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둠 속에서 굴렌 굴드를 듣던 시크한 남자는 어디로 갔지? 책을 읽으며 아내의 퉁박에 꼼짝 못하는 퇴화한 중년 사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윤대녕을 읽지 않은 이들은 뭐 이 정도의 글을 가지고,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간 윤대녕을 읽어온 이들은 알듯말듯 모종의 미소를 지을 수도 있겠다. 아마도 이 산문집은 윤대녕 스스로 자신의 이력과 속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첫 책이 될 것이다. 어느덧 나이 먹은 그의 마음이 소박해져 독자들을 향해 나 실은 이런 사람이오, 반성과 고백을 하고 싶었는지도. 윤대녕식 은유와 비의에 길들어 있던 나는 대낮에 맨얼굴의 여인을 만난 것처럼 조금 실망했고 덕분에 그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책은 소제목을 달고 다섯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지만 분류에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모든 글이 언제나처럼 힘들이지 않고서도 유유히 읽히는데 특징적인 점이라면 마지막 장에 그간의 서평들을 실었다는 것. 그는 어떤 책을 읽어왔을까, 서평은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그에게 한 수 배워볼까, 기대했는데 다소 건조하다 싶은 인상에 창작과 비평은 역시 별개인가, 하는 아쉬움.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한 권의 산문집은 이 작은 아쉬움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고독했던 유년기, 수수께끼 같은 불교식 선문답, 신기루이자 구원의 존재인 여인들, 클래식에 대한 감식안, 유랑자들의 휴식처인 제주도, 시 또는 회화 같은 문체 등, 윤대녕 하면 떠오르거나 짐작할 수 있는 창작의 모티브들이 오랜 베일을 벗고 드러나 있다. 무심하던 그가 독자를 향해 쑥스럽게 내미는 선물 같은 책이다.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다."(p.18) 그는 첫사랑이 남기고 간 이 말을 간직하며 그 후 사랑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다. <데미안>의 에바 부인 같던 그의 여인들은 아마도 첫사랑의 환영들이었는가 보다.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우리는 김밥과 사이다를 먹고 호수에 떠다니는 오리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얼핏 돌아본 어머니의 얼굴엔 난 같은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행복했던 것일까? 부디 그랬더라면 좋으련만(p.40). 부모의 인생을 돌아보고 연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 자신 나이 먹어간다는 증거일 수도. 감히 말한다면 그도 철들기 시작했는가 보다.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 굶어죽지 않고 버티는 게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미덕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진해서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면 어쨌든 턱걸이를 계속해야 한다. 세상과 매끈하게 어울리는 재주는 없으나 땀을 흘리고 뛰어와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안다. 그러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p.161). 강직하고 경건한 문학 노동자를 보는 것 같다. 어딘가 생존본능이 결여되어 있는 듯 했던 윤대녕의 남자들은 이렇듯 남몰래 부단히 턱걸이 중이었던가.  

  문화는 진정제가 아니라 오히려 면역력을 기르는 비타민에 가깝다. 요컨대 문화라는 건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어느 정도의 능동적인 자기 투자와 이해의 노력이 필요한 품목이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삶의 깊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p.190). 문화에 대한 훌륭한 정의다. 시대 탓을 하며 시류에 휩쓸려 가는 도중에 이런 문장을 만나면 죽비소리처럼 환기가 된다.  

  아기 속에는 어른을 위한, 어른의 소란스러운 세계를 위한 그리고 나중을 위한 예비로서의 침묵이 수북이 쌓여 있다(p.251).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에 나오는 구절로 이 책의 마지막 장 서평에서 발췌했다. 아직 옹알이 뿐인 영달이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는데 현란한 바디랭귀지를 보고 있자면 아기는 결코 침묵한다 볼 수 없다. 어쩌면 내재된 언어의 전압을 몸짓으로 뿜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떠오르는 짤막한 인연 하나. 십년 전, 나는 아무개에게 <침묵의 세계>를 선물했고 그는 나를 멋진 사람으로 착각했고 그 착각 속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가 곧이어 정신을 차리곤 이상한 편지와 함께 떠났다. 그리고 나는 내내 침묵했다. 그 책을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무작위로 인용하고 보니 책에 비하여 너무 초라한 리뷰가 되어버렸다. 무릇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고 그는 조용한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그것은 그를 향한 나의 소란스런 애호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 독자인 것이 행복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번 산문집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의 아내의 면모에 일말의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사는 여인이 항상 궁금했는데 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는 것과 그 풍경 안에서 함께 지지고볶고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새삼 재확인하게 되었달까. 윤대녕을 계속 읽을 수 있는 것은 어느만치 그 여인 덕분이란 생각에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윤대녕은 그 자신의 말처럼 인복이 많고 그 속에는 분명 처복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이 궁금한 독자들은 어여 읽으라는 말 밖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와 2010-10-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깐따삐야님이 별을 다섯개나 준 책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

네. 시월이에요. :)

깐따삐야 2010-10-05 10:04   좋아요 0 | URL
윤대녕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페이지를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게 되실 거에요.^^
시월은 좀 울적한데 이 책으로 위안하며 시작했네요.

Alicia 2010-10-0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문에 인터뷰 글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지는 줄 알았더랬습니다..
조만간 읽어보려구요 :)

깐따삐야 2010-10-05 10:07   좋아요 0 | URL
아니 왜 이 냥반은 책을 안 내는 거냐고 새로 나온 책, 새로 나올 책을 클릭해가며 신경질을 부린 적도 있어요. 그 보답 같은 책이에요.^^

2010-10-04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5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