 거슬러 여전히 호소력을 갖는다.       

  작가들은 대개 가장 마지막 작품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 되기를 바라겠지만 그들의 처녀작, 또는 등단작에는 이후의 작품들 속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투명한 맨살, 말랑한 속살 같은 것이 만져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이후의 풍성함이나 정교함 보다도 훨씬 더 독자인 나의 마음을 끈다. <나목>도 물론이었고 이 꾸무적대고 느리적대는 가을의 문턱에서 간만에 찡, 하게 다시 읽은 아름다운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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