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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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대에는 보다 성숙한 이십대를 기대했고 이십대엔 날로 능란해지는 삼십대를 기다렸다. 삼십대엔 좀 더 안정된 사십대를 준비하고 사십대엔... 아직 모르겠지만 내 바람을 비껴간 세월을 상기하면서 더 이상 기대나 소망 같은 것은 싸그리 거두게 될까. 아마 그리 되지는 않고 또 무언가 바라거나 계획하다가는 곧 망연자실해지겠지. 올리브 아줌마는 슝슝 구멍난 치즈 같은 노년이지만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절로 외치게 되는 브라보.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엄마한테 끊임없는 지청구를 듣고 살지만 올리브 아줌마도 내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넌 네가 아직도 사춘기 소녀인 줄 아나 보지. 정신 차리라구. 영달이 엄마.   

  이 책을 읽으면서 곧 죽어도 큰소리에,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올리브 아줌마는 어쩜 그리 우리 엄마랑 비슷한지 두 분을 만나게 하면 둘도 없는 절친이 되거나 서로의 발톱을 알아보곤 무애무덕하게 거리 두고 지내거나. 몹시도 신랄하고 얄짤없지만 인정도 철철 넘치는 두 여인을 약간의 두려움과 짜증스러움은 차치하고라도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 했다. 나는 삶을 혁명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역시 최고의 연사인 우리 엄마에게 딱히 바칠 것은 없고 잘 사는 모습이나 뵈드리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올리브 아줌마라면 아마 동의해 주실 거라고, 소심한 결론을 보았다.     

  조금 늦게 만난 책이지만 입소문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좋은 책이 맞다. 퓰리처상 수상작답게 미국적이지만 그 안에 뭉근하게 반짝이는 보편적 진실이 숨어 있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줄거리랄 것도 없고 올리브 키터리지와 남편 헨리, 아들 크리스토퍼, 그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마을 사람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엮은 소설인데 그 소소한 일상 안에 그 동안 지나쳤거나, 앞으로도 지나치기 쉽상인, 삶의 아차하는 순간과 감정이 오롯하게, 하지만 딱히 도드라지지도 않게, 마치 꼭 찾아야 했던 퍼즐조각처럼 담겨 있다. 이렇듯 흥미로운 구성과 산뜻한 기지는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거라 작가의 다음 소설을 자연히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과연 더 나올 것이 있을까, 의구심을 동반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독자도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지라 먼 나라 올리브 아줌마의 삶에 내 나중 삶을 중첩시키며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살다보면 남편이 새로운 사랑에 흔들릴 수도 있고 머리 굵어진 영달이가 웬 건방진 녀석을 남자친구라고 소개하거나 히스테릭하게 늙어가는 내게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할 수도 있겠지. 그러다 남편이 먼저 쓰러지거나 내가 혹 치매에 걸려 사랑하는 영달이에게 이 아가씨는 누구실까, 이런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슝슝 구멍난 치즈 같아진 내가 그때 가서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된다면 올리브 아줌마처럼 씩씩하게 남은 삶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영달이 엄마. 오늘이나 당장 잘 보내라구. 인생이 항상 착한 손님만 들여보내주는 건 아니라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 무섭지만 바른 말 잘하는 올리브 아줌마가 내게 충고하고 있다. 그렇죠. 맞아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들 뒤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올리브는 때로 이 모든 일 속에서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던 때가 있었던 걸 기억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몇 해 전, 충치를 때우면서 치과 의사가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돌리는데,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것이 마치 죽도록 깊은 친절인 것처럼 느껴져 올리브는 샘솟는 눈물을 숨죽이며 삼킨 적이 있었다. ("키터리지 부인, 괜찮으세요?" 치과 의사는 물었다.) - p.403 

  어젯밤 이 부분을 읽다가 왈칵할 뻔 했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힘이 들 때, 힘 든 것이 지나가고 문득 삶이 무상할 때, 올리브 키터리지 아줌마를 생각할 것 같다. 엄마가 무섭거나 짜증스럽게 느껴질 때 엄마 안의 올리브 아줌마를 떠올리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다. 엉켰다 풀렸다 하는 겨울날, 따숩고 한결같은 책을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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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2-1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이 인용해주신 부분을 읽는데, 저도 제 기억이 떠올랐어요. 턱이 아파서 치과를 갔었는데, 그때 치과 닥터가 신경성이라고 말하면서 '요즘 뭐 힘들어요?' 라고 묻는데 정말 왈칵, 하더라구요. 그때 되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전 그 닥터를 그날 처음보는데도 불구하고, 네, 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막 늘어놨어요. 누군가 들어줄 상대가 있다는게 갑자기 어떤 구원처럼 여겨져셔요. 올리브가 느낀것 처럼 닥터가 내게 그렇게 물어준게 '죽도록 깊은 친절' 혹은 죽도록 깊은 관심 같았어요.

추천하기에 망설임 없는 책이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깐따삐야 2010-12-17 14: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덕분에 좋은 책을 알게 됐어요. 추천해주시는 대개의 책들이 다 재미있어요. 내 커피 취향을 아는 던킨도너츠 점원에 대한 부분 역시.^^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그가 특별히 친절했다기 보다는 그간의 모진 외로움 탓에 사소한 한 마디가 죽도록 깊은 친절로 다가와 와르르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느낌. 나중에 누군가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제 앞에서 털어놓았을 때 내가 엄청 믿을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척 외로웠다는 것도 알 수 있었죠. 서로 그러면서 사는가 봐요. 어딘가엔 환자를 앉혀놓고 신세 한탄하는 의사도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