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밤. 영달이가 잠들고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기 시작했다. 하루 중 내가 조용히 책읽기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어깨가 쑤신 날도, 눈이 뻑뻑한 날도, 이도저도 다 귀찮은 날도, 아주 잠깐일지언정 이 시간을 건너뛸 수 없다.  

  권여선이 낸 책은 다 읽었고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특유의 소설스럽지(?) 않은 관념적 문장들 때문에 독서의 맥이 뚝, 뚝, 끊기곤 했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거칠게 밟히는 성찰과 진실 때문에, 이 작가를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 윤기라곤 없이 시종일관 싸한 화법도 나를 닮지 않아 그런가. 괜히 매력적이란 말이지.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p.118). 이러한 아포리즘에 걸려들기 위해 그녀의 책을 읽고, 또 읽는다.    

  그런데 엊그제 밤은 주인공들도 심란하고 나도 좀 심란했던 모양이다. 오전, 오후로 친정과 우리집에 손님이 다녀간 날이라 좀 피곤했고 낮 동안의 회상들로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Y와의 오랜 통화가 귓가에 맴맴 돌고 책 속에는 왜 이렇게 맛나게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은지. 마음은 너울너울.    

  벌써 십년 전인데 가끔 우울할 때마다 Y가 창밖을 보라, 에 맞춰 춤추던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킥킥대곤 한다. 눈 오는 저녁, Y는 아침에 발표라도 있었는지 갈색 정장을 입고 동아리방에 출근을 했는데 장난기 심한 선배 하나가 날 좀 웃겨달라고 했고, 그건 그냥 장난 삼아 던진 말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았는데, 그 순간 Y가 그럼 제가 춤을 출테니 다 같이 노래를 불러주세요, 했다. 다들 이게 웬 떡이냐 싶은 표정들로 오냐오냐, 호응을 했고 박수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자 Y는 양손바닥으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시늉을 하며 정말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배꼽이 빠질 지경인데 Y의 그 하나하나의 동작에 몰입하는 표정이 하도 비장해서 소리도 못 내고 웃느라 눈물만 질질 흘렸던 추억이 있다.     

  언젠가 Y에 대해 긴 페이퍼를 썼던 기억이 난다. 연락도 안 되고 몹시 보고 싶을 때였다. 다짜고짜 춤을 추는 엉뚱함과 더불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기 일쑤인 신기루 같은 친구였는데 다시 만났을 땐 다른 도시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궁금증이 폭발해 입이 터질 것 같았지만 섣부른 노파심에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Y는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그간의 변화를 찬찬히 들려주었다. 나는 잘했다고 했고 걱정스럽다고도 했고 부럽다고도, 그러니까 더 잘하라고 했던 것 같다. 이후로 Y는 내 잔소리가 정겹다며 일부러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 잔소리를 경청하기도 했다.       

  내 출산 이후에는 좀처럼 타이밍이 안 맞아 연락을 자주 못했는데 엊그제, 무척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근황을 묻자 Y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는 말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주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전이 없고 정작 하고 싶었던 일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란다. 몇 해 전 가을, 상경했을 때만 해도 내 눈에 비친 Y는 꿈을 향해 꾸준히 내공을 쌓고 있었다. 대신,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나, 관둬야 하나, 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직장에서는 자리가 잡혀 가는 반면, 꿈으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책을 읽다 말고 Y의 목소리가 맴돌아 잠이 오지 않는데도 그냥 눈을 감았다. 너무 멀리 왔다는 것. 누구나 한번쯤 그런 아쉬움으로 한탄하는 일이 없겠냐만은 Y의 탄식에 나는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기라도 한 듯 허망했다. 생쥐처럼 작은 아이였지만 코끼리처럼 크고 묵묵한 행보에 나는 십년 전부터 지금껏 무언의 박수를 보내왔다. 오직 내 앞의 선배를 즐겁게 해주겠다는 일념 하에 주위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열렬한 율동을 보여주었던 Y. 어떤 면에서 Y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나는 그새 많은 부분, 세속적인 잣대와 때낀 시선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바라보게 되었지만 우정에 대해서는 그리 되지 않고 그 우정 가운데에서도 Y를 향한 그것은 마냥 스무살 무렵에 머물러 있다. 가까울수록 너절해지는 관계들 속에서 Y와의 우정은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과 같았다. 거기엔 나의 허영심도 한몫해서 Y의 속사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너만은 영원히 정글의 거대한 초식동물로 살아다오, 하는 바람이 있었다. 세월을 비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감수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않는데도 말이다.

  Y와는 술약속을 하고 통화를 맺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저 막연히, 늘 그렇듯, 올해가 가기 전. 홀짝홀짝 안색의 요동 없이 말끔히 잔을 비우는 Y의 술마시는 모습이 그립다. 밤이 길어지는 계절이 오면 마주 앉아, 혹은 아직도 방황 중인 S를 끼워, 두런두런 너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너무 멀리 온 뒤, 각자의 헛짚은 언저리에 대한 긴긴 사연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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