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사랑하는 남자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는 말도 있듯 가끔 약간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에 시달릴 때가 있다. 요즘 즐겨듣는 노래가 김연우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라는 노래인데 노랫말에 그런 부분이 나온다.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같아.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계속 반복되는 그 부분을 듣고 있다보면 가슴이 짠해지면서 스산한 기운이 화악 몰려온다. 왠 청승에 왠 오버람. 날씨도 푹푹 더워질 기세인데 짜증 지대로구나.

  싸이를 거의 안 하지만 아이들이 워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데라서 가끔 방명록에 댓글을 달아주거나 어쩌다 내키면 일기 같은 것을 쓰고 나오거나 그 정도로만 활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방명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잊고 지냈던 한 남자가 안부를 남기고 간 것이다. 내 이멜 주소를 검색해서 내 싸이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아주 우연히 발견했고 들렀다는 것처럼 덤덤하게 글을 남기고 갔는데, 옛날 그 사람이 내게 품었던 감정은 그렇듯 심심한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로썬 얄팍한 호기심이 작동할 수 밖에. 내내 잘 살길 바랬으면서도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니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무슨 빌어먹을 심보인지. 스스로가 밥맛 없어서 마구 고개를 내둘렀다.

  갑자기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와서 나를 놀래켰던 그는 내가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처음엔 슬퍼하는 것 같더니만 얼마 후에 나를 미워하게 된 것 같았다. 나의 인간적 호의를 애정으로 확대해석했던 그의 잘못이라고 탓해 보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볼수록 충분히 오해하고도 남을 빌미를 제공한 내게도 책임이 전혀 없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마음이 쏠리지 않는 것을. 그는 그가 내게 선물했던 머플러 같은 사람이었다. 목에 두르면 따듯하고 포근하긴 한데 색깔이며 디자인이며 영 마음에 들지는 않는. 고맙긴 한데 두 번 다시 두르고 싶어지진 않는. 더 이상 친구일 수 없었던 그와 나는 조금씩 멀어져갔고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던 중에 그는 마치 선포라도 하듯 문득,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그렇게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참 후다닥 결혼도 한다, 고 생각하며 담담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한 이후에 그는 내가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면서 그의 아내가 나를 궁금해한다는 이상한 말로 다시 한 번 나를 놀래켰다. 아직 학생이었고, 야무지게 앞길을 닦아야 한다는 목표의식으로 투철했던 나는 그런 그를 속으로 마구 비웃고 있었다. 그리곤 바쁘다, 행복하시라, 는 냉찬 응대로 그를 지웠다. 사랑한 적이 없으니 그가 아쉽거나 그립지 않았고 결혼까지 한 마당에 나에 대해 지지부진한 감정을 가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얄짤없이 매몰차지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는 브라보, 를 외쳤다. 이렇게 당차고 똑똑할 수가! 감탄하면서.

  하지만 간사스럽게도 싸이에 있는 그를 보니 역시 참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어느새 의젓하고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고 공부하는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성실히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그를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도 드는 게 솔직한 마음. 그깟 삘 좀 없으면 어때. 저렇게 매사 반듯하고 내 사람에게 한결같이 헌신할 줄 알고. 그럼 되는 거지. 그렇게 한참 뒷북을 치다가 그의 머리숱이 많이 적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위안했다. 그래도 머리숱이 없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러다가는 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사는 데 머리숱이 그렇게 중요하냐! 라고 스스로 면박을 줬다. 아마 그 때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면 사랑은 받았을 것이다. 넘치도록. 그렇듯 사랑 받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인데 나는 왜 아직도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걸까.  

  아이러니한 실토지만 대체로 내 가슴에 단번에 꽂혔던 남자들은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였다. 이상하게 첫눈에 반했다가 나중에 실체를 알고 보면 나쁜 남자였다. 그 중에 한 인간은 멀리서 걸어오는 걸 보고 거의 3초도 안 되는 순간에 반해버렸는데 지금에 와서야 내가 너무 외로웠던 게지... 라고 자체진단을 내려보지만 아직도 그 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심장에 뽀로록뽀로록 물줄기가 뿜어오르는 것 같다. 나란 인간은 단순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서 일단 꽂혔으면 게임 오버다. 머리로는 계속 버저가 울려대면서 노노노네버, 인데 가슴은 팔랑팔랑 예스예스예스오케이, 를 외쳐댄다. 그러는 사이, 그의 시시껄렁한 허풍은 어느새 자신감으로 둔갑하고 얍삽한 변명은 부득이한 사연으로 승화되면서 그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걸 이해하고도 남는 종교적 경지에 다다른다. 시의적절하게 화내고 튕겨야 하는 타이밍을 놓쳐버리니 매력은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고, 안 그래도 품질이 썩 좋지는 않았던 남자들은 마음놓고 오만방자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거침없이 하이킥, 을 보면 서민정 샘이 이민용 샘한테 어설프게 튕기면서 마구 좋아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딱 나다. 하염없이 잘해주다가 한 번 튕겼는데 그게 먹히면 천군마마라도 얻은 듯 만족해하지만, 만약 안 먹히면 자동인형처럼 바로 거침없이 잘해주는 모드로 전환되는. 나의 측근들은 서민정과 나를 오버랩하며 배꼽 잡고 웃다가는 안쓰럽게 혀를 차고... 가관도 아니다. 내가 어쩐지 이민용 샘한테 끌리더라... 하면 넌 세 번만 만나면 아무하고나 정들거야, 라면서 무시하기 일쑤다.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좀 낮은 것 같지? 라고 물으니 평소 시니컬한 어떤 녀석은 아니야, 낮은 게 아니라... 아예 없어. 눈이 없어! 라고 말했다. 거의 바보 취급을 당하는 현실. 사실 바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끝까지 바보이면 좋으련만 문득, 정신이 드는 순간이 있다는 게 또 내 안타까운 연애사의 맹점이다. 약속을 밥 먹듯이 깨는 한 인간이 있었다. 시간 약속을 일단 두리뭉실하게 잡아놓고는 아주 늦게 연락을 하던가, 그 다음 날 연락해서 가지가지 변명을 둘러다대는. 이야기를 쭈욱 듣고나서 내가 괜찮다고 하면 왜 화를 안 내는 거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나중에 터뜨릴거냐, 라면서 도리어 버럭대던. 바쁜 사람이니까 몇 번 이해해주면 알아서 잘하겠지, 라고 믿었는데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기 같은 스타일은 보채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냅두면 나중에 알아서 잘한다길래 진짜 뒤늦게 뭔가 보여주려나보다... 라고 기대했다. 그리곤 말로 표현을 안하고 꽁하고 있으면 절대 모르니 그 때 그 때 말해달라고 부탁하길래 이제는 불만 있음 화도 내고 표현도 해야지, 라고 마음먹었다. 자기는 사실 무쟈게 단순한 사람이라서 알고보면 다루기 쉽다고, 힌트까지 주었다. 그런데 결과는... 말해도 소용 없다는 거. 말 안해주면 모른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알면 귀찮기 때문에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그저 단순한 게 아니라 머리가 나쁘거나 무신경한 건데, 나는 단순한 남자 하나 센스있게 다루지 못한다며 스스로를 자책했었다. 오직 스스로만 탓하며 기본 매너를 상실한 남자를 오래도 참아줬었다. 당일날은 분명 화가 나는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면 모든 게 이해되고 용서되는. 완전 지병이다. 하지만 몇 차례 그런 불상사들이 반복되면 나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관계를 끝내버린다. 갑자기 정신이 든다. 남자들은 일단 어이가 없단 반응을 보이고 간혹 후회도 했을까, 는 모르겠다. 싸워보지도 않고 끝내는 건 좋은 버릇은 아니란 생각도 들지만 순식간에 식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기운도 없고 더 이상 흥미가 없어진다. 참 무기력한 패턴.

  하도 사태가 이렇다 보니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 눈에 매력 있는 남자는 내 짝이 아니라는. 엄마는 내게 이모부 같은 남자를 만나라는 뜬금없는 조언을 하셨다. 이모부는 성실한 직장인이고 점잖은 외모에 다소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참을성이 많으신 분이다. 우리 이모는 예쁘고 솔직한 분이긴 하지만 화가 나면 후라이팬을 아파트 창밖으로 집어던질 정도로 다혈질에다가 가족들 위에 제멋대로 군림하는 스타일. 그런데도 이모부는 이만큼 잘 살게 된 건 다 이모 덕이다, 라고 늘 모든 공을 이모에게 돌린다. 이모 얘기로는 꼬집고 쥐어뜯고 해도 곰탱이마냥 아무 반응을 안해서 답답해 미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라고 하던데 엄마는 묘하게도 내게 이모부 같은 사람을 만나랜다. 그러고보면 이모부도 내게 참 잘해주시긴 한다. 언제나 내게 후한 점수를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솔직히 이모부 같은 사람은 내가 혹해서 반할만한 스타일은 아니다. 저 사람 뭐야, 재미 없고 지루해, 그냥 본척만척 스쳐지나고 말 사람인데 엄마는 이모부 같은 남자라야 널 제대로 알아보고 널 아껴줄 수 있다고, 아마 그런 남자가 네 가치를 알아보곤 열심히 공을 들이게 될거라고, 아리송한 말씀을 하셨다. 뭐... 이모부는 최소한 나쁜 남자는 아닌 것 같다.    

  더 이상 나쁜 남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 첫눈에 좋아진다면 경고등이 켜졌다고 생각하자. 진실하고 헌신적인 남자를 놓치고 나서 아쉬워하지도 않기로 한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확 끌리지 않더라도 세 번 더 생각하자. 그리고 미천한 연애 경험에다가 수학 정석을 비롯해서 작업 정석까지, 정석에 무지몽매한 나는 당분간 그냥 생긴대로 살기로 한다. 언젠간 장님 눈 뜰 날도 오겠지. 아니면 어느 눈 밝은 사람이 나를 알아보아 주던가. 어쨌든 사랑하는 남자가 없는 지금. 혼자라는 게 무거우면서도 가볍고, 쓸쓸하지만 왠지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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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05-1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참 많이 인내하셨네요. 그렇게 인내할 땐 왠지 사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썽내고 팩 토라지고, 흥분해야 사랑이 되더라고요. 참 이상하죠..

Mephistopheles 2007-05-14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은 선수가 될 자질은 없어보이십니다...^^
(그런데 그 머플러는 말입니다..잡아 댕기면 매고 있는 사람에게 심각한
상황을 야기시킨다죠..^^)

깐따삐야 2007-05-1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맞아요. 좀 막 대한다 싶으면 긴장하며 잘해주고 편하게 대해주면 오만불손해지고... 아무래도 남이라서 그런가 봐요. 어차피 남이라서.

메피스토님, 선수는 커녕 선수들한테 놀아나지만 않으면 다행이죠 뭐. 머플러 이야긴 동감입니당. ㅋ

이게다예요 2007-05-1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관계를 한 마디로 대변해 주는 말 같네요. 어차피 남이라서.
왠지 너무 정확한 말 같아서 가슴이 서늘해지네요.

깐따삐야 2007-05-1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예요님, 저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 저에게는 자기방어, 자기보호의 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상처를 안 받는다거나 덜 힘든 것도 아니긴 하지만요.^^