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10월이다.
작년 이 무렵엔 무척 바빴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고교 입시와 나의 대학원 입시가 겹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올해 10월은 아, 가을이구나... 하는 계절감을 여유롭게 느끼고 있다.
만만찮은 과제와 논문에 대한 부담이 없지 않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요즘만 같다면 싶을 정도로 삶에 무리가 없고 일상은 순조롭다.

어쩌면 나는 이 상태를 가능한 한 오래도록 유예시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유기농 청년은 한결같이 내게 공을 들이는 중인데 나는 그에게 아직 사랑한다, 또는 그 비슷한 말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했고 그 때문에 잠깐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상실의 시대>의 레이코가 와타나베에게 썼던 편지 구절처럼,
'날씨가 좋은 날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를 띄우고, 호수도 아름답지만 하늘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요.'라고 자위했다.
물론 이런 건 본래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내 안에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내가 있었던 걸까.

나는 누구든 아직은 yes도 no도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쩌면 누구든 no라고 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음 먹고 선택하기에 따라 여유롭게 안착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종종 내 가슴이 뛰는 걸 스스로도 느끼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의 공명음이 더 크게 울린다.
지금으로썬 혼자 지내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공부가 재미있다.
결혼에 대한 부담 없이 가끔 데이트나 하며 평생 싱글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한때는 참하고 똑똑하고 직업 좋고... 그러한 주변의 세속적인 미사여구에 탄력 받아 마구잡이로 오만해진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혼자서 꿋꿋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대차거나 당차지도 못하고,
웅대한 야망보다는 평균적 삶에 더 매력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나 스스로 잘 안다.

다만, 그냥 지금이 좋다.
상대가 들으면 맥 빠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좋다는데, 행복하다는데,
그것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아량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수용할 수 있는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예전에는 사랑은 미궁 같고 연애는 퍼즐 같았다.
그럼에도 근원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어두운 미궁을 헤치고 복잡한 퍼즐을 꾀어맞추게끔 만들었다.
몰입과 권태의 반복이 롤러코스터와도 같았고 그 소소한 과정이야 어떠했든 나름 즐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마치 담배 연기 폴폴 피워 올리는 능청스런 노파가 된 것 같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믿을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을 땐 사랑과 믿음으로 한량없이 충만하더니,
사랑이란 게 대충 이런 건 아닐까 감이 오기 시작하고 누가 봐도 올인해도 좋을만한 때가 되니,
그 많던 사랑과 믿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대로 그저 아무것도 모를 때 눈에 뭐가 확 씌이던가, 주변의 힘에 대충 떠밀려서 저질렀어야 하는가 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스스로 선택해 놓고 징징거리는 것인데,
그것은 뼈저린 후회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심약하기 짝이 없는 내 천성을 극복해가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모토이기도 한데,
가끔은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징징대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닌가 싶은 다소 서글픈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알량한 자존심인지, 아니면 빡빡하게 타고난 성품 탓인지, 어차피 그게 그거인지.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삶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님도, 연인도 없는 오직 나만의 방에서 커피 마시고 공부하는 그런 삶.
중심이 모호한, 부유하는 듯한 지금...
이 유예의 시간을 오래 지속하더라도 부디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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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1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제가 후회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 보다는,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던 경우들이었어요. 유에의 시간, 하니 생각났지만 깐따삐야 님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을 분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깐따삐야 2007-10-22 12:26   좋아요 0 | URL
Jude님, 아마 제가 약하기 때문일 거에요. 용기가 있다면 이러지 않을텐데 말이죠. 저는 때때로 저 자신과 상대방을 너무도 지치게 만들곤 해요.

2007-10-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2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3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0-1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의 '부유하는 정신', 괜찮지요.


깐따삐야 2007-10-22 12:31   좋아요 0 | URL
Hansa님, 크게 보면 그렇지만, 저의 겁 많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상대방까지 미궁에 빠뜨린다는건 참 미안할 노릇이지요.

2007-10-19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2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개강을 했고,
아직은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캠퍼스에도 가을빛이 들기 시작했다.
긴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착착 쌓아올린 책더미에 넋을 놓아버린 수강생들을 향해,
얼마 안 됩니다...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 교수님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휴게실에 모이는 학부생들은 주로 다가오는 임용고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열람실에선 1학기에 비해 사뭇 더 뜨거워진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교사가 아니라 다시 학생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지난 학기에 같은 수업을 들었던 오 선생님은 여전히 둘째 만들기 프로젝트에 여념이 없으셨고,
여름 동안 조금 헬쓱해진 H양은 교수님과 상의해 본 결과,
원하는 방향으로 논문주제를 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개설되었던 지도교수님의 강의 하나가 신청 인원 부족으로 폐강되었고,
교수님은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새 강의를 개설하셔야 했다.
광고 하나 하겠다며 어렵게 말문을 떼시는데,
저 분 성품에 오늘 저 이야길 하려고 밤새 고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까지 아팠다.
갑자기 넓어진 나의 오지랖은 손을 번쩍 들게 만들었고,
다른 강의를 신청했던 몇몇 지인들까지 부리나케 끌어모았다. 
하기사 디지털 시대의 학부생들을 놓고 셰익스피어 강독, 이라니 어쩌면 시대착오적일지 모르겠다.
요즘 애들이야 시험에 출제될 것만 콕콕 찝어줘야 좋아들 하니까 말이다. 
원래 개설했던 강의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널널하기 짝이 없는 내용으로 트랜스폼 했지만,
전처럼 성실한 강의를 하실 것이라 믿는다.
 
매사를 항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야겠지만 뭔가 마음대로 안 되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도, 논문도, 강의도 원하는 대로 된다면 좋을텐데.
마누라 비위 맞추랴,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으랴, 요즘 우리나라 남자들 참 불쌍하다는 오 선생님의 이야기에도 공감했고,
학부에서도 문학을 전공한 H는 관심도 없었던 교재론으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해서 안타까움을 샀다.
다소 시니컬한 뉘앙스를 품고 있는데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을 '부부'라고들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좋으나, 싫으나 함께 가야 한다고.
우리 지도교수님처럼 별다른 터치 없이 대학원에 왔으면 공부에 매진하라는 분도 있지만,
연구실 근무를 할 때는 항상 정장만 입을 것을 고집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교수님도 있다.
그래도 깊숙이 들어가보면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만도 아니고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H는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보고 배우는 게 많을테지만,
우리의 수줍고 섬세한 교수님은 때때로 혼자 다른 세계에 침잠해 계신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적극적으로 똑똑, 노크하지 않는 한 그 곳에 얼마든지 머물러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어떤 남자를 꾸준히 만나고 있다.
원래 한꺼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못하는 내가,
학업과 연애를 균형감 있게 병행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의 배려를 믿고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그는 내게 빨간 우산을 건넸던 그 사람도 아니고,
맛있는 것을 사주러 오겠다던 그 남자도 아니다.
인연은 정말 무심결에 우연히 찾아온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만한 허우대를 갖고도 내 앞에선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순박한 유기농 청년 같은 그 남자를,
내치기 힘들었고 놓치기 싫었는데, 그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더 두고 볼 일.
중요한 건,
어느 하나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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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7-09-10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박한 유기농청년!!표현 넘 신선해요~~~~.^^
화이팅!!!

Mephistopheles 2007-09-1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야흐로 가슴을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 싶어하실 깐띠삐야표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건가요..^^

조선인 2007-09-11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박한 유기농 청년이라니, 잡으십시오!!!

BRINY 2007-09-11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업과 연애 병행~ 대학생 시절을 다시 사는 셈이네요. 와!와!

비로그인 2007-09-1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연은 정말 무심결에 우연히 찾아온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만한 허우대를 갖고도 내 앞에선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순박한 유기농 청년 같은 그 남자를,
...

오.. 하하
추천합니다.


비로그인 2007-09-1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보이시는 사이에 이런 훈훈한 소식이... ^^
부러워요!

부리 2007-09-1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기농청년같다는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앞에 읽은 건 다 까먹어버리고 뒤의 연애담만 눈에 들어오네요^^ 반갑습니다.

깐따삐야 2007-09-1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그러게요. 지금까진 참 신선했는데 더 두고봐야겠지요.

메피스토님, 비우는 그 순간 비로소 채워지는 게 가슴인가 봐요.^^

조선인님, 제가 벌레는 손바닥으로 턱턱~ 쳐서 잘 잡는데 남자 잡는데엔 영 서툴러요. ㅋ

BRINY님, 좋게 보면 정말 그런 셈이지만 부담감 또한 만만찮아요.

한사님, 남녀간의 인연은 참 묘한 것 같아요.

체셔고양이님, 항상 따듯한 연애무드인 체셔님의 마인드가 저는 더 부럽습니다.

부리님, 오랜만이에요. 어쩔 땐 연애란 게 당사자들보다도 주변 사람들을 더 들뜨고 즐겁게 하는 것 같아요.^^
 

학원도 종강을 했고 어제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얼굴이 그을리고 머리가 많이 자란 선배는,
도를 아십니까, 하고 우리에게 다가오곤 했던 여자들에게나 딱 걸려들법한,
군데군데 틈새가 많이 보이는, 현실감 없는 외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건너편에서 선배를 보자마자 마치 학생 때처럼,
선배~ 하고 손을 막 흔들었다.
웃을 때 눈이 잘 안 보이는 선배는 쑥스럽게 미소 지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호들갑스럽게 반가움을 표현했다.

대개는 만나면 순대나 곱창에 소주였는데,
어제는 지하에 있는 호프집에서 소세지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실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안주는 수제소세지다.
가장 별로라 하는 건 과일안주.
어쨌든 홀가분한 기분과 문득 선선해진 밤공기 때문인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는 시원하고 노곤했다.

잊고 지냈던 지인들의 소식과 함께 서로의 일상을 주고받았다.
스무살 때 처음 보았던 스물두살의 선배는 한참 위의 어른 같았는데...
스물여덟과 서른이란, 어느새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그런가.
나는 언젠가부터 선배님의 '님'자를 나도 모르게 떼어먹고 있었다.
이제 알거 다 안다는 식의 내 어투가 나조차 거북했는데,
원래 말수가 적고 생각이 많던 선배는 편안히 대화를 이끌었다.

화제가 연애로 옮겨지자,
전부를 다 드러낼 수도, 그렇다고 한번 꺼내면 쉬이 멎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선배의 상대는 솔직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소년처럼 미숙한 거리 조절 능력에,
아마도 태생적인 방랑벽을 못 버린 것 같았다.
힘들어서 헤어졌지만 끝나고 나서도 끝났는가, 확신할 때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나처럼 관계를 단칼에 베어버린 후 마음을 안으로 꽁꽁 쥐어잡는 사람도 미련이 남아 몸부림칠 때가 있는데,
선배는 오죽했을까 싶었다.
선배에겐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얼핏 온순하고 심약한 남자들의 특성이기도 한데,
술 마시면 전화하는... 아마 그녀에게도 그랬으리라.
백해무익한 일이지만 말려도 소용없는 일.

살짝 다운되어 보이는 선배를 향해,
나는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 의 노래가사처럼
적절히 과장과 위트를 섞어 몇 건의 소개팅 스토리를 이야기 했지만...
정작 내 마음을 칼날처럼 훑고 지나갔던 누군가와,
요즘 딱딱히 겁먹고 있는 내 마음을 향해 성실히 괭이질을 해대고 있는 남자에 대해선 침묵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 신중하자는 태도였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땐 문득 선배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넌 참 실속이 있어."
선배가 그 말을 했을 때,
재테크에도 까막눈이고, 운전면허증은 오직 신분증 대용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런 뜻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실속 없는 맹추인지를 굳이 까발리고 싶지도 않은 게 진심이었다.
선배는 아마 여전히 야무지고 옹골찬 내 모습에 안심했을 것이다.

아무리 거하게 차려놓은 진수성찬이라도,
구미가 당기지 않으면 목 마를 때 물 한잔만도 못하듯,
가슴을 움직이지 못하는 만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며...
여전히 우리가 철이 덜 든 건 아닌가, 의심해가며 멋쩍게 웃었다.
다양한 노하우를 축적하는 대신 이렇게 계속 정공법만 고수해도 좋은가, 자문해가며.

이제 개강이 머지 않았고 여름이 가고 있다.
빳빳하게 펄럭이는 빨래처럼 상쾌한 가을을 즐기고 싶다.
두려움 반, 의심 반으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화창한 햇볕 아래 내어놓을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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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30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헛 깐따삐야님은 독일식 으로 맥주를 드시는군요...
맥주의 목넘김처럼 사랑도 시원하면 뭔 고민을 하겠냐마는..
때론 50도를 넘는 화주같은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사랑이란 걸 하는 걸지도
모른다죠..^^ 혹시 선배가 앞에 "나보단"을 생략한 건 아닐까요.? ^^

깐따삐야 2007-08-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래서 돌아오는 가을엔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채울까 생각 중입니다.^^;

라로 2007-08-3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마시며 전화하는 남자는,,,,마음 둘곳이 없어서 그런것 같아요,,,에혀
그 맘을 알면서 모른체 하시기 힘들죠???뭔말인지 저두 몰라욥~.>.<

깐따삐야 2007-08-3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bi님,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습관이라서 받아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죠. 술 마신 자, 곱게 잠들어야 할지니...ㅡㅡ;
 
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 황금부엉이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중학교 시절, 어느 행사에 가서 오정희 선생님을 실제로 뵌 적이 있다.
단아한 체구에 검고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는데 소설가라기보단 엄마 같고, 큰이모 같은 느낌이 났다.
춘천에 살고 계신다 했는데, 재작년인가 들렀던 춘천은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이었다.
단순한 우연인지 젊은이들이 잘 눈에 띄지 않았고,
일본 교토의 거리에서나 종종 마주칠 법한 자그맣고도 깔끔한 노인들이 알듯말듯한 표정을 한 채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닭갈비에는 떡과 함께 우동사리가 곁들여 나왔고,
한여름이라 전력량 초과였는지 때때로 에어컨이 꺼지고 스크린이 꺼지는대도, 다들 무심한 표정들로 일관했다.
아무런 놀라운 일도 없을 법한 인상을 주는 도시, 원하기만 하면 비밀스럽게 은둔하기 좋을 것 같은 도시였다.
그 곳에서 오정희 선생님은 밥 짓고, 글 쓰고,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지금껏 살아오고 계신다.

마음이 산란할 때면 내가 무심코 집어드는 책들은 대개 이미 세상에 없거나, 아니면 연로한 작가들의 것이다.
대청마루에 나와 앉아 시원한 수정과 앞에 놓고, 현자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듯,
아늑하면서도 나를 몽땅 드러내 보이며 기대고 싶은, 편안한 기분을 동시에 느낀다.
이 책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한 수 크게 배우고 난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그 나이를 이미 지난 사람들은 '희망과 가능성으로 푸르디푸른 아름다움'이라 의심 없이 말하지만 삶의 실체는 잡히지 않는 채로 점차 생활인, 사회인으로서의 책무,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하는 안팎의 요구에 시달리는 20대의 생과 사랑은 얼마나 외로운가. - pp. 36-37
항상 내 나이를 사랑하며 살길 바라지만 너무 가까이 있다보면 그 실체와 소중함을 잘 모르듯 나 또한 나의 이 징글맞은 20대가 어서 지나가기를,
어서 어서 늙어서 야생화처럼 들끓는 열정보단 마음에 한 두 송이의 곰팡이꽃이 피어나기를, 하고 바라곤 한다.
육신을 보면서는 세월이 비껴가기를 원하고 마음은 공자님이 되길 원하니, 엄마 말씀을 빌리자면 '욕심이 땅두께 같다'.

조리대와 나란히 놓인 책상에서 글을 쓰면서 밥짓기와 글쓰기가 결코 생각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 문학이라든가 창조적 생활이란 저 멀리서 나부끼는 깃발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발 딛고 있는 자리를 굳건한 터전 삼아 발아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 p. 87
내가 항상 겁을 냈던 것 중의 하나는,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상황에 내 자신이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완벽한 몰두, 그렇지 않으면 無를 택하는 외곬 기질이 두려웠다. 
쓰잘데기 없는 고집과 자의식 포화 상태를 오갔던 결과는 항상 '현재상태 불만족'이라는 불온한 경고등이었다.  
칭얼대는 듯 하면서도 이룰 건 다 이룬다고 나보고 괜한 엄살쟁이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지만,
인용한 글처럼 저 멀리서 나부끼는 깃발만 쳐다보느라 발 딛고 서 있는 자리에 좀비처럼 떠다니는 기분도 과히 좋지만은 않다.
생활과 실존와 이상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그것의 일치와 조화가 곧 생활이고 실존이고 이상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절, 호감을 갖고 몇 차례 만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우유를, 그것도 따끈하게 데운 것으로만 마셨다. 나는 그것이 의아했고 그는 내가 커피만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 왜 몸에 나쁜 커피를 마시는가 하고 못마땅해했다. 결국 그와는 곧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커피만 마셔대는 여자의 퇴폐성, 불건강함이 싫었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의 고정관념으로 우유만 마시는 남자의 유아성이나 생활성, 동물적인 건강성이 싫었던 것일 게다. - p. 92
이 구절을 읽다가 쿡쿡, 웃음이 났다.
요즘 유리볼이며 도시락이 증정품으로 붙어 있는 인스턴트 봉지 커피를 열렬히 마셔대는 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로 달고, 뜨겁고, 진한 커피는 건강 상의 이유로 우유만 마셔대는 심심한 남자보다 훨씬 더 큰 위안과 기쁨을 준다.
전에 한방차 류의 건강차를 유독 즐겨마시는 사람과 알고 지낸 적이 있었는데, 곁에만 가면 탕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아(실제로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지한 표정까지 우스웠던 기억이 있다.
우유 한 컵 하시겠어요? 탕약 한 사발 어떠세요?
아, 완전 깬다.

"엄마, 바람이 불어. 바람이 무서워. 바람은 어디서 살지..."
오정희 선생님은 유치원에 다녔던 아이의 말에서 영감을 얻어 <바람의 넋>을 썼단다.
보이지 않는 것, 잡을 수 없는 것, 하지만 분명히 있는 것.
그러한 것들에 넋을 불어넣는 일.
그럼으로써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애정으로 바꾸는 일이 곧 글 쓰는 일, 창조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행복한 삶이라는 말보다 충만한 삶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그 충만함이 문학을 통해서 이루어지길 바랐습니다. 제가 가지 않은 어떠한 다른 길에 대한 선망도 동경도 없었고 능력조차도 없었다는 것은 드문 축복인 것 같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언제나 자신이 가장 큰 적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작은 성취에 연연해했으며 오랜 시간을 두고 해나가야 하는 일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는 작은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소심함이나 문학에 대한 외경심이 너무 큰 데서 오는 상대적인 자신의 왜소함에 너무 예민했던 점 등이 그것이지요. - p. 173
나는 작가도 아니면서, 위의 구절에 완벽하게 공감했다.
오정희 선생님은 원고지에서 줄 바꾸기를 잘 안 하는 작가로 한때 유명했단다.
실제로 작가 본인이 직접 밝히기도 했는데, 원고지의 여백을 보면 성실히 써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비교적 다작은 아니지만 조경란이나 윤성희 등, 젊은 여류작가들이 글쓰기의 모범으로 삼고 있듯 꼼꼼하고도 유려한 문체는 다 저러한 각고의 성실성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보다.

나는 최소한 30센티미터짜리 자를 가지고 다니며 상대방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할 만큼 사람 사이의 거리 조절에 자신이 없었다. 다정도 병인 것이어서 그렇게 분수없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사이의 정을 중히 여기면서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덤비는 기질 때문에 종종 피차 상처를 입거나 낭패를 겪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 p. 232
평론가 김병익 선생님을 회상하며 쓴 글의 일부인데 흡사 내 이야길 하는 줄 알았다.
겉으론 그렇게 차돌맹이처럼 당차고 야무져 보이셨는데... 하다가,
나도 겉모습은 남들이 오해하기 딱 좋게 생겼다는 생각에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는 식상한 결론.  
그런데 30센티는 너무 짧지 않은가.

황혼에 접어드는 노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역시 인생사 거저 얻는 것이 없다, 란 생각이 든다.
스타일에 살고 스타일에 죽는다는 듯 오로지 포즈 잡기에만 연연하는 요즘 세태를 향해,
낮지만 곧은 목소리로 보다 겸손해질 것을, 세상을 좀더 넓게 볼 것을 타이르는 듯 하다.
책의 힘이 의심스럽다가도 이렇듯 부피감 있는 책을 읽고나면 역시 또 다시 훌륭한 작가, 좋은 책의 위력을 믿게 된다.
변덕스런 계절 속에서 이렇듯 한결같은 목소리를 만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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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08-1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에게도 필요한 책인 거 같아요.

깐따삐야 2007-08-10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와닿는 구절이 많은데 모두 옮겨놓을 수가 없어 아쉬웠어요.^^
 

항상 왠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는 걸 즐기는 나는 요즘 같은 날씨가 참 난감하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중간 즈음부터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버스를 기다리기도 뭐하고 택시를 타기도 뭐해 그냥 청바지 밑단을 홀딱 적신 채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면허가 있지만, 나의 앙증맞은 마티즈는 시동이 걸리는 그 순간부터 완전 트랜스포머다.
도로에만 나가면 주변의 모든 차들을 긴장시키며 살상무기로 화하는!
아빠는 내가 모는 차는 절대 함께 타지 않겠다고 선포하시기에 이르렀고,
한 마디로 핸들만 잡으면 겁대가리 없어지는 나를 우려하여 그냥 넌 평생 B&W (Bus and Walk)나 이용하라신다.
나는 운전하는 게 때로 재미있고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는 일은 더 즐겁다.
관광버스와 충돌할 뻔 했을 땐 가슴이 철렁했지만...
나도 주변 차량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운전을 잘하고 싶다.   

아무튼 엊그제 학원 갈 무렵,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과감히 우산을 접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내가 좌석에 오르자마자 기사 아저씨의 푸념이 속사포로 이어졌다.
우리 아파트 앞에서 어떤 대학생 아가씨를 두 번을 태웠는데,
탈 때마다 하도 빨리 가라고 재촉해대는 바람에 감시카메라에 찍혀 벌금을 14만원이나 물어내셨다는 거였다.
그리고는 절대 빨리 가란 소리 하지 말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셨다.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며 저는 시간 넉넉하니 천천히 가세요... 해드렸더니 아주 신이 나셨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택시를 타서고, 식당에 가서고, 얼마나 빨리빨리 소리를 해대는지에 대해 함께 수다를 떨었고 드디어 학원 앞에 도착,
택시 안의 미터기는 꺼져 있었고 아저씨는 이거 보라며 손가락으로 미터기를 가리키시더니, 내게 기본요금만 받으셨다.
빨리 가란 말에 긴장해서 카메라도 의식 못하셨던,
이제 그 아가씨 얼굴도 안다고, 다시는 안 태울거라고 다짐하시던,
하소연 하느라 미터기 켜는 것조차 깜빡하셨던,
안쓰럽고도 귀여운 택시 기사 아저씨 덕분에 반짝 해가 든 것처럼, 기분이 밝아졌다.
아마 내가 택시를 몬다면 그 아저씨처럼 일주일 열심히 벌어서 하루만에 벌금으로 날리는, 얼떨떨한 기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왠지 아저씨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셨으면 좋겠다, 는 초등학생 같은 일기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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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10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실물경제가 택시기사 아저씨들의 입에서 힘들다 혹은 살 만 하다가 가장 정확한 척도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나저나 깐따삐야님은 핸들만 잡으시면....야수로 돌변하시는군요..^^ 크르르릉~

비로그인 2007-08-1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페이퍼는 어쩜 이리 천사표 일기 같은지... :)

라로 2007-08-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글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깐따삐야 2007-08-10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가끔 택시 타면 기사 아저씨들과 나누는 대화들이 재미나요. 저는 참 이상한 게, 평소엔 소심하다가도 왜 핸들만 잡으면 대범해지는 걸까요. ㅋㅋ

체셔고양이님, 그건 아마 고해성사를 하듯 페이퍼를 쓰기 때문일 거에요. 실생활에선 사악하기 그지없으니까요.^^

nabi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종종 뵙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