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재야의 종소리를 함께 듣기로 했다는 E는 설렘으로 충만했다. 치마를 입어야겠지. 카드를 살까. 직접 만들까. 문구는 어떤 게 좋겠어. 영어로 쓰면 좀 그럴까. 아주 모처럼의, 어쩌면 이 친구를 알고 처음 보는 달뜬 모습이었다. 사람을 만나 호감을 느끼고 그것이 연애감정으로 발전하는 일이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비일비재한 일은 아님을 잘 알기에 나는 E를 독려했다. E가 상대를 향해 품고 있는 미혹과 의혹은 슈가파우더를 흩뿌린 듯한 창밖 풍경처럼 달콤하게 눈부셨다.   

  그날 헤어질 무렵 즈음 E가 내게 한 말. 그때 너는 칼날 같았는데 지금은 상당히 유해졌어. 그리고 내 손을 잡아주며 덧붙였다. 모든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제발 너무 깊게 생각하지도 말고. 너는 내가 얼마나 단순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인줄 모른다며 웃었지만 마음 속으로 E의 말을 곰곰히 새겼다. 고마워. 그래야겠지. 

  그리고 오늘 복직 신청을 하러 간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과일을 사고 오랜만에 순차적인 화장을 했다. 영달이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데도 영달이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오버하지 말란 식으로 말씀하셨고 나는 아주 잠깐 영달이를 업고 수업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쿡, 웃음이 나왔고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하는 엄마들의 유일한 자기위안은 아이와 함께 하는 데에 있어 양보단 질을 우선시하는 것이라던가. 나는 그저 영달이의 성장에 누가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눈과 귀를 열어놓자.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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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이미 다짐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너무 많이 또는 너무 깊게 생각하는 일이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닐까요?
복직하시는군요!

깐따삐야 2010-12-29 13:5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의 정리벽은 아무래도 보이는 것에만 한정된 것인가 봐요. 머릿속은 분리수거 하지 않은 쓰레기통 같아요. 간명한 해답 언저리를 돌며 답이 없다, 답이 없다, 중얼거리곤 해요. 스스로 삽질이나 뻘짓이라고 의식하면서도 그만두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힘들구요.

2월부터 복직이랍니다. 영달이가 이만큼 많이 자란 모습을 보고 나가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다락방님 조카 아가도 무럭무럭 크고 있죠? ^^

blanca 2010-12-29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복직하지 못하고 그렇게 다니기 싫다고 외쳤던 회사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에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깐따삐야님이 부러워지는걸요. 돌아갈 곳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아이 업고 수업하는 광경이 갑자기 그려져요 저 대학교 때 교수님이 일곱 살 딸아이 데려와 첫째줄에 앉히고 수업했던 기억도 나고 ㅋㅋㅋ

깐따삐야 2010-12-30 09:12   좋아요 0 | URL
그만둬야 하고 그만 만나고 싶은 사람과 이별하면서 저도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요.
blanca님 말씀처럼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인데 제가 마음이 당차지 못해서 괜히 짠하고 미안하고 그러네요. 아무 소용도 없는 감정인 것을 말이죠.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부장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오셔서 선생님이 일 보시는 동안 아이와 인터넷으로 옷 입히기 게임을 하며 놀아줬던 생각나요. 그 아이가 훌쩍 자라 초등학생이 되어 인사를 하는데 살짝 감격스럽기까지.^^
 

  지독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들이닥친 추위와 어떤 상황 때문에. 아슬아슬 재빠르게 내달리는 택시 안에서 혹 사고라도 날까봐 조마조마하는 나 자신이 참 우스웠다. 이미 벌어진 사고는 보이지 않는가. 몇 알의 신경안정제와 그 틈에도 챙겨들고 나온 곰돌이 새해 달력. 그리고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 몇 개.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손에 쥐어진 것들이었다.    

  그래도 세상에 나와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지나쳐 버릴 수는 없었다. 뽀로로 케익을 준비하고 촛불을 밝히고 북적이는 홀 한가운데 으리으리하게 서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구경하고 남편과 나는 그야말로 하루 종일 있는 힘껏 놀아주었다. 너는 아직 모르지만 우리가 모르지 않기에 무슨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처럼 온몸이 욱씬거려 팔다리가 들어올려지지 않을 때까지 열렬히 놀고 또 놀았다.  

  어느해 이브엔 나를 위해 노트북을 샀고 어느해 이브엔 남편이 사들고 온 트리와 눈사람을 세워놓았다. 잊지 못할 만큼 특별할 것도 없지만 잊혀지지 않을 만큼 비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올해의 이브는 어떤 면에서 참 특별했고 어떤 면에서 썩 비참했다. 겪은 만큼 깨닫고 얻었지만 두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지나갔다. 다른 모든 날처럼. 세밑의 공기는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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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12-2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일이 있었기에....???

깐따삐야 2010-12-29 10:19   좋아요 0 | URL
뭔일이 있었는데 다행히 잘 지나갔어요.^^

kimji 2010-12-2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잘 지나갔다니 다행이에요.
영달양의 첫번째 크리스마스.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이 겨울도 건강히 잘!


깐따삐야 2010-12-30 09:01   좋아요 0 | URL
네. 눈이 왔고 모든 것을 덮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이 녹으면 어찌 될까요.
고마워요. kimji님. 건필과 건강을 기원할게요!
 

이상적 설교도 아니고 대중적 호소도 아닌, 조금 먼저 겪은 사람으로서의 통찰과 조언을 린저 특유의 부드러운 직설로 풀어낸 에세이집이다. 

어떤 책을 알기 전과 후가 달라진다면 내게는 이 책이 그랬다. 차갑지 않고 오히려 따듯한 편에 속하지만 그에 걸맞는 아량까지는 갖추지 못한 내게 이 책은 엄정한 멘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올해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가까이 지내면 좋을 책.  

 

 

알라딘을 몰랐다면 그냥 지나쳤을 책. 그리고 한번 더 읽지 않았다면 그냥 갸웃거리고 말았을 소설. 처음의 낯설음 만큼 내가 참 멀리 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작품이다.  

사람이 사람을 가식과 편견 없이 어떻게 만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가에 관하여, 이 험상궂은 세계 안에서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에 관하여, 시종일관 투명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묻고 일러준다. 

 

 

 

   

어려운 그와 눈을 마주치며 소근소근 이야기하고 난 느낌이다. 나는 그를 좋아해서 그가 어렵고 그는 쉬이 곁을 내어주지 않아 헤매곤 했는데 나 이런 사람이오, 빤히 응시하며 손을 내미는 그에게 약간의 실망을 동반하여 더욱 불어난 애정이 급쓰나미로 몰려오는 감정을 체험했다.  

윤대녕 그는 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느껴야 하는 사람이고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를 미련하게 사랑하는 독자로 남고 싶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권할 수 있는 서평집. 이 책을 권하고 이 책 속의 책들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그 책들과 어우러진 저자의 이력 또한 권할만 하다. 사람은 열 번 된다는 말. 하지만 거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 책이다.  

더불어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저열하지 않은 성실하고 균형잡힌 서평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지금껏 유례없는 완벽히 인간적인 히로인을 구현해냈으니 그녀의 이름은 올리브 키터리지. 일견 호오와 시비가 분명해 보이지만 타고난 인정 탓에 기어이 동요할 수 밖에 없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을 통해 세상의 어머니들과 엄마로서의 나. 그리고 본래 여자로서의 어머니들과 여자로서의 나. 그들의 겉과 속, 안과 밖을 세밀하게 들여다 본 느낌이다. 외롭고 강하고 슬프고 따듯한 거의 모든 마음에 관한 소설. 

  

 

로망 롤랑은 장 크리스토프라는 한 위대한 인간의 영혼의 역사를 장중한 교향곡으로 그려냈다. 휘몰아칠듯 가쁘고 눈부신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독창적인 예술혼과 조우하게 된다.  

사춘기 시절에 한 권짜리 단행본으로 만났던 장 크리스토프는 압축과 생략에도 불구하고 긴 여운을 남겼는데 다섯 권의 대하소설로 재회하니 묵직한 감격이 새롭다. 내 인생 열 권의 책을 꼽으라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작품이다.

다만 이 범우사판은 오역과 오타가 잦은 것이 흠. 말끔히 수정보완된 새로운 판본으로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올해 나는 영달이라는 귀한 선물을 얻었고 영달이는 뽀로로라는 귀여운 친구를 사귀었다. 이 책은 뽀로로 그림책 시리즈 중에서도 영달이가 매일매일 집중해서 보고 있는 책. 아기 공룡 크롱이 원숭이 인형과 함께 꿈 속 인형나라를 구경한다는 이야기. 실제로 아기들도 어른들처럼 꿈을 꾼단다.

뽀로로 그림책 시리즈는 화질이 선명해서 눈에 잘 들어오고 전하려는 메시지 또한 분명하고 유익하다. 책도 보고 노래도 따라부르다 보면 엄마인 나도 뽀로로와 친구들의 다양한 개성과 즐거운 우정에 저절로 미소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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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2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의 그림자 좋았어요!

올해 나는 영달이라는 귀한 선물을 얻었고, 에서 저는 저의 조카가 떠올라서 슬쩍 웃었어요.
그런 해였어요, 올해는.
:)

깐따삐야 2010-12-23 10:10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올라온 리뷰를 보고 고른 책인데 참 좋았어요. 얼마 전 다락방님 서재에서 <나의 미카엘>을 보았고 조만간 제대로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올해 다락방님이 이모가 되셨죠. 아, 언니도 여동생도 없는 저는 결코 들을 수 없는 다정한 호칭이에요. 이모!

2010-12-25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5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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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대에는 보다 성숙한 이십대를 기대했고 이십대엔 날로 능란해지는 삼십대를 기다렸다. 삼십대엔 좀 더 안정된 사십대를 준비하고 사십대엔... 아직 모르겠지만 내 바람을 비껴간 세월을 상기하면서 더 이상 기대나 소망 같은 것은 싸그리 거두게 될까. 아마 그리 되지는 않고 또 무언가 바라거나 계획하다가는 곧 망연자실해지겠지. 올리브 아줌마는 슝슝 구멍난 치즈 같은 노년이지만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절로 외치게 되는 브라보.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엄마한테 끊임없는 지청구를 듣고 살지만 올리브 아줌마도 내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넌 네가 아직도 사춘기 소녀인 줄 아나 보지. 정신 차리라구. 영달이 엄마.   

  이 책을 읽으면서 곧 죽어도 큰소리에,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올리브 아줌마는 어쩜 그리 우리 엄마랑 비슷한지 두 분을 만나게 하면 둘도 없는 절친이 되거나 서로의 발톱을 알아보곤 무애무덕하게 거리 두고 지내거나. 몹시도 신랄하고 얄짤없지만 인정도 철철 넘치는 두 여인을 약간의 두려움과 짜증스러움은 차치하고라도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 했다. 나는 삶을 혁명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역시 최고의 연사인 우리 엄마에게 딱히 바칠 것은 없고 잘 사는 모습이나 뵈드리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올리브 아줌마라면 아마 동의해 주실 거라고, 소심한 결론을 보았다.     

  조금 늦게 만난 책이지만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좋은 책이 맞다. 퓰리처상 수상작답게 미국적이지만 그 안에 뭉근하게 반짝이는 보편적 진실이 숨어 있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줄거리랄 것도 없고 올리브 키터리지와 남편 헨리, 아들 크리스토퍼, 그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마을 사람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엮은 소설인데 그 소소한 일상 안에 그 동안 지나쳤거나, 앞으로도 지나치기 쉽상인, 삶의 아차하는 순간과 감정이 오롯하게, 하지만 딱히 도드라지지도 않게, 마치 꼭 찾아야 했던 퍼즐조각처럼 담겨 있다. 이렇듯 흥미로운 구성과 산뜻한 기지는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거라 작가의 다음 소설을 자연히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과연 더 나올 것이 있을까, 의구심을 동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독자도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지라 먼 나라 올리브 아줌마의 삶에 내 나중 삶을 중첩시키며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살다보면 남편이 새로운 사랑에 흔들릴 수도 있고 머리 굵어진 영달이가 웬 건방진 녀석을 남자친구라고 소개하거나 히스테릭하게 늙어가는 내게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할 수도 있겠지. 그러다 남편이 먼저 쓰러지거나 내가 혹 치매에 걸려 사랑하는 영달이에게 이 아가씨는 누구실까, 이런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슝슝 구멍난 치즈 같아진 내가 그때 가서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면 올리브 아줌마처럼 씩씩하게 남은 삶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영달이 엄마. 오늘이나 당장 잘 보내라구. 인생이 항상 착한 손님만 들여보내주는 건 아니라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 무섭지만 바른 말 잘하는 올리브 아줌마가 내게 충고하고 있다. 그렇죠. 맞아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들 뒤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올리브는 때로 이 모든 일 속에서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던 때가 있었던 걸 기억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해 전, 충치를 때우면서 치과 의사가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돌리는데,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것이 마치 죽도록 깊은 친절인 것처럼 느껴져 올리브는 샘솟는 눈물을 숨죽이며 삼킨 적이 있었다. ("키터리지 부인, 괜찮으세요?" 치과 의사는 물었다.) - p.403 

  어젯밤 이 부분을 읽다가 왈칵할 뻔 했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힘이 들 때, 힘 든 것이 지나가고 문득 삶이 무상할 때, 올리브 키터리지 아줌마를 생각할 것 같다. 엄마가 무섭거나 짜증스럽게 느껴질 때 엄마 안의 올리브 아줌마를 떠올리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다. 엉켰다 풀렸다 하는 겨울날, 따숩고 한결같은 책을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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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1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이 인용해주신 부분을 읽는데, 저도 제 기억이 떠올랐어요. 턱이 아파서 치과를 갔었는데, 그때 치과 닥터가 신경성이라고 말하면서 '요즘 뭐 힘들어요?' 라고 묻는데 정말 왈칵, 하더라구요. 그때 되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전 그 닥터를 그날 처음보는데도 불구하고, 네, 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막 늘어놨어요. 누군가 들어줄 상대가 있다는게 갑자기 어떤 구원처럼 여겨져셔요. 올리브가 느낀것 처럼 닥터가 내게 그렇게 물어준게 '죽도록 깊은 친절' 혹은 죽도록 깊은 관심 같았어요.

추천하기에 망설임 없는 책이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깐따삐야 2010-12-17 14: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됐어요. 추천해주시는 대개의 책들이 다 재미있어요. 내 커피 취향을 아는 던킨도너츠 점원에 대한 부분 역시.^^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그가 특별히 친절했다기 보다는 그간의 모진 외로움 탓에 사소한 한 마디가 죽도록 깊은 친절로 다가와 와르르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느낌. 나중에 누군가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제 앞에서 털어놓았을 때 내가 엄청 믿을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척 외로웠다는 것도 알 수 있었죠. 서로 그러면서 사는가 봐요. 어딘가엔 환자를 앉혀놓고 신세 한탄하는 의사도 있을 것 같아요.
 

  주말에 근처 도시의 별천지스러운 백화점에 다녀왔고 상품권으로 사온 초밥이 맛없다고 툴툴거리며 약간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야만 했다. 자꾸 가면 홀라당 홀리지 싶어 발길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원이 말했던 거액의 장난감이 인터넷몰에서 거의 반값이라는 것을 발견하곤 바가지 안 쓴 것에 대해 깊은 안도. 좀더 머물렀으면 백화점의 휘황찬란한 위력에 나도 모르게 소비괴물로 둔갑했을 것 같다.   

  나의 첫 발령지이자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에서는 싸이코 패스 운운했고 인정 어린 추억이 많았던 나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말을 잃었다. 간만에 메신저에 접속해 그때 그 아이들이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나 둘러보았다. 사랑에 눈멀어 여자친구 사진으로 온통 도배를 해놓은 아이들의 미니홈피를 보며 그 또래 너희에게 그녀와의 이별이 아닌 다음에야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슴 한켠이 서늘해왔다. 

  그리고 알라딘에서 물만두님의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 물만두님의 백문백답을 읽고 마음 짠했던 기억이 있고 활발히 올라오는 추리소설 리뷰에 감탄한 적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소통하거나 교류할 기회는 없었다. 그저 만두님이 꼬박꼬박 건네시는 새해인사만 반갑게 받아챙겼던 것 같다. 건강이 안 좋으시지만 언젠간 괜찮아지실 것이고 더 나중엔 한번쯤 직접 뵐 날도 오지 않을까. 알라딘이 알라디너들에게 그런 좋은 날 한번 안 만들어주겠어. 그처럼 막연하기 짝이 없고 할랑하기 그지없는 공상 속에 물만두님이 있었다. 그 점이 지금에 와서야 아쉽고 죄송하다. 오늘 접속해 보니 알라딘에서 반가운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 캄캄했던 마음에 반짝, 등이 켜진 느낌이다.   

  뽀로로 블록으로 알록달록 담을 쌓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과 첫 발령지와 물만두님이 계신 이곳.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나. 그 사이에도 알록달록 담이 있었나 보다. 나는 상이한 모든 곳에 머물렀지만 전혀 머무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보이지 않는 담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오늘은 그 점이 무척이나 유감스럽다. 중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잃어선 안 되고 잃고 싶지도 않았던 것을 나는 이제 바늘 같은 계기를 통해 되새겨야만 그나마 잠시잠깐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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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12-1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이가 속되다고...투덜투덜..

깐따삐야 2010-12-16 09:45   좋아요 0 | URL
제가 저 자신과 지인들에게 건넸던 '안녕'이라는 인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나를 생각하고 부끄러웠어요.
메피님, 건강하셔요. 여기서 오래오래 뵈어요.

비로그인 2010-12-15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가 더할 나위 없이 형이하학적이며 소비지향적이고 황금만능주의에 물질만능주의로 무장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두달 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자신의 그림자가 너무 아슬해 보이더이다.
전 안녕히, 라는 인사도 못하겠어요. 그저 아무 말 없이 생각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무런 조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깐따삐야 2010-12-16 10:00   좋아요 0 | URL
여력이 안 되어서 항상 그렇지 못할 뿐 돈 쓰는 재미가 참 쏠쏠하죠. 그런데 백화점에 가면 백화점을 아주 그냥 통째로 갖고 싶다가도 주차장의 지하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탈출'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계속 머물다간 지갑은 물론 혼까지 털릴 것 같아 서둘러 빠져나오곤 한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Jude님의 마음도 알 것 같아요. 건강하세요. Jude님. 우리는 아마도 동갑인데 여기서 오래오래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